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몸시학, 그 꿈과 모순의 미학 (2)
-신에로티즘의 문법 창안을 위하여
송수권
5.
어느 시인인가 말했다. 여자의 육체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다라고, 더구나 그것은 꽃이거나 성배(聖杯)는 더더욱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라는 결론인가. 이 결론에 대해서 여자의 육체에는 고압의 주문이 걸려 있어서 가까이 가면 당신의 열매는 타버리는 분화구와 같다고 말한다. 영원한 주문은 그 분화구와 열매의 양쪽에 걸린 것이어서 어떤 방법으로든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 맺힘과 뚫림의 왕복 운동이 곧 에로스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서로의 가마솥에 제멋대로 수제비를 떼 넣어 수제비죽을 쑬 수밖에 없다고. 이는 곧 세속적이고도 쇼비니즘(속물주의)에 의한 성 해체 담론을 말하고 있다. 성에는 금기나 주술성이 왜 목걸이처럼 붙어 다니는가를 알게 된다면 이런 세속화 또한 금기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그 첫날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김수영, 「성」 전문
지금까지 정직성, 자유, 사랑 그리고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 ‘자유에는 왜 피냄새가 나는가’라고 외쳤던, 혁명의 시인 김수영의 정직성을 묻는 시다. 이외에도 해체 성 담론으로서 「죄와 벌」이라는 시도 있지만 이것이 성 해체에 대한 ‘자유’ 담론이라면 그 정직성을 다시 묻게 하는 시다.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절규에서 보듯 비속어는 어차피 그의 시어의 전매 특허 용어로 치부하더라도 ‘아내’를 ‘그것’으로 환치하고 성을 떡 주무르듯 자유란 이름으로 세속화시킨 점은 그의 도덕성마저 심히 의심케 한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당대 최고 지성인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모더니즘의 선구자 1930년대 이상(李箱)이 시도했던 신심리주의 해체 담론과 1960년대의 김수영이 지향했던 리얼리즘 문법 창안에서 볼 때도 차이가 현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시의 궁극적 목적을 고오귀속(高悟歸俗)에 둔다면 세속화의 속(俗)으로 돌아오는 정신치고는 타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위에 그 긴 두 다리를 벌리고 우뚝 서서 외로운 주문을 외고 있던 천재 시인 김수영’(신동엽의 조사)의 맹점은 여기에서도 걸린다. 또는 ‘당대의 삶과 정신에 대한 위대한 파수병’이란 찬사가 무색할 만큼 시적 완결성이나 미학적 함량도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시의 미학적 측면이나 정체성의 반성 없이 사회적 발언이 시적 성취에 도달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 현대 시사에서 가장 우뚝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시적 종자를 번식시켰기에 그랬을 터이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설문 조사에서도 작년도에 1위 시인이더니 금년도 설문 조사에선 또 그 위치가 뒤바뀌어 중심에서 비껴난 것을 보았다. 치사한 이런 설문은 설문으로서 정당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오세영이 쓴 어느 지면에선가 한 10위쯤이나 될까라고 피식 비웃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속으로 웃었지만 한국 현대시사는 바야흐로 불온한 이론 번식으로 이전투구의 현장임도 절감하게 된다.
또 내년쯤 아니 10년, 20년 후에는 누가 어떻게 중심에서 밀려날 것인가도 자못 의문스럽다.
6.
불알이 멈춰 있어도 시간이 가는 괘종시계처럼
하체에 봄이 오지 않고 지난한 세월로 출근하는 얼굴
장미꽃이 그 사내를 비웃었다
너는 만개하지 못할거야
그후, 시든 장미꽃이 다시 그 사내를 비웃었다
그래도 나는 만개했었어
- 함민복, 「구혼」 전문
프로이트의 성 본능과는 달리 융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남자에게는 아니마(anima)가 여자에게는 아니무스(animus)가 내면에 있어서 다른 상대에게 투영될 때 이성으로서의 성을 갈구한다고 본다. 아니마는 남성 속에 들어 있는 이상적인 여성성이고, 아니무스는 여성 속에 들어 있는 이상적인 남성성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늙어가면서 남성이 여성화되고, 여성이 남성화함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적인 연인상(像), 곧 이성을 만나 배우자로 삼는 것은 모르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라는 내면적 인격 요소를 사랑하게 된다.
