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밥을 따서 무엇에 쓰게요?
그대 밥상에 놓게요.
나는 푸른 연밥은 질색이에요.
먹으라는 게 아니라 들어가 쉬라구요.
2
연밥 따는 아씨여
그렇게 많은 구멍이 내겐 필요 없어요
축축이 젖은 옹관들 빼곡하게 박힌
그 공동묘지는 뒤울이 너무 깊으니
내겐 단 한 개의 무덤만 줘요
3
죽은 이들이 흘리고 간 머리카락이
연밥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늪이었네
붙들고 싶은 것이 남아
겨울이 와도 연밥은 푸르렀고
아기들의 손톱은 쉬이 짓물렀네
들어가 쉴 수 없네 아씨여
나는 푸른 연밥은 질색이라오.
들어가 쉬라는 게 아니라 그만 구멍을 나오라구요!
이름도 가져보지 못한 채 눈 가려져 던져진
아기들이 꽃필 차례에요.
어서요, 이 밥을 따야겠어요.
내 몸속에 잠드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꽃나무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그러니 애인아
- 늙은 진이의 말품으로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뭍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것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 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무서운 들녘
깊고 캄캄한 잠 속에서
다 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온몸 일으켜
서는 새싹들
낱낱 푸른 벼랑들
봄마다 나는 두려워 서성인다
지상에 산 것들 있게 하는 배냇힘,
초록의 독기 앞에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
새싹의 말씀 들으며 네 발 달린 짐승인 내가
처음 온 아기처럼 엎드려 독을 빤다
<전략> '쓴다'라고 말할 때, 시 쓰는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넓고 거친 격랑 속이다. '쓴다'의 거리감 속에는 섣부른 신비가 개입하지 않아서 좋다. 쓰는 주체로서의 나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모든 주체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눈 코 귀가 해지도록 안테나를 세우고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중략>
나는 나이고 나 아니기도 하다. 나와 다른 너와, 나이기도 한 너를 우리라고 할 수 있다면, 시 쓰기는 우리의 쓸쓸함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몸을 바싹 붙이는 일, 몸과 몸의 경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경계를 지우거나 넘어서는 일, '지금 여기'의 이 아득한 거리감 속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후략>
- 김선우
그에게 시적 형이상학은 그것 자체로 현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대상들을 향한 삶의 구체일 뿐이다. 이것은 구체이기 때문에 삶의 리듬에 연결된 노래는 더욱 곡진하다. 그는 그 삶의 모든 구체 앞에서, 슬픔일 때 곡비(哭婢)가 되고 기쁨일 때 연인이 될 줄 아는 시인이다. 한 몸으로 여러 몸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 한 몸의 형태가 여러 몸의 율조로 거듭나는 곳에 그의 시가 있다고 이제는 말해야만 할 것이다.
박수연, '사랑의 형(形)과 율(律)' 중에서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드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김선우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드신 이 누구신가>
2004년 현대문학상 수상.
*출처/신남영(현금당)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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