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몸시학, 그 꿈과 모순의 미학
(계간 문학과경계 겨울호부터 송수권 시인의 시론(詩論)을 연재한다. 네루다, 백석, 서정주, 김수영에서 최근의 김혜순, 신현림, 최영미 시인 등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시인들은 왜 사랑을 노래하고 연애를 노래하고 에로티즘을 꿈꾸는가. 한 마리 자벌레의 꿈틀거림으로부터도 사랑을 발견하고 애욕을 발견하고 생명을 발견해낼 수밖에 없는 시인들의 고된 숙명을 이 시대 최고의 토속정서의 시인 송수권 시인이 특유의 끈적끈적하고 유려한 필체로 독자 여러분들을 재미있게 찾아간다. )
<편집자 주>
사랑의 몸시학, 그 꿈과 모순의 미학
- 신에로티즘의 문법 창안을 위하여
송수권
1.
ꡐ사랑ꡑ은 문학의 양식 중 가장 보편적인 주제다. 그것은 국경도, 민족도, 인종도, 이념도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있고 문학이 있는 이상 이 주제 하나는 시대도 역사도 초월해서 존재한다. 모든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끊임없이 생성․소멸하고 변화과정을 거쳐도 이 주제 하나만큼은 고금을 통하여 금강석처럼 닳아지지도 않고 빛을 뿜는다.
C.D. 루이스는 예술의 발생론에서 혈거시대(穴居時代) 원시인들은 사냥을 나가 맹수의 이빨에 씹혀도, 또는 병들거나 상처난 몸을 이끌고 동굴 속에 누웠어도 벽면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시(詩)는 그 원형적 감정형태에서 나온 낙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그의 시론서인 『시학』에서 보는 바 곧 유희본능설과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다. 괴테가 말한 대로, 하늘엔 별, 지상엔 사랑이 우뚝할 뿐이다. 탈색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불가해성이 곧 사랑이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나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여전히 한 시대에 투입되는 인간에 의해 시대적 특성을 달리할지언정 그 보편적 주제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엔 방부제가 필요 없고, 그 존재전이는 시대를 초월해 있다.
또한 사랑은 내용과 형식 그리고 질서를 중요시한 세계의 덕목 속에서도 감성과 자유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낭만성의 덕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객관적이 아니라 개성적이며, 이성적이 아니라 감상적이며, 원칙적이 아니라 항상 변칙적이다. 게다가 도덕성이나 법질서를 뛰어넘어 자연 발생적이며 동시에 본능적이자 공격적이다. 박인환의 시에서처럼 인생은 통속잡지의 표지모델처럼 세월은 흘러가도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극약을 불사하는 죽음 저편에까지 끈끈한 마력을 지닌 까닭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명편을 낳기도 하며, 통속소설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한참 파문이 일었던 영화 『거짓말』과 같은 유치 찬란한 이야기를 낳기도 한다.
마담 보봐르가 탄생한 루앙사는 지금도 도시 전체가 불륜과 속죄의 뒤틀린 감정이 이중성으로 노출되고 있는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성당으로 꽉 채워진 도시가 하루 내내 차임벨에 의한 미사와 기도로 들끓는다. 그런가 하면 마녀 사냥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된 잔다르크의 처형을 증언하는 단두대가 있고 피의 외침이 들린다. 우리나라로 치면 남원골의 춘향이와 벽송사가 있는 추성골의 변강쇠와 옹녀가 있는 그런 분위기와 비슷하다. 한마디로 신성(神性)과 마성(魔性)의 두 얼굴을 가졌다. 때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하면 정당성으로 묵인하려고도 한다. 즉 이성의 잣대를 빼앗아 가버린 것이 또한 사랑의 덫이기도 하다. 이 덫에 『차타레 부인의 사랑』처럼 에로스가 있는가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신곡』의 베아트리체 같은 아가페적인 구원의 사랑도 있다. 이는 곧 사랑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면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순 덩어리이기조차 하다. 이렇듯 문학 속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시대를 초월해서 변함없는 주제로 선택된 것이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명편 「오랑캐꽃」을 살펴보자.
