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2009년 제7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수상작및 후보작- 윤의섭외

길가다/언젠가는 2009. 11. 20. 22:00

2009년 제7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石魚


윤의섭


계곡을 돌아나온 바람 끝에 폭포 소리가 묻어 있다
예민해진 귀는 푸른 물빛을 느낀다

느지막한 휴일 오후에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언제부터 외로웠냐고 묻자 이번 생부턴 아니었을 거라며
수화기를 일세기에 걸쳐 내려놓는다

물소리는 점점 커졌다
용케도 폭포가 메마를 철을 피해 찾아온 것이다
지난 가뭄에 다 말라붙었어도 물길은 지워지지 않아
사막의 와디 같은 山客들이 여기저기서 합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류를 따라 세워진 돌무더기에
돌멩이를 쌓으며 소원을 빈다
자신들의 운명을 타고 난 별을 옮기는 중이다
사자자리 황소자리 처녀자리 물고기자리 물병자리가 지상에 그려지고
돌탑이 높아질수록 소원은 하도 간절하여
별을 얹는 동안 한 생애가 흘러간다

그 후로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는 알리는 것과 알리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십년을 헤어져 있다가도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십년을 견딜 수 있는 세속의 情理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아침마다 얼굴을 봐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럴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달을 주워 온다 달을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조금씩 사그라져 감쪽같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바라본다 가끔은 엄한 자리에 달을 놓아주기도 한다 미끄러져 달아나는 눈썹달의 지느러미가 흐릿하다 달을 들고 나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폭포 아래 용소에 石魚가 산다는 소문은 내게 간신히 전해졌다
실은 물속에 시퍼런 돌덩이가 잠겨있을 뿐이지만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石魚는 상류로 상류로 헤엄치고 있었다
수 세기를 거슬러 기원전으로
다시 제 나이만큼의 세월 건너 저 자리로 돌아와 외로운 회향을 거듭하는
石魚
온통 푸른 눈물에 잠겨있는
石魚


― 애지, 2008년 겨울호

 



제7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후보작

함기석, 양해열, 길상호, 장석원, 신용목, 최금진, 김선우, 장정자, 윤의섭, 김이듬.

 


황소


함기석



빌딩 앞에 황소가 서 있다
용접기로 쇳조각을 이어붙인 황소
트럭바퀴로 만든 심장과 구리 혈관들
백미러 눈엔 홍등가 불빛들이 번쩍거리고
등을 가로지른 쇠파이프 척추에서
검붉은 녹물이 흘러내린다

황소는 빌딩 숲을 바라보다
화학공장 옆의 도살장 건물을 바라본다  
밤마다 소들의 비명이
뜨거운 쇳물처럼 소용돌이치는 곳
노란 장화 신은 일꾼들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소머리를 질질 끌고 간다

황소의 콧구멍에서
쇳가루 같은 어둠이 흘러나오고
노란 환각제처럼 달빛이 내리는 밤이다  
불빛들이 유령처럼 흐늘거리는 거리를 바라보다
황소는 검은 숨을 푸푸 내쉬며
성큼성큼 도로를 건너 홍등가로 간다


― 애지 2009년 겨울호

 




그림자놀이


길상호


저물녘 산동네 아이들이
햇빛이 남은 담장에 대고
그림자를 만들며 논다
자그마한 손들 겹치며
주문을 걸 때마다
나비가 되고
독수리가 되고
토끼가 되고
늑대가 되고
아이들 담장 위에서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날다가 달리다가,
꾀죄죄한 얼굴 벗어놓은 그림자들
깔깔깔 소란스럽다  
가끔 담장 균열에
다리가 걸려 넘어져도
벌떡 웃으며 일어난다
서산의 해가 불을 끄면
끝나버릴 웃음공연
시간이 잠시 멈추길 바라는
나의 그림자는 그러나
이미 너무 길게 자라버렸다


― 애지 2009년 겨울호

 

 

 

 



가소성(可塑性)


장석원


우리는 진화한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상호 배반으로 조화를 이룬다 세계를 염습하듯 (열심으로 열심으로) 우리를 탈피시키고 우리를 가공하고

고통과 애도와 절망과 이별을 포장해서 열심히 열심히 속이기에 바쁘다 속이기로 작정한다 우리는 적응할 것이고 살아갈 것이고 빛나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고 우리는

단결해서 이 국난을 극복할 것이고 민족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고 그래서 적당한 몸이 필요하고 우리를 달굴 신념을 생산해야 하고 (생산은 행복, 생산은 아름다움) 온전하게 한번 사랑도 못해본 나는 아직 그 슬픈 뜻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조짐을 먼저 읽은 자에게 형벌을, 질서를 위협하기 위해 뱀의 혓바닥을 내민 자들을 단두대로, (깨지듯 아파지더라도) 조국을 위해 세계를 위해 질서와 체제의 발전을 위해 나는 당신을 매장하고 우리는 슬픔도 모른 채 만장을 들고 항문에 힘을 주고