위의 시에서 보면 짧은 문맥 속에 심리적 마이너스 장치가 극대화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행동심리학의 방어기제에 의한 투사와 반동 형성이 장미꽃에 투영되어 있다.
사내는 고개 숙인 남자 즉 발기부전증 환자이고 이 시대를 사는 샐러리맨으로서의 낭패감이 리비도적 상상력을 타고 발산되어 있다. 적어도 성이 현대에 와서 성배 의식(聖杯儀式)은 아니라도 해체 문법에서 까발리는 타락한 도살장의 도끼가 아니란 점은 확실해진다. 현대라는 삶의 한복판을 횡단하는 한 사내의 고통에 찬 익명성의 외침이 그 마이너스 장치(로트만)에 의해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사내는 출근을 하다 장미꽃이 피었음을 보고 감탄한다.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는 순간 장미꽃은 야유를 퍼붓는다. ‘너는 만개하지 못할거야’라고. 또 며칠 후 시든 장미꽃을 보고 사내는 ‘장미꽃이 지는군!’ 하고 슬퍼하자 ‘그래도 나는 만개했었어’라고 비웃는다. 너는 아름답다고 말할 자격도 없는 녀석인데 감히 나에게 구혼을 하다니 . 그래서 시의 제목도 ‘구혼’이다.
아니무스와 아니마가 합일될 수 없는 비극성은 분명히 현대의 문제성을 제기하는 극히 현대적 수법에 의해 쓰인 시다.
다음은 이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합일된 경지를 노래한 시 한 편을 들어보자. 왜냐면 성은 그 자체로서 ‘구원의 정처’를 지향해 가는 에로스 정신의 유토피아가 되기 때문이다.
질투가 심한 신이 있어
인간의 완전성을 두려워 한 나머지
태초에 한몸이었던 인간을 갈라놓았다
나누어진 여성과 남성은
불완전함을 해소하기 위해 늘 섹스를 한다
섹스 중에는 일체감과 충일감으로 온몸을 떨다가도
욕구가 해소된 후에는
또다시 허전함과 외로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성은 몸과 마음이 합해진 단어다
‘生’은 낳아진 신체로 물질을 의미하고
‘心’은 정신적인 영혼을 가리킨다
더욱이 ‘心’자가 ‘生’ 자보다 앞에 있는 것은
정신이 물질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각설하고, 위의 시에 노골적으로 차용된 섹스(sex)의 어원은 라틴어 ‘sexus’이며, 동사로는 세코(seco)로 ‘나누다, 떼어놓다’가 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성(sexuality)에 대한 담론인 셈이다.
7.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 오탁번, 「굴비」 전문
이 작품은 민간 화법(民間話法)을 리비도(libido)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의 보기가 되는 시다.
『고금소총』이나 민담에 널려 있는 흔한 소재지만 시인의 시안(詩眼)에 의해 재해석의 가치 평가가 새롭게 전이되어 있다.
‘앞으로는 하지 마’ 하니까 ‘뒤로 했다’는 화소(話素) 속에는 해학과 골계를 넘어선 섹스의 건강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 인식소(認識素)가 곧 시인의 정체성(identity)이다. 이 정체성은 적어도 감칠맛 나는 입말을 통해서 천 년 내려온 숨소리를 다독이며 원형적인 삶을 통해 민중이 어떻게 한을 극복해 왔는가의 그 역동적 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고대광실 처마 밑에서 말뚝이 탈춤이 나왔듯이 말이다. 민간 화법이란 주로 이 민중적 한을 담아내는 이야기들이다.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지만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는 결구가 결코 과장되게 들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8.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세계는 한없이 길고 어두웠으나
잠깐씩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웃을 때는 입이 찢어지고
울 때는 눈이 퉁퉁 붓던 한 사내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표정의 억양이 문드러지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졌다.
과연 일부러,
도대체 일부러 한 여인이 한 사내의 세계를 무너뜨렸겠는가
자기도 어쩔 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그런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으리
한 사내는 한 여인을 용서하였으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죽음을 직시하게 되는가.
