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일(吉日)
----------------------김나영
외삼촌의 파산이 오빠의 발 앞에 엎질러진 후
오빠의 청춘에 붉은 차압 딱지가 붙었다.
늘 생물도감 속에 숨어서 지내던
길거리 꽃 한 송이도 꺾지 못했던 오빠가
환갑이 다 되어 수백 송이 꽃 속에 파묻혀 있다.
멀리 사는 친척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하루는 부족하다고
2박 3일 밤낮없이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에그머니나 오빠 망령 들었나 보네
나는 떡을 먹다가 목이 메고 마는데
내 등 두드리던 외숙모, 걱정 말란다
오늘은 길일이란다.
이렇게 큰 잔치 배설(排設)해 놓고
정작 오빤 부끄러워졌을라나
사진 속에서 빠져나오질
않는다.
하객들 불러 모아 놓고
꽃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질 않는다.
오빠의 생을 통 털어
오늘은 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날.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 하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 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 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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