한 송이 제비꽃이었다네!
그때 어린 양치기 소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가까이, 가까이
목장으로 걸어오며 노래를 불렀다네
아, 제비꽃은 생각했다네
ꡐ내가 만일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이라면!ꡑ
ꡐ그런데 아, 내가 초라한 제비꽃에 불과하구나
사랑하는 소녀가 나를 따서 가슴에 꼭 안아 준다면ꡑ
ꡐ아 단지, 그 짧은 15분간만이라도ꡑ
그러나 소녀는 다가와서 제비꽃은 보지도 않고
가엾은 제비꽃을 밟아버리고 말았다네
제비꽃은 밟혀 죽으면서 기뻐했다네
ꡐ난 그래서 죽지. 그래서 난 ......ꡑ
- 「오랑캐꽃」 전문
이 시 속엔 극애로 이루어진 자기헌신과 희생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끝없는 자기헌신과 희생이 뒤따를 때 가장 위대해 보인다. 기계에 조작되어 머리 속이 텅 비어가고 있는 대중들, 물리적으로 반응하고 사유하는 기술문명 속에서도 역시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영원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곧 사랑인 셈이다. 즉 머리를 굴리는 지적 책략으로 생산되는 현대시와는 달리 가슴의 언어로 영혼이 투입될 때 사랑의 명편은 태어난다.
다음은 우리나라 현대시 중 이미 고전으로 불리는 명시 한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여우가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서 살자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사랑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시는, 북극정서를 대변하는 나타샤에 흰 당나귀까지 의미부여가 되어 있어 이국정서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ꡐ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ꡑ는 구절로 보아 허름한 북극의 주막쯤이나 될 법하다. 그는 가난하여 현실적으로는 괴롭다. 이 괴로움을 뛰어넘는 힘, 그것이 나타샤를 꿈꾸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래서 사랑은 끝없이 자기헌신을 부르고 꿈꾸는 데서 더욱 그 순수한 감수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ꡐ사랑의 미로ꡑ란 말처럼 사랑은 그 운명이 어떻게 끝날지 항상 예측불허다. 여기서 나타샤는 백계 러시아의 한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와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는 것이다. 마가리는 움막집, 그녀가 산골로 가는 것이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다는 것이다. 발상부터가 낭만주의적 기법이며 또 그 범주 안에 있는 연시다. ꡐ나타샤ꡑ는 몇 년 전 백석의 나타샤라고 주장하는 한국여인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익명성을 띤 여인으로 읽힌다. 유종호가 「시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대로 김광균의 「눈 오는 밤의 시」에도 나타나고, 오장환의 「고향이 있어서」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ꡐ나타샤ꡑ는 마우자, 쫓긴 이의 딸이라는 구절로 보아 오장환의 나타샤는 러시아(마우자) 여인이라는 것이 확실시된다. 더 언급한다면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에 나오는 ꡐ로사ꡑ나 당시 분위기를 잡았던 ꡐ소냐ꡑ등의 여인과 같은 익명성이다. 특히 1920년대에 발표된 조명희의 단편 「낙동강」은 로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
그대는 평시에 날더러, 너는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그대는 죽을 때에도 날더러, 너는 참으로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이것은 묻지 않아도 로사의 사랑에 대한 순교정신을 표현하는 말로 엮을 수 있다. 로사는 박성운의 애인으로 폭발탄이 되기 위해 구포역에서 북행열차를 타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로사는 로자룩셈부르크에서 따온 여주인공의 기호(記號)이다. 1970년대 대중가요인 ꡐ줄리아ꡑ와 함께 1980년대엔 ꡐ제이ꡑ등이 애창되었고, 1980년대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1990년대 후반기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을 필두로 육욕적 사랑 즉 에로스의 미학에 탐닉하는 경향으로 흘러온 흔적이 짙다. 이는 김수영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분히 현대적 페미니즘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연애시 즉 연시라는 그것도 에로스와는 거리가 먼 낭만과 꿈의 언어들을 살펴보았다. 이 꿈의 언어들에 비해 에로스는 스킨러브의 육애적 속성 즉, ꡐ몸시(詩)ꡑ의 육애적 사랑이 강한 속성을 띠고 나타난다. 여기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몸시(詩)들에서 대자성(對自性)이나 대대성(對待性)의 자기희생과 현신의 꿈이 빠져 있는 게 자칫 잘못하면 하나의 재치나 농담(pun)으로 비하할 소지도 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시는 비뚤리고 병든 시대를 알레고리로 해서 쓰여진 사랑의 몸시(詩)다. 이 시를 읽을 때는 시의 문맥 속에 감추어진 콘텍스트에 의하여 시인이 의도한 건강한 정신을 읽어내야 할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 시는 세속화의 유형에 걸려 있고 유통언어와 정보언어에 물들어 있다는 혐의가 짙다.