이제 한 사내는 한 여인의 창가에 있다
닫힌 세계는 그 스스로 열어 보이기 전까지는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한 사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웅얼웅얼거리며 혼자서
한 여인과의 모든 대화를 끝냈다
깜짝 놀라 공기총 방아쇠를 당겼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위 시는 1990년도 6월 호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된 김중식의 작품이다. 천박한 에로스를 주제로 한 작품이라면 절대로 선자들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그것도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에서 스쳤던 얼굴이 한 사내의 전 세계가 되었다는 진술은 첫만남의 한 순간이 사랑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는 그 결정적 순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극적인 서사 구조에 의하여 그 사랑의 운명은 자살로 끝난다. 첫인상이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흡인력이 곧 사랑의 종말론으로까지 승화되어 비극성을 표출하고 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은연중 패러디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다음은 위의 작품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와 같은 범주 안에 드는 최정례의 작품 「천사」를 감상해 보자.
간절히 총을 사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어찌하여 그 생각을 잊었는지 모른다
총을 사러 부산엘 가겠다고
돈을 꾸고 배를 사서 사막으로 뜨겠다고
한때 천사였던
한때 덤불찔레였고 한때 폭약이었던
그가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지금 내 마음속에 없고
돌 속에도 폭풍 속에도
물 웅덩이 속에도 없다
그는 그가 사라진 줄을 모른다
바보처럼 한때 천사였던 것도 모른다
너무나 깊숙이 사라졌기에
버려진 폐광의 내 속을 캐고 캐도
그는 이제 없다
나 혼자 라이터를 들이대는 웅덩이
떨면서 비추고 다시 일그러뜨린다
그를 비춰볼 웅덩이
그를 파낼 유일한 광부인
나조차 사라지면
그는 아예 없었던 게 된다
그가 잠시 찬란한 천사였던 걸
증거할 자도
세상 천지도
이처럼 사랑의 흡인력(엑스터시)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 흡인력으로 말한다면 우포늪이나 무제치늪 또는 화엄늪의 특이종으로 알려진 끈끈이주걱이나 통발 같은 식충식물에나 비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꿀 냄새를 맡고 벌이 날아들면 끈끈이주걱으로 오므리고, 통발 꽃자루에 들어서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입구는 있어도 출구가 없는 절망 상태와 같다.
총을 살 만큼 또는 폭약 심지를 물 만큼 또는 길을 가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라이터를 켜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볼 만큼, 그가 찾는 ‘천사’의 실체는 격렬한 불꽃 그것이다. 이런 경험은 인생의 태반을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열병인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시 한두 편쯤은 고백으로 남기고 있기도 하다.
이 사랑의 실체, 즉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가 「지에코시초」(智惠子詩抄)에서 쓴 다음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장대한 민족의식이라 할지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는 결코 미(美)를 태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은 창조의 어떤 모티브나 주제가 되는 경우는 있겠지만, 창조욕의 내부에 살아 있는 피를 가지게 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운명과도 같은 사랑의 기동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한 여자의 끝없는 순수한 사랑일 수도 있다.
고타로는 정신병으로 지에코가 죽은 지 2년 만에야 정신을 수습하고 ‘이 세상에서 그녀를 만났음으로 나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던 퇴폐의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내 모든 정신의 내부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죽음은 내게 더없이 가혹한 운명의 형벌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한 인간의 순수성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에 대해 예술의 주제를 말한다.
사실 고타로의 말대로 아무리 장대한 민족의식이라도 그것 하나로는 결코 미(美)를 탄생시킬 수 없다는 것은 시에서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페미니즘 문학을 외치며 성(性)을 무슨 떡 주무르듯 하는 대책 없는 세대들의 시인들에겐 좋은 전범(典範)이 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가벼운 세대의 글쓰기에서도 에로스는 분명 외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쓸쓸한 구쥬구리(구십구리) 모래밭에 앉아서
아내는 논다
수많은 물새들이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지이, 찌, 찌이, 찌, 찌이―
모래에 조그만 발자국을 찍으며
물새들이 아내에게 다가온다
입속말로 늘 뭐라 중얼대는 아내가
두 손을 높이 들고 되부른다
지이, 찌, 지이-
두 손에 든 조갑지를 물새들이 조른다
아내는 조개들을 자르륵 흘린다
떼지어 비상하는 물새를 아내가 부른다
지이, 찌, 찌이, 찌, 찌이-
세상일 다 어디다 두고
이미 천연의 저편에 선 아내의
뒷모습이 외롭디 외롭다
두어 마장 떨어진 솔밭 속으로
해는 지고
송홧가루 맞으며
나는 하염없이 서 있다.
