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2009년 상반기 당선작
구름의 무역항 외 4편 / 서윤후
구름이 밀려오는 동안, 지상의 모든 불빛들은 등대가 되었다
부두에 기후들이 포장되어 있었다 습한 공기를 머금고 와글거릴 때마다
빠른 속도로 수평선을 끌어당기며 달려오는 저 구름떼들의 자취,
맛있게 익혀진 별과 구름의 조각들에 침이 고이는 섬에서는
우산을 들고 수중을 낙하하는 신사들의 코트자락이 젖어가고 있었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기후가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증발하는 무역의 법칙 속에서 그들은 가져갈 것이 없었기 때문일까
방목된 불순물의 언어들이 몰려와 그들의 짐칸에 실려 갈 뿐이었다
구름의 항구마다에 기생하는 안개들은 기후를 삼키고 달아났다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범죄라서 땅 끝 나라엔 갈증에 무너진 땅들이
각질처럼 떨어져나갔고 아이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울어댔다
구름은 고요히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자엔
누군가 포장하지 않아도 지구를 공전하는 데 단단한 매듭이 지어진
취급 주의의 결정체들이 흥건하게 고여 있을 뿐이었다 바람은 또,
구름을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푸른 허방에서 유방처럼 매달린다.
납작한 스캔들 / 서윤후
밤공기가 서걱이는 지상의 불빛들이 커서처럼 깜박인다
네 개의 다리로 사는 불구의 여자가 분리수거장을 기웃거리며
다리미에게 시집을 가던 날을 떠올린다
주공2단지 세탁소에 드러눕던 날
신혼의 달콤함은 수증기로 증발했다
자꾸 일어나려는 보푸라기를 다림질하면서
납작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세탁소에 걸린 옷들을 끌어안고 스팀을 뿜어대며 울 때마다
여자의 의도를 의심한 다리미는 그녀의 몸에 흔적을 구워내기도 했다
노릇노릇하게 멍든 그녀의 허름한 옷을 벗겨내면,
결국 어느 숲에서 땅을 벗겨내고 뻗었던 나무의 잔재일 뿐이었다
볼품없는 그녀의 이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리미는 발기된 촉수를 데워 온몸을 더듬곤 했다
간판 아래 볼록거울로 비쳐오는 햇빛을 빨아 당기며
홀로 광합성을 했던 그녀,
그럴 때마다 보푸라기들만 여기저기 터져오르고,
그녀의 몸에서 실밥들이 굴러다녔다
흔적을 주울 때마다 다리미는 발바닥까지 뜨겁도록 성을 냈다
그녀와 다리미가 접혀 모서리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모서리를 따라 남편을 내놓았고,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다리미가 콘센트를 배꼽에 꽂고 충전을 하던 저녁,
내다버린 분리수거장에서 밤새 발목까지 흥건한 소문들이 흘러나왔다
외투를 껴안고 아랫도리를 끌어안았던 그녀,
배신하는 계절의 길목에서 스스로 맨바닥에 누워 자맥질한다
세탁소에 차광판이 내리고 뜨거움을 간직하고 싶은 그녀는
네 개의 관절을 흔들어본다
다림질이라도 한 듯 날카로운 밤의 모서리가 유난히 아파오는
그녀의 납작한 스캔들.
나무들의 문법 / 서윤후
나무의 폐활량을 훔쳐오고 싶었다
원주율을 기억하는 렌즈에 초점을 맞추며
풍경의 그늘에 깔린 숲을 필름 속에 담아냈다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어둠의 필름 속에 들어가기 싫은 나무들은
뿌리부터 빨아 당겨 광합성을 펼쳤다
얼기 직전의 저수지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조율되지 못한 새들의 비명을 주워 먹으면서
호흡을 놓지 않는 나무들의 언어들은
보이지 않게 한 바퀴씩 늘어나고 있었다
귓속말밖에 할 줄 모르는 화법의 흔적들,
귀가 잘려나간 고흐처럼 귓바퀴를 잃고
홀로 벌레들에게 아삭아삭 씹혀가는 그루터기는
조리개가 어두워지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베인 테두리부터 서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수직으로 자라나는 나무들의 언어
구름은 우주의 각질이 되어 부스러지고
생채기난 가지 사이로 안부를 전하는 방법은
나무들의 자라나는 반대방향으로 인화되는
나의 방법과 달라 꼭짓점이 되었다
배꼽의 내면 속, 깊은 뿌리가 흔들리자
이제 그만 속삭여도 된다고 소리친다
나이테들이 걸어 나와 우주를 감아 돌리는
인화되지 않은 사진 한 장, 가지마다
펄럭이는 우리의 어긋난 화법과 촬영법.
