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이사_박영근

길가다/언젠가는 2006. 5. 19. 12:46
이  사  

      박 영 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 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 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 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 넘치는 광고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 2006년 2월 계간 리토피아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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