- 다카무라 고타로, 「물새와 노는 지에코」 전문
위 시를 보면, 그녀(지에코)는 오랫동안의 정신분열증으로 언제나 순수한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 있다. 하루 종일 이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는 고타로.
그렇다. 이 세계에선 이런 사랑의 시 한 편을 남겨둘 일이다. 특히 시인이라면 여름 해변에서는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연인들끼리 고백성사가 시작되고, 난데없는 태풍이 오면 낡은 폐선 밑에 엎드려 가장 순수 무구한 글자를 새겨봐야, 영혼의 순수함이 어떤 것인가를 알 것이다. 그리고 고타로가 말한 것처럼 A차원은 절대 현실, 걸을 때 인간은 약간 친해진다. 그 두 줄의 모래 발자국 위에 작렬하는 여름 태양, 그때 우리의 순수 불꽃도 어떻게 작렬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안식은 아내의 것
무더운 여름날
아내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시원한 부채질 바람으로
낮잠을 자본 자는 알리라
여자는 향그러운 꽃 그늘이라는 것을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그늘의 안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형체가 느려
꽃보다 그늘이 넉넉한 꽃
神은
이 지상의 가난(艱難)을 위해서 미리
배롱꽃을 예비해두셨다.
- 오세영, 「배롱꽃」 전문
위의 시는 2002년 겨울 호 『시안』에 발표된 작품이다. 물새와 노는 지에코처럼 배롱꽃 그늘에서 놀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눈부시게 환하기만 하다.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무더운 여름날 그 꽃 그늘은 분명 아내의 것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에로스의 가치 정신 속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라는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아내의 소중함은 아름다움 속에 있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기준만으로는 확산되지 않는다. 아내의 등가물로 제시된 배롱꽃, 그 그늘의 넉넉함이 더 크게 확산되어 배롱꽃은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광무제(후한)가 어느 날 재상인 송홍(宋弘)에게 자기 누님의 신랑이 되면 어떻겠는가라고 물었다. 송홍은 일언지하에 가난하고 어려움을 같이한 벗을 잊을 수 없고, 술지게미와 쌀겨를 먹고 같이 동거동락한 아내를 버리는 것은 도에 어긋난다고 했다(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그러므로 8등신을 각으로 뜨는 서양의 탐미적인 에로스 정신이 아니라 천명(天命)을 내세운 동양의 명분과 의리 정신이다, ‘이 지상 가난을 위해서 미리 배롱꽃을 예비해두셨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고타로가 지에코를 두고 쓴 시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정신분열증을 앓는 지에코가 고타로의 넉넉한 품 안에서 물새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처럼 아내의 부채 바람 속에 시적 화자가 잠들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9.
정사 후
죽음까지도
한 사발 꿀물 같은
버마재비
버마재비
그녀 찾아
만 리.
