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무서운 들녘 외/ 김선우

길가다/언젠가는 2007. 11. 7. 22:45
킬링필드, 연밥 따는 아씨의 노래

 

1

 

그 밥을 따서 무엇에 쓰게요?


그대 밥상에 놓게요.


나는 푸른 연밥은 질색이에요.


먹으라는 게 아니라 들어가 쉬라구요.


2


연밥 따는 아씨여

그렇게 많은 구멍이 내겐 필요 없어요

축축이 젖은 옹관들 빼곡하게 박힌

그 공동묘지는 뒤울이 너무 깊으니

내겐 단 한 개의 무덤만 줘요


3


죽은 이들이 흘리고 간 머리카락이

연밥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늪이었네


붙들고 싶은 것이 남아

겨울이 와도 연밥은 푸르렀고

아기들의 손톱은 쉬이 짓물렀네


      들어가 쉴 수 없네 아씨여

      나는 푸른 연밥은 질색이라오.


들어가 쉬라는 게 아니라 그만 구멍을 나오라구요!

이름도 가져보지 못한 채 눈 가려져 던져진

아기들이 꽃필 차례에요.

어서요, 이 밥을 따야겠어요.

 

 

   내 몸속에 잠드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꽃나무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그러니 애인아

    - 늙은 진이의 말품으로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뭍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것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 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무서운 들녘

 

 

깊고 캄캄한 잠 속에서

다 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온몸 일으켜

서는 새싹들

낱낱 푸른 벼랑들

 

봄마다 나는 두려워 서성인다

지상에 산 것들 있게 하는 배냇힘,

초록의 독기 앞에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

 

새싹의 말씀 들으며 네 발 달린 짐승인 내가

처음 온 아기처럼 엎드려 독을 빤다 




< 영상 출처 : www.poemsong.com >


 

<전략> '쓴다'라고 말할 때, 시 쓰는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넓고 거친 격랑 속이다. '쓴다'의 거리감 속에는 섣부른 신비가 개입하지 않아서 좋다. 쓰는 주체로서의 나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모든 주체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눈 코 귀가 해지도록 안테나를 세우고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중략>

 

 나는 나이고 나 아니기도 하다. 나와 다른 너와, 나이기도 한 너를 우리라고 할 수 있다면, 시 쓰기는 우리의 쓸쓸함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몸을 바싹 붙이는 일, 몸과 몸의 경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경계를 지우거나 넘어서는 일, '지금 여기'의 이 아득한 거리감 속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후략>

 

- 김선우

 

 

 그에게 시적 형이상학은 그것 자체로 현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대상들을 향한 삶의 구체일 뿐이다. 이것은 구체이기 때문에 삶의 리듬에 연결된 노래는 더욱 곡진하다. 그는 그 삶의 모든 구체 앞에서, 슬픔일 때 곡비(哭婢)가 되고 기쁨일 때 연인이 될 줄 아는 시인이다. 한 몸으로 여러 몸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 한 몸의 형태가 여러 몸의 율조로 거듭나는 곳에 그의 시가 있다고 이제는 말해야만 할 것이다.

 

박수연, '사랑의 형(形)과 율(律)' 중에서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드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김선우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드신 이 누구신가>

2004년 현대문학상 수상.

 

*출처/신남영(현금당)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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