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송수권 시 모음

길가다/언젠가는 2006. 8. 11. 14:36

1940년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 1297번지에서 태어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동학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들의 땅>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10시집 <파천무>

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 등이 있으며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

<들꽃 세상(토속꽃)> <여승> 육필 시선집 <초록의 감옥>

3인 시선집 <별 아래 잠든 시인> 민담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시를 읽는 아침>

<사랑의 몸시학>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 <태산풍류와 섬진강> <남도기행> 음식문화 기행집 <남도의 맛과 멋>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 산문집 <아내의 맨발>

<송수권 시 깊이 읽기> <한국 대표시인 101인 시선집> 등이 있다.

문공부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5년 8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퇴임했다.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하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겨울 이사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나르며 변두리 전셋방으로 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오늘은 그들의 뒤통수를 유난히 쓰다듬고 싶은 하루였다.
돌아보매 사십 평생 고통과 비굴 속에 흔적 없고
좋은 시절 다 넘기고 우리는 뒤늦게 이 도시에 쳐들어와
말뚝 하나 박을 곳이 없다.
차 한 잔 값에도 찔리고 수화기를 들어도
멀리서 친구가 오지 않나 몸을 사린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때로는 의문을 제기해도
삶의 공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걷히는 무슨 유사다, 회비다,
서투른 몸짓에 뒤늦게 코 깨지는 걸 알고 발을 뺐더니
또 누구는 자폐증 환자라 꾸짖는다.
애경사를 당해봐라. 또 누구는 겁을 준다.
며칠 전은 불우 문우 돕기 만 원을 빼내려고
아내와 치고받다 나도 이 말을 멋지게 써 먹었다.
그것도 정작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홀짝
커피값으로 축이 났다.
정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내 오늘 친구 말대로 이 바닥 일만 평 적막을 흩뿌릴까보다.
정말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회색빛 하늘 속에 이삿짐을 따라가며
기죽기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아내여, 결코 거러지 같은 바닥 이 세기의 문 앞에서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
우리 모두 죽어서는 평등하리라

   

  시골길 또는 술통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여승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빈집

 

오래도록 잠긴 저 문에
누군가 빗장을 푼다
삭아내린 싸리 울바자 다시 세우고
눈보라가 설쳐대는 툇마루와
댓돌을 쓸고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도 가지런하다
어제는 서울서 일만이네 식구가 내려와
밤새도록 저 창호 문발에 불빛 따뜻하다

 

그 불빛 새어 나와
온 마을이 다 환하다
낯선 듯 동네 개가 컹컹 짖고
올바자를 넘는 애기 울음소리
동쪽 하늘에 뜬 샛별이 다 파르르 떤다
마당가 바지랑대에 널린 애기똥물빛
이제야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굴뚝의 연기가 치솟아
한밭재 대숲머리를 돌아나가는
저 들판의 자욱한 연기 보아라
오래 잊힌 자진모리 설움 한 가락이
그렇게 풀리는구나

 

IMF가 대순가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벼르고 벼르던 30년 세월
조금 일찍 돌아온 것뿐이다
조금 앞당겨 돌아온 것뿐이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