- 강만, 「극애」 (極愛) 전문
「극애」(極愛)는 알다시피 미얀마재비의 성 본능을 극화한 짧은 시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눈부신 예감』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정사 후 암컷에게 수컷이 먹히는 극애야말로 사랑의 극치다. 그런 사랑을 찾아 ‘만 리’까지도 불사하겠다는 낭만과 아이러니가 섞인 에로스의 세계를 탐닉하고 있다. 또한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는 곧 에로스의 엄숙성이겠는데, 그 이면에는 엄숙성이 빠져버린 현대의 성(性)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에로스는 풀사마귀만도 못하다는 야유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의 성, 해체 담론을 역으로 뒤집는 꼴이며, 1990년대의 페미니즘 시론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그녀는 안다 짜고 누른 그의 와이셔츠가
찌그러진 세계에서 그를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사으랑사으랑 인생은 즐거워라 그녀는
저녁을 준비한다 그가 누르는지 초인종이
오르가즘에 다다를 듯 울어댄다
저녁을 먹고 피곤하다는 그에게
자기이… 하며 달려든다 때로 여자는
요부가 되라 했던가
체위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그녀는 그의 성기를 빨고 만져서 팽팽히
할 수가 있다 사으랑사으랑 인생은
즐거워라 성욕이 강한 자가
세상을 잡는다 했지
자기 그것은 막 산 치약 같애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조이고 짜고 누른다
- 이대흠, 「인생은 즐거워」 부분
이 작품은 1998년 월간 『현대시』 8월 호에서 발췌한 시다. 현대시의 원리에는 ‘뒤집기’라는 방식이 있다. 이는 정서적 충격요법이 아닌 일종의 인지적 충격요법이다. 이러한 비속화된 에로티즘에 대한 풍자는 자동화된 삶, 기계적인 삶에서 삶의 존재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패러독스다. 그러므로 1980년대 해체시론에서 터져 나온(김수영의 담론) 쌍소리 또한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여성주의)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대흠은 광주에서 칩거하며 독특한 스타일로 시를 쓰는 신인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읽는 문명의 폐허성을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1990년대의 시의 신에로티즘의 문법 창안을 이제 이들에게서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가 하면 아예 세상 만물을 성도착증으로 해석하는 시인의 작품도 있다. 1980년대식의 외설이 아니라 1990년대식의 건전한 문화 비평으로서의 수용이 그것이다.
자칫 외설 시비가 붙을 만한 이대흠의 시 「인생은 즐거워」를 읽고 있으면, 우리 고전인 「변강쇠타령」 속의 ‘기물타령’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저 여인 반소하여 갚음을 하느라고 강쇠기물 가리키며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전배사령 서려는지 쌍걸랑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군뢰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가에 물방안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콧물은 무슨 일꼬, 성정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 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쓸 숭어인지 꼬챙이 굶이 굽어져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댄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랑 등물세간 걱정없네.”
오다가다 청석관에서 만난 강쇠와 옹녀가 눈길 한 번에 끼가 발동해서 즉각 산속 바위에서 일을 벌이면서도 서로가 성기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유랑민의 설움이 그 성기 속에 노출되어 있다. 춘향과 이도령의 순애보적 사랑이 아니라 정착 생활에 대한 바람이 잠재해 있다. 강쇠의 성기를 보고 세간을 연상하는 옹녀의 모습은 희극이기 전에 처절함이 앞선다. 이대흠의 「인생은 즐거워」의 외설적인 요소와는 어떻게 구별되는지 독자가 판단할 나름이다.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타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타서
한 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
가쁜 숨을
가쁘게
내쉴 것들을 고르다 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워 있는 침대, 누워 있는 천정, 누워 있는 하늘
저기 한 여자도
한사코 누워만 있는
바위를 올라타느라
가쁜 숨을
크게 내뿜고 있다.
여자가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쌍해 보인다
세상에!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 번 올라타 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 김영남,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올라타고 싶다」 전문
김영남 시집 『정동진 역』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프로이트가 ‘리비도’ 하나로 문화 현상 전반을 해석했던 것처럼 이 시인도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리비도가 발동해서 ‘올라타고 싶은’ 성 욕구가 발동한다. 심지어는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의 그 추상성까지도 성 욕구로 익명성을 띄고 돌출한다. 그러므로 이 시인에게 있어서는 이드(본능)-에고(자아)-슈퍼에고(초자아)의 삼각 갈등 안에서 모든 사물들이 리비도 하나로 주물럭 반죽이 되는 셈이다.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라는 그 아이러니가 성도착증후군의 그 도착성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이 시가 우리에게 인지적 충격을 안겨다 준 것은 알고 보면 한 여자가 등산을 하면서 바위를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시적 의장을 이중으로 구조화시킨 점에서 더욱 박진감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쌍해 보인다/ 세상에!’와 같이 인터코스의 과정에 끼어든 내레이션 형식의 독백은 시적 상승 구조에 효과적으로 기여함도 알 수 있다. 마치 주름진 콜라 병을 보면 여인의 허리가 생각나고, 그 주름을 잡으면 그 감촉에 의해 병마개를 따고 싶은 충동이 일고, 그 충동에 의해 한 모금 꿀꺽하면 알싸하게 혀와 목을 감고 도는 그 건강한 맛의 감촉에서 페로몬(pheromone: 암꽃이 벌·나비를 부르기 위해 내뿜는 분비액) 냄새까지 맡게 되는데, 이 시는 그 이상의 인터코스를 거치면서 시각적 또는 촉각적 미각을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10.