더도 말고 보름 간만
호텔 룸 서비스를 받으며
호사스런 식사를 하겠다고
아이스크림같이 녹아 내리도록
그녀 품에 안겨 애무를 받겠다고
뜨거운 함박눈 속 바위처럼
다만 묻히고 싶다고
더러워진 와이셔츠, 고뇌의 쇠사슬은
죄다 풀어
태풍 부는 해안처럼 울고 싶다고
어쨌거나 제 임자도 있으면서
엉큼한 당신, 쓸쓸한 당신
육신을 벗으며 몸부림치는 육신
어리석고 서글픈 우리네 육신
-신현림, 「당신의 참 쓸쓸한 상상」 전문
2.
바슐라르에 있어서 ꡐ물의 상상력ꡑ은 결국 대지로 통한다. 모든 생명현상은 물에 잠기거나 대지를 물에 적실 때 풍요로워진다. 애초에 생명이 물에서 탄생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희랍신화에서 미인을 상징하는 비너스도 바다의 거품 속에서 올라왔다. 그것은 묘하게도 오늘날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생태학자들의 가설과도 일치한다. 빅뱅현상으로 보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달이 식게 되고 지구에선 물 속에 한 아메바가 탄생하면서 기포를 만들고 산소를 내뿜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생명의지를 꿈꾸는 아메바의 능동적인 의지에 따른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벌레야말로 이 생명을 꿈꾸는 원형으로 상징된다.
그대의 허리에서 그대의 발을 향해
나는 기나긴 여행을 하고 싶다
나는 벌레보다 더 작은 존재
나는 이 언덕들을 지나간다.
이것들은 귀리빛깔을 띄고 있는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가느다란 자국들을 갖고 있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불에 데인 자국들을,
창백한 모습들을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그대의 다리들을 따라 내려오면서
나선형을 그리며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여행하면서 잠을 자다가
마치 맑은 대륙의
단단한 꼭대기들에 이르듯이
둥그런 단단함을 지닌 그대의 무릎에 나는 도달한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날카롭고, 느릿하고,
반도(半島) 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이트의 허공으로
나는 떨어진다. 눈 멀고
굶주린 채 그대의 타오르는 작은 그릇 모양의
윤곽을 찾아 헤매이면서!
- 네루다, 「벌레」 전문
이 시를 보면 굶주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거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데서부터 이미 아이러니는 발생하고 있다. 그 거대한 우주란 알고 보면 여인의 육체다. 벌거벗은 육체를 아니 침상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육체를 스멀스멀 벌레 한 마리가 타고 내려가는 그 사실적 묘사가 신성한 섹스의 감각을 흔들면서 에로틱한 웃음을 만들고 있다.