이겨내자 견뎌내자 발맞춰 나아간다 죄와 벌을 배낭에 넣고 결사항전의 자세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는 우리를 조져야 한다


― 애지, 2009년 겨울호

 

 

 

 



시큼한 어둠


신용목



어둠은 어쩌다 사지를 잃었을까 사방을 더듬어도 몸통만 둥글다
굴릴 수도 던질 수도 있지만  

익으면 꼭지가 까맣게 타지
나는 불빛을 그렇게 믿는다 모든 흙이 벽돌이 되거나 타일이 되거나 기와가 된 이후의 폐허

자정의 정수리를 똑 따내 둥글게 깎고 나면
송알송알 아픈 식사가 떨어져 굴러가는 곳

그곳에서 질환을 앓는 이전과
스르르 밀면 모든 벽이 현관이 되는 밤의 가옥을 머리로 쾅쾅 치고 가는 추억의 상속자들

둥글다고 부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툭하면 창 밖에서 내세가 익고 있다 불빛은 어쩌다 가죽을 잃었을까 사지를 껴안아도 흘러내리는

장례는 죽음에 애드벌룬을 달아주는 것
그리고 담아놓은 머리의 수를 센다 반듯한 상자에 누워 되도록 먼 아침으로 팔려가는

나는 어둠을 그렇게 믿는다 모든 집이 무덤이 되거나 유적이 되거나 기록이 된 이후의 폐허

그곳에서 꼭 한 알 꺼내무는 시큼한 과즙이
꾸역꾸역 절름발로 넘어가는 목구멍


― 애지, 2009년 여름호

 

 

 

 


생불


장정자


깊은 침묵이 빨간 고무 들통에 엎드려 있다

한 번도 키를 높여본 적 없는 생불처럼

새벽호 동방호 대망호의 저인망에

고스란히 깨끗하게 투망했다

낡은 그물을 깁는 애비 곁에서

에미는 자연산 광어라고 흰 배때기를 철석이자

한번씩 크게 파닥거려 생물임을 연출한다 그리곤

제 살빛보다 더 깊은 눈 쏠림

일생 키를 세워 본 일 없어 들통이 대양이다

찰나에 엎드려지고 낮아져 사라졌다

오이도 방파제 길상호 저인망 천막 속

한번만 흔들어보면 단번에 적멸을 작파하고

애비와 에미와 척척 죽이 맞아

허공을 눈부신 흰 빛이게 하는 광어들 있다

제 몸이 생명줄인 줄 아는 물고기들 있다


 

― 애지, 2009년 겨울호



 


평일의 이삿짐트럭


김이듬



월요일엔 참아줘요
꿀벌처럼 시계 속 시간처럼 나는 거기 없어요
저녁이 흘러가고 포도주가 줄어들고 쐐기풀 너머 당신들이 죽어가고
이윽고 밤이 와도 나는 바빠요 한창때예요
매일매일 학교 가고
화요일에 열리는 작가 워크숍에도 초청받았어요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세미나에 가야해요
돈도 벌었고 친구들도 생겼지요

전화벨은 계속 울려대고
이 세상 모든 것은 활기에 넘쳐나요
시를 안 써도 시인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술을 사고
대학에 나간다 하면 질문이 많아져요
나는 진지하고 사물을 꿰뚫을 수 있는 체 눈을 깜박거려요
질 것 같은 쪽에 개입하지 않고
공박하는 사람에게 격노하지 않아요
저 너머 누군가 팔꿈치를 괸 채 나를 바라보네요

일요일에 만나요
오늘 새벽엔 악몽을 꾸고 발정한 짐승처럼 몸부림치다가
야산을 헤맸었죠 죽은 개를 치웠어요
장미와 쐐기풀 너머에서 덥석 손을 잡고 놓지 않네요
오, 나를 구해줘 이 철칙으로부터
만족스러운 섹스와 포도주에서 꿀통에서 날 구해줘
숙련된 아르바이트와 부딪치기라도 하면 먼저 접히는
자동차거울과 완전한 우정들로부터 구해줘 제발

아우성치는 저 목소리는 내가 나로부터 떠나보냈던 미친 자
불시에 행려병자 같은 꼴로 꿈꾸는 표정으로 나를 찾아와요
주홍색 이삿짐트럭을 몰아붙여 내 방을 부수지요
그러나 나는 이미 세상 속으로 이주해간 건강한 시민
더 이상 내가 쓴 당신을 따라 망치고 방황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일주일에 한 번도 우리는 못 만날 거예요
그럭저럭한 시간들이 만사형통한 날들이 나로부터 당신을 격리시켜 가겠죠
멀리서 서로를 부러워하면서 바라보고 있겠지요


 

― 애지 2008년 겨울호

 

 

 

 

 


그림자의 키를 재다


김선우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죽었다. 팔월이었다.
나는 일기장을 펼치고 이렇게 썼다.
"하나의 유랑이 끝나고 또 다른 유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올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또다시 이스라엘 지배하의 팔레스타인으로?
오, 이런! 나는 다시 일기장을 펼치고 이렇게 썼다.
"팔월에 그는 돌아갔다. 유월에 다시 오기 위하여."