다음은 이하석의 「강변 유원지 1」의 후반부다.
대여섯 명의 남녀의 웃음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 밑으로 구두와 하이힐은
부딪치고 여자들의 스타킹은 구겨진다.
소주와 사이다와 콜라 사이를 지글대며
솟아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연기 속으로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보인다. 낙서로 얼룩진
입술은 찢어져, 그 구멍 속으로 먼지 낀 유리창 밖
두 남녀가 모래의 아지랭이 속에서 흔들리며
맨발로 만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의 더러운 깊이 속,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혼곤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시집 『김씨의 옆 얼굴』에서 발췌한 작품인데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찢어진 그 구멍 속으로 ‘두 남녀가 모래밭에서 맨발로 만나는 장면’이 시각화되어 있어 이중의 음화가 중첩되는 데 특이한 구성을 띤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에선 혼곤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는 철저하게 음화로 어지럽혀진 강물의 풍경인데 ‘환경과 오염된 성’ 즉 에코토피아 담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제는 유전자를 길바닥에 흘리고 다니듯이 신성한 육체의 성은 한낱 쓸모없는 낙서만도 못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더구나 20세기를 성으로 눈뜨게 했던 마릴린 몬로가 간 자리, 강물은 더러운 정액처럼 엎질러져 있다. 아니, 강물은 차라리 혼곤한 신음소리를 퍼지르며 싸구려 여인숙으로 들어간 그들의 허리띠처럼 풀어져 있다.
사랑이란 말은 시학(詩學)에서 로빈 스켈턴(Robin Skelton)의 이미지 분류에 따르면 추상 이미지(abstract image)에 해당된다. 영문으로 표기될 때에는 두문 대문자인 ‘Love’로 표기된다. 이는 부처란 말 대신 ‘자비’로, 노장이란 말 대신에 ‘도’(道)라는 추상명사와 같다.
이 추상명사라는 관념이 하나의 이미지로 탄생하기까지에는 단순한 감정(emotion)에서 느낌(feeling) 즉 이미지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관찰력과 직관력의 차이만큼 크다. 관찰력은 실험, 검증, 데이터, 결과를 거쳐 적용 단계에 이르지만 직관력은 한눈에 파악되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영혼이 불꽃처럼 스쳐 만들어낸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하석이 표현한 ‘마릴린 몬로’의 빨갛게 젖은 입술 속으로 들어온 두 남녀의 풍경은 이중구조의 음화를 형성한다. 또는 마릴린 몬로의 육체미, 가령 엉덩이를 흔들고 가는 모습이나 입술을 내밀고 백옥같이 흰 이를 드러낸 모습이나 금발의 모습에 매혹되지 않은 남성은 없을 듯하다. 혹시 보들레르 정도라면 ‘흡혈귀가 된 미인’처럼 단번에 사자가 얼룩말의 목을 물어 숨통을 끊어놓듯이 ‘미인이란 가죽푸대고, 남는 것은 해골이더라’라고 쓰디쓴 웃음을 자아낼지도 모르지만 보통 남자라면 그럴 만한 배짱이 없을 것이다. 그 늘씬한 허리선이며 나불거진 유방이며, 어깨선 밑으로 파묻힌 목의 형태도 나이아가라 폭포에 나온 그 모습대로 애교를 떤다면 그가 살다 간 한 세기는 분명 시끄러울 듯하고, 지금 그 사진만 봐도 애간장이 탄다. 더구나 스커트 자락이 무릎 위에서 춤을 추는 동안은 적어도 그럴 것이다. 그런 누드화 속으로 모래밭을 걷는 두 남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진로소주병을 들다 말고 탁자에 놓인 그 시금털털한 검은 액체 덩어리의 콜라 병을 잡는다. 잡히는 순간도 모르게 감촉이 여간 아니다.