이 에로스적인 탐미 욕구는 저 끝없는 우주의 정신에까지 닿아 있고, 그래서 육체는 신이 만든 그릇이며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육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한 시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도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여인의 미끈한 허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그 발가락 끝에서 다시 하얀 시트의 허공으로 떨어지게 만들면서 끝없는 우주정신을 천착하고 있다. 여기서 여인의 육체야말로 신이 만든 최고의 그릇이며, 기쁨이며,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네루다는 자신을 작은 벌레로 비유하면서 굶주린 채 전신으로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ꡐ나는 벌레보다 작은 존재ꡑ라고 말한다.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그는 이처럼 여인의 육체를 더듬어 내려가면서 불쑥 융기한 ꡐ산ꡑ에서 분화구를 찾아내고 촉촉이 젖어 있는 이끼와 불의 장미 한 송이를 꺾는 열정의 스킨러브를 노래한다. 오르가즘의 절정! 그는 그 이끼 속에 숨어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시야말로 에로티즘의 절정을 노래한 시라 말할 만하다. 그러면서 시의 후반부에 오면 육체의 하반신을 타고 내리면서, 그 벌레는 무릎에 당도하고 있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날카롭고, 느릿하고,
반도(半島) 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이트의 허공으로
그 미물인 작은 벌레는 아니, 나는 눈멀고 굶주린 채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여인의 육체를 탐하고 정복했다 해도 그 우주인 육체 속의 정신은 다 발가벗길 수 없음을 이 미물의 존재는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이 만든 오묘한 악기이면서 타오르는 작은 그릇 모양의 윤곽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네루다의 위대한 정신을 일깨울 수 있다. 일찍이 브레이크는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 천국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네루다는 이 신의 그릇 즉 신이 만들어낸 이 지상의 최상품인 명기(名器) 속에서 우주와 천국을 읽어낸 것이다.
이와 같이 시에서는 엉뚱한 ꡐ이미지ꡑ 즉 시적 자아를 벌레로 치환시키면서 무서운 충격과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는 기발한 착상이면서 엉뚱한 발상에서 시의 아이러니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우기도 한다. 한 편의 시를 다 읽고 난 후에 떠오르는 웃음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코미디언들이 순간순간 쏟아내는 웃음이 아니라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웃게 되는 웃음은 얼마나 이지적이며 책략적인 것인가. 이 웃음은 또한 고금소총이나 와이담에서 쏟아내는 웃음도 아니며 그렇다고 소설인 흥부전이나 배비장전, 변강쇠타령에서 맛볼 수 있는 그런 사설조의 웃음과도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는 발의 마술사라 불리는 카메라의 영상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홍콩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경쾌한 웃음 즉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형사로 분하여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어린애를 구출해 나오다가 바지에 불이 붙었을 때, 어린애가 포대기 속으로 흘린 오줌이 불을 끄는 그런 재치로 웃는 웃음도 아니다. 이런 재치나 순간적인 기지로 떨어지는 웃음과 시(詩) 속에서 웃는 웃음은 근본적으로 지적 책략에서 생산된다. 때문에 시(詩) 속에서의 웃음 만들기는 저 신의 미소에까지 닿아 있는 웃음이고,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내밀한 웃음인 것이다. 시인은 단지 언어의 뚜껑을 열고 그 웃음을 꺼내는 마술사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까닭도 여기 있다.
이런 웃음이야말로 시에서만 요구될 수 있는 지적(知的) 상상력의 웃음임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3.