죽는 순간 아주 살짝,
키가 준다고 생각하는 부족이 있다

안녕히!  나는 찢어진 당신 그림자에 인사한다
심장에 흰 제비꽃 무덤이 돋은 나를
내 그림자는 알고 있고
풀 무덤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그림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안녕히! 당신 그림자의 키를 잰 최초의 여름이
풀꽃처럼 웃으며 지나가는 저녁이다

찢어진 그림자가 사뿐히 공중에 떠오른다
가벼워진 당신 그림자에 드리는 첫 입맞춤,
걱정 말아요 아주 살짝, 키가 주는 것일 뿐
당신은 잘 싸웠어요
잘 사랑했어요
쉼표처럼,
살짝 키가 주는 것
쉼표처럼,
살짝 쉬는 것

팔월에 그는 돌아갔다
유월에 다시 오기 위하여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끝은
최초에 지나지 않는 최후의 그림자가
떨어진 조그만 흰 꽃으로 정성들여 입술을 닦았다


― 《작가세계》, 2008년 겨울호

 

 

 



꽃들은 구멍을 가꾼다


최금진



꽃들의 아랫도리는 위에 달려 있고
밤마다 먹구름 뒤집어 쓴 달이
얼마나 여물었나, 창가에 플래쉬를 들이댈 때
오므렸다 다무는 할머니 입은
즐겁게 숨쉰다

할머니를 떠났던 사내들은
날벌레처럼 아주 작은 날개를 달고
할머니 벌어진 꿈속으로 귀향하고
무엇이 우스운지 잠꼬대를 하신다
할머니 지팡이가 날마다 짚고 다니던 꿈의 그 밑바닥은
구멍 숭숭 뚫린 모래밭, 추억은 물빠짐이 좋다

구멍 달린 것들은
그 축축한 기공을 열어 자신의 모성을 공기에 섞는다
안에 감추고 있던 어둠을 밖으로 까뒤집으며
단내를 풍긴다
빨랫줄에 널린 텅 빈 할머니 속옷들도
비누 냄새를 풍긴다
내 옷도 그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도로변 화단에서 풀을 매는 여자들처럼
꽃들은 앉아서 오줌을 눈다
잘 여문 길들이 흘러간다
아버지가 꽃상여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갔고
나는 화단에 심겨진 꽃을 몰래 뽑아 집에 가져온 적이 있다
할머니가 웃었었다
꽃들도 웃었다

할머니는 주무시면서
벌린 가랑이 사이로 땀냄새 나는 꽃들을 쏟아낸다


― 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재수 없는 날의 오후
-게놈지도 5


양해열


  14시, 게놈지도를 훑어본 보험설계사는 청약서에 ×표를 쳤다 붉은 십자가가 기울자 우울증이 심해졌다 탈모가 일어나고 비곗살이 많아지고 시력이 나빠질 게 뻔하단다 우성인자를 복제하지 않고 자연 임신을 선택한 엄마가 오늘따라 더 밉다 왜 유전학자를 안 믿고 하느님을 믿었나요?

  또 취직에 실패했다 인사부장은 근로계약서를 화면에서 지웠다 진짜 이력서는 내 핏속에 있었다 1년 안에 조증에 걸릴 확률 50%, 상사 폭행 60% 집중력 상실 70%...... 양극성장애를 관장하는 내 11번 염색체, 빌빌 꼬인 불멸의 코일 탓이다 15시 정각의 비행기가 3초씩이나 연착했을 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16시, 게놈지도를 위조하려던 극악무도한 놈과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오늘도 불신검문에 걸렸다 세상에나, 제 몸의 설계도를 바꾸려는 놈이 또 있다니! 귓불이 따가운 건 둘째 치고 요즘은 피 한 방울도 아깝다 유진 머로우 피도 이제 몇 팩 남지 않았다  

  맞선 본 17시는 차라리 치욕이었다 공부 못하는 유전자를 가졌다며 비너스처럼 못생긴 여자에게 퇴짜 맞았다 요즘도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가 있다니! 텅 빈 동물원에나 보낼 인간, 아냐 아직까지 그 여자, 사타구니에 캐스터네츠를 붙이고 있는 지도 몰라


―애지 2009년 겨울호

출처 :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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