가운데가 움푹 파인 유려한 곡선, 그것도 세로로 주름진 곡선의 감촉은 꼭 마릴린 몬로의 허리를 쥔 것 같다. 어떻게 병뚜껑을 따지 않을 수가 있으랴! 병뚜껑을 따고 보니 푸시식 뜨거운 김이 넘치고, 이상한 분비물의 페로몬 냄새가 코를 비틀어 버린다. 아카시아꽃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의 어두운 향이다. 다음은 마셔보나마나 마찬가지다. 리비도가 발동하는 이 원초적인 감각 이미지에 안 떨어지면 거짓말이다. 전 세계 190여 개국에서 하루에만 대략 5억 6,000만 병씩 팔려나간다. 몬로와 콜라 병, 처음은 허블스커트를 닮았대서 허블스커트 병으로 불렸다. ‘컴컴한 곳에서 만져만 봐도 구별할 수 있는 병’ 이것이 코카콜라의 처음 상표 문구다. 다음 선전 문구는 ‘코카콜라는 무엇으로 만드나’였다. 이것은 ‘여성 중 신이 만든 최고 걸작품은 몬로다’라는 대답과 일치한다. 물론 콜라 병은 몬로보다 훨씬 먼저 탄생했다. 그러니까 이 백치미의 여인은 그 이미지를 콜라 병에서 패러디한 걸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탁월한 이미지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아낸 패키지였다고 볼 수 있다. 몬로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콜라를 마시고 .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선에서도 기꺼이 죽을 수 있었던 미국 병사들 . 여기에서 생겨난 말이 코카콜로니즘(코카콜라 식민주의)이었다. 이 마법의 병과 몬로의 육체미는 항상 미국적 가치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이 주된 재료는 남미에서 나는 코카(coca) 잎과 아프리카에서 나는 콜라(kola) 씨앗, 당시 루트 유리공장의 검사관이었던 클라이드 에드워드는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1913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코카와 콜라 항목을 찾았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콜라의 첫머리 철자를 상표 그대로 K가 아닌 C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콜라 항목을 찾지 못했다. 때문에 코카 항목 다음에 나오는 코코아 열매 그림을 콜라 열매로 착각하고 딘에게 넘겨 새 제품 디자인에 참조토록 했다. 그래서 루트 유리회사 디자인 팀의 딘과 새뮤얼슨이 꼬박 밤을 새워 만든 첫 디자인은 코카콜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배가 불룩한 곡선형의 외형에 세로로 줄무늬 홈이 파인 코코아 열매를 빼다 닮은 모양이 되었다. 이후 손으로 잡기 쉽도록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가면서 여성의 신체 곡선과 같은 형태를 탄생시켰다. 이 또한 멋있는 패러디의 이미지다.
또한 이 패러디가 더욱 심오한 것은 기마 장교 출신의 약사 존 S. 펨버턴이 우연히 코카콜라를 발명한 것은 1886년, 처음에 코카나무 잎과 코카콜라 씨에서 뽑아낸 추출물을 혼합, 위장약으로 개발한 ‘프렌치 와인 코카’는 우연히 소다수와 섞이면서 툭 쏘는 맛의 코카콜라가 되었다. 펨버턴의 경리 사원이었던 프랭크 로빈슨은 kola의 첫머리 철자를 c로 바꿔 두 개의 c자를 절묘하게 매치한 독특한 스펜스체로 상표를 세상에 내걸었다. 이 또한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건너뛴 패러디다. 코카(coca) 잎과 콜라(kola) 씨, 그래서였을까? 1992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리우 회의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은 ‘생물다양성보존협약’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사람을 뇌살시킨 이 생약품(生藥品)이란 것 대부분이(90%) 미국 본토산이 아닌 열대우림의 숲속에서 뽑아낸 추출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최근에 성기까지를 뇌살시킨 그 ‘비아그라’란 생약도 다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면, 그 또한 ‘팍스 아메리카’의 전형적인 이미지라 할 만하다.