옥탑방 익스프레스 / 서윤후
― 수신자명 ‘구름’
1. 상자를 구해 물건을 담고 포장한다
옥탑방을 택배로 보낼 때는 주의해야 한다
아귀가 맞지 않는 창문은 외풍이 세어 들어와 물건을 손상시킬 수 있었다 담는 물건은 나 하나뿐이었다 물관과 보일러관은 쥐들의 통로가 되었다 밀린 고지서와 구인구직란이 찢어진 신문지를 주어다 상자의 구멍을 막아 포장했다 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암실이었다 인화된 나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주소를 적는다
구름과 펜팔을 시작한 것은 사다리가 생긴 날부터였다 지상의 모든 이야기를 빼곡이 주어 담고 사다리에 올라가 전해주곤 했다 구름은 실업자라고 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이유였다 어릴 적 과학책의 변명을 외웠다는 오해로 화해했다 옥탑방을 보내 구름과 방랑의 동거를 하기로 결심했다 보내는 사람 란엔 여섯 자리의 우편번호와 낙서처럼 지워지던 주소를 옮겨 적었다 받는 사람 란엔 이렇게 적었다 ‘빈문서 1’ 당신은 나의 유일한 소통을 새겨들었던 백지였으니까
3. 택배를 취급하는 곳에 접수한다
접수하는 동안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 누런 젖니들이 달라붙은 밥통과 얻어온 반찬을 먹으며 구름 한 점 베어 물었다 세상을 탈출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나는 배송되어야 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택배를 보냈다 탄생의 이력인 열세자리의 주민번호가 운송장 번호로 찍혔을 때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배송은 특급배송이었다 나 홀로 고객인 이곳에서 곧바로 구름의 답장을 수신할 수 있었다
4. 배송 완료
나는 반송된 하자품이 되어 돌아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집 안의 녹슨 세간들이 달그락거리며 상자 안 에어 캡들을 뾱! 뾱! 뾱! 터뜨리며 짐칸에 실렸다 닫힌 문을 두드리는 구름의 집배원은 라디오에 출연해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온다고 전했다 주인의 잔소리가 계단의 관절을 끊으며 올라올 쯤, 구름이 보내온 새로운 세입자가 문을 두드렸다 지상의 구름이 되겠다고 마지막 편지를 써 보내기 전에, 발목까지 흥건해지는 나의 첫사랑, 아, 옥탑방 익스프레스!
겨울 국밥 / 서윤후
먼지가 눈처럼 쌓여있는 문 틈 앞에서
처마에 꽁꽁 언 빗물이 낙하를 보았네
목련꽃 흐드러진 붉은 그늘이
간판을 사방으로 환하게 하는 국밥집,
돼지 수육 삶는 냄새가 따뜻해
소복이 쌓인 눈발은 서로 끌어안고 녹았네
시장의 끄트머리부터 뽑혀 나갔어도
수많은 젓가락과 숟가락을 돌려먹었던 국밥집
돼지수육보다 더 하얀 머리칼 동여매고
케케묵은 김장독을 열어
얼어붙은 묵은지를 썰던 할머니 안부가 궁금하네
안방의 모서리를 트고 만든 식당 안엔
뚝배기 박박 긁어가며 점심을 때우는 인부들과
비닐이 벗겨진 의자에 앉아
싱거운 이야기 풀어놓는 시장통
가슴이 시장한 사람들이 숟가락을 들었네
푸른 아크릴 간판이 벗겨져
소금 같은 눈발을 이겨내는 동안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식당 문 굳게 닫히고
빨간 딱지가 무서워
스스로 눈 무덤을 파고 숨었던 사람들
뽀드득 발자국 소리가 정겨웠던 시절
돼지 수육 한 점에 난로보다 뜨거워지던
해진 나무 식탁이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난 것도 오래였지
먼발치서 얼룩 낀 창문 너머론
물구나무선 의자들만 돼지새끼처럼 부대끼고
난로는 그동안 많이 울었던 것인지
검은 눈곱들만 흩날리는 국밥집,
눈길이 걷히고 나면 이젠 질퍽해질까
허기진 구름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네.
서윤후 (본명 서현동) 시인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選後感|
250여 분의 응모자들 가운데 두 차례의 예심을 거쳐 열아홉 분의 작품들의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응모편수는 예년의 수준을 유지했으나 작품 수준은 월등히 높았다. 또한 세대가 바뀔 정도로 젊은 시문학도들의 응모가 많아 우리는 우리 시의 밝은 미래를 예감할 수 있었다. 열아홉 분의 이름들을 가나다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강건늘, 강동완, 김혜숙, 김호기, 박송이, 박지혜, 배성희, 상향선, 서윤후, 손상호, 신병호, 이상학, 이수진, 이지원, 이현옥, 임요희, 전형주, 차우진, 최하 씨이다. 본심위원들은 이 분들 가운데 박지혜, 배성희, 서윤후, 손상호, 신병호, 이상학, 이수진, 이지원, 차우진, 최하 씨 등 열 분의 작품들을 두루 나누어 꼼꼼히 읽었다.
