詩가 있는 하루

슬픈 공복-정진규, 제2회 이상문학상

길가다/언젠가는 2009. 10. 30. 21:12

 

슬픈 공복

 

정진규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차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 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 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 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시인>200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