이하석이 쓴 「강변유원지·1」에서 보인 겹치기 이미지를 탁자에 보이는 ‘콜라 병과 몬로의 찢어진 입술’의 또 다른 이미지― 이 시대의 자본론으로 끌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예증을 들어본 것이다. 이는 곧 루 살로메가 쓴 ‘에로틱’의 주제는 ‘3중 이미지의 겹치기’, 즉 연인, 마돈나, 모성의 복합 이미지가 바로 ‘여성’이란 점에서 제1의 이미지는 아마도 불꽃튀는 육체성의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을 법도 하다. ‘콜라 병과 몬로의 패러디’에 의한 겹치기 이미지는 곧 추상적인 Love에서 ‘L’에 해당하는 이미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가느다란 허리를 둘러싼 띠
이제 기꺼이 내 머리에 매어 볼까
어느 왕인들 안 내놓으리 그의 왕관
이 허리띠처럼 그대 허리 안을 수만 있다면
이 띠는 내 하늘의 전부
저 사랑스러운 사슴을 품에 가두는 울타리
내 기쁨 내 슬픔 내 희망 내 사랑이
모두 이 울타리 안에서 움직이네
허리띠는 하나의 작은 세계, 그러나 그 속엔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 모두 다 들어 있네
내게는 이 띠가 두른 것만 두고
하늘 아래 나머지 것은 모두 가져가도 좋아.
- E. 윌리
이 시에선 추상적인 「추상」이란 개념을 ‘허리띠’로 이미지를 드러낸 데서 그 구체성을 띤다. 더구나 이 띠는 내 하늘의 전부고, 그 ‘사슴’을 품에 가두는 울타리며, 하나의 작은 세계로 실체성을 띤다. 그 허리띠를 머리에 두를 수만 있다면 어느 왕인들 왕관을 내려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사랑의 보편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허리띠는 사랑의 보편성을 정서의 구조화로 보여주는 상관물인 셈이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보다 허리띠로 매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전이(存在轉移)의 모습은 천둥과 벼락이 친 다음 대지가 뒤틀리고 꿈직한 의식을 치러낸 다음에 생긴다. 그것은 영혼의 호흡이며 불꽃이다. 이 불꽃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 것인가.
다음 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너의 눈은 한없이 깊은 심연, 몸을 굽히며 나는 보았다
모든 태양이 그 속에 와 비추이고
모든 절망한 사람들이 죽기 위해 그곳에 몸을 던지는 것을
너의 눈은 너무나 깊어 나는 거기서 기억을 상실한다
네 눈은 새들의 그림자에 거칠어진 바다
별안간 날씨가 개면 네 눈도 변한다
여름은 천사들의 앞치마를 잘라 구름을 만들고
밀밭 위에 보이는 하늘만큼 푸른 것은 없다
바람이 창공의 슬픔들을 날려 버려도 소용이 없다
눈물로 빛날 때 네 눈은 창공보다 더 맑아
비 그친 뒤의 하늘도 네 눈을 시샘한다
깨진 유리의 틈살보다 더 푸른 빛은 없다
(중략)
네 눈은 벌레들이 격렬한 사랑을 벌이는
이 라벤더꽃 속에 번갯불을 감추고 있는가
나는 수많은 유성의 그물에 걸려 있다
8월 한중턱 바다에서 죽어가는 수부(水夫)마냥
나는 우라늄 광석에서 라듐을 끓여냈다
나는 이 금지된 불에 손가락을 태웠다
아 백번도 찾았다 되잃은 천국이여
네 눈은 나의 페루, 나의 골콩드, 나의 인도제국
어느 날 저녁 세계는 해적들을 불태워 버린
암초에 걸려 깨지는 일이 생겼다
나는 바다 위로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엘자의 눈, 엘자의 눈, 엘자의 눈.
- L. 아라공, 「엘자의 눈」 전문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는 말처럼 ‘엘자의 눈’은 천체 만물을 비춰내는 거울과 같다. 흔히 ‘영롱한 눈동자, 샛별과 같은 눈동자’라는 비유도 있지만, 엘자의 눈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의 눈은 이와 같은 것이다. 새들의 그림자에 거칠어진 바다, 밀밭 위에 떠 있는 푸른 하늘, 깨진 유리의 틈살보다 더 푸른 빛, 그 눈동자는 라벤더꽃 속에 번갯불을 감추고 있는 뜨거운 흡인력의 눈빛이다. 그 눈빛 속에서 백번도 되잃었다 찾은 천국이며, 그것은 또한 페루나 골콩드, 인도제국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큰 눈동자다. 이처럼 신선한 비유가 살아 있어 ‘엘자의 눈’을 세 번이나 반복해도 결코 과장이 아님을 느낀다. 눈은 영혼이 숨쉬는 창이라 했던가?
2003년 문학과경계 여름호에 계속
출처 : 진영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진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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