우리가 보기에 이분들의 작품들은 이미 우리 시의 평균적 수준에 이르러 모두 당선권에 들 만한 것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심사에서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것은 심사위원들이 각자 추천하는 작품들이 달라 좀처럼 합의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우리는 장고 끝에 박지혜, 서윤후, 이수진, 최하 씨로 압축하여 논의를 계속하였는데 이번에도 좀처럼 당선자를 합의하지 못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우리는 고육지책(?) 끝에 문단의 선배인 원구식 씨가 추천하는 서윤후 씨와 정과리 씨가 추천하는 이수진 씨를 당선자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심사과정에서 보았듯이 이번 심사위원이 달라졌으면 그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 심사에서 뽑히시지 못한 분들도 우리보다 눈이 밝은 선자에 의해 언제든지 충분히 발굴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 심사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기로 하였다.
서윤후 씨를 추천한다. 서윤후의 작품들은 고르게 작품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강점이 있었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경향성에 크게 물이 들어 있지 않으면서도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 의식에 대한 치밀한 경사는 앞으로 대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투고한 작품들의 경향은 실재와 상상을 넘나들며 자재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넉넉함이 있었다. 특히 「구름의 무역항」이나 「나무들의 문법」「겨울 국밥」 같은 작품들은 약관의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이 배어 있었다. 언어의 운용에 있어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이는 패기를 고려할 때 그리 흠이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좀 더 진지하게 대상과 세계를 성찰하는 성숙한 시선이 요구될 터인데 이 역시 앞으로 나아질 것으로 믿는다. (박주택)
이수진 씨를 추천한다. 이수진 씨의 시는 시의 도반道半들에게 썩 미묘한 문제를 제기한다. 시가 현실에 대한 비유라는 건 토론을 요하지 않는 일반적 정의 중의 하나인데, 이씨의 시는 그 정의와 대각선의 방향으로 어긋나 있는 것이다. 이씨의 시를 저 정의의 순수한 시각으로 독해하면 시의 풍경은 별로 사실스럽지도 않고 그에 붙는 ‘설명’들도 조급하기만 하다. 그러나 거꾸로 비추어 보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난다. 다시 말해, 시가 현실의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시의 비유라고 읽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속이 개에 불과한 거죽의 인간들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서성이는” 모습으로 목줄이 매인 채로 “어둡고 좁은 지하차도를 지나” 넘어졌다 일어서고 밀려갔다 밀려오길 반복하는 치욕과 불안의 실상을 포장하는 가운데, 러브호텔(“모란장”)의 화살표가 유인하는 “창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광경이 선연히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속내 풍경을 아는 사람이 “한 접시 수육을 먹는다면” 그건 바로 “컴컴한 공포를 물어뜯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상인 개를 강박적으로 삭제하고 싶어 하는 히스테리 충동의 표출로서.
이런 시적 방법론은 매우 특이한 전도이다. 이 특이성에 호기심을 느끼기 전에 우리는 그 이유를 물어야 하리라.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도저한 부정적 시각이 개입해 있다. 그 부정적 시각은 그냥 현실을 무기력하고 참담하고 욕되고 허망한 것으로 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걸 표현하는 데 전도까지 감행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이 시들이 환기하는 건, 현실의 시시각각의 ‘허망해짐’이다. 즉 항상 활기가 넘치는 듯한 표정으로 시시덕대고 까불어대는 현실이 문득 기력이 제로치가 되면서 하얗게 꺼져버리는 것이다. 시는 무기력을 전하는 게 아니라 기력의 붕괴를 가리킨다. 현실은 폐허가 아니라 불현듯 닥치는 재앙인 것이다. 그 재앙이 일상이니, 그 현실은 사소한 재앙들의 영원한 지속이다. 우리의 삶이 그 영원한 지속 속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재앙들의 “그늘인가, 배설인가”? 이 질문은 무척 곤혹스럽다. 산다는 것의 곤혹스러움과 엄정함 한복판으로 우리를 몰아넣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인의 등장을 기꺼이 축복하고자 한다. (정과리)
늘 드리는 상투적인 말씀이지만, 본지에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며, 당선자들껜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
▲ 심사위원 : 원구식, 정과리, 박주택, 오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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