끝임없이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벌레 한 마리가 걸어간다
한껏 긴 몸을 늘였다가 움츠릴 때
몸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으면서
몸 아래에 둥근 공간이 생긴다
긴 몸으로 그 공간을 밀어
벌레는 앞으로 나아간다
가만히 벌레의 걸음을 들여다보니
흰 알을 까며 가는 것 같다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할 때마다
하나씩 품어져 나오는 그 알을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굴리며 가는 것 같다
- 김기택, 「벌레 2」 전문
한 마리 벌레가 기어가는 그 생명성의 운동이 참 재미있다. 이 벌레야말로 원형상징 속의 알(번데기)에서 나온 것이다. 벌레가 기어가면서 만든 둥근 원이 알처럼 보이는 데서 시인은 지금 생명의 원형을 읽고 있다. ꡐ둥근 원이 알처럼 보이는ꡑ 이 비유는 그의 또 다른 시 「꼽추」에서처럼 생명의 질서와 정신을 앙양함으로써 지적인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네루다의 시 「벌레」처럼 여인의 육체를 대지로 본다면 이 대지 위를 기어가는 벌레도 하나의 알을 만들기 위한 에로스로 떠오른다. 실제로 이 대지의 어느 끝인가를 기어가 알을 만들리라는 것도 쉽게 연상된다.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붓꽃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 이정록, 「물소리를 꿈꾸다」 전반부
얼어붙은 대지에서 물소리를 꿈꿀 수 있는 알집, 그런 벌레의 집을 버드나무에서 보고 있다. 그래서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고 표현한다. 더구나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그 생명의 숨소리를 숨차게 반추하며 붓꽃씨처럼 늙고 싶다는 원초적인 생명의 환희를 꿈꾼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보았던 프랑스 혁명군이 거리의 시계에 새겨진 문자판을 쏘아대는 그런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은 없다. 생각해 보라!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속도감과 총알의 속도감. 더구나 자전거도 아닌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벌레의 속도감은 한없이 느리고 더디다. 달리 말해서 이 시에 나오는 벌레는 우리가 꿈꾸는 시간 밖에 있다.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천박한 한 형태일 뿐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의 속도대로 말한다면 ꡐ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ꡑ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더 언급한다면 ꡐ그들을 감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관능적 분위기는 바로 템포의 느림에서 생겨난다ꡑ고 말할 수 있다. 근접한 예를 든다면, 덜커덕거리는 시골길의 마차 위에서 두 육체가 처음에는 그들 몰래 접촉하다가, 곧 그들이 알게 접촉하며, 그리하여 물방앗간이나 다른 어디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엮이는 것과 같다. 무제한의 속도로 달리는 아우토반 위에서는 속도가 지각되지 않으므로 이런한 에로스의 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 이성선, 「벌레」 전문
이 시는 관조의 깊이에서 오는 동양적인 통찰력으로 인하여 고고한 분위기가 흐른다. 한 마리 자벌레의 꿈틀거림이 그대로 산이 되고, 들판이 되고, 풍성한 대지의 생명으로 넘치는 우주율이 된다. 여기서 자벌레의 굴신운동은 그대로 섹스를 하고 있는 과정으로서의 인터코스를 상징하고 있다. 이것이 곧 생명운동의 신성한 춤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기계 또는 물리적 시간에 의해 단추 하나만 누르면 금방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ꡐ다마고치 게임ꡑ속의 유사 생명현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혐오스런 시간 속의 생명이고, 누구나 모방하고 조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느림의 속도에 대해선 자벌레 한 마리가 만들어내는 ꡐ산이었다가ꡑ, ꡐ들판이었다가ꡑ 하는 그 굴신운동의 생명 속으로 시간과 공간, 더 나아가서는 생태환경을 다시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되는 깨달음에 와 있다. 이것이 70년대 초입에서 써진 생태환경을 다루었던 환경시들과는 다른 시가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 핏줄 속에는 이러한 생명의 원시정신들이 충분히 살아 있어 보편적인 세계정신으로 그 싹을 키울 만한 토양이 충분하다. 노자의 도덕경, 장자의 제물론, 선불교 정신, 그 이전의 풍류정신과 토속신앙에 의한 물활론까지가 이 영역에 해당한다. 우상 파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바울에 의해 전파되는 가부장적인 유일신의 숭배야말로 기술문명 즉 유아화(Intantillzation)문명이라고 이미 해답을 얻어놓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기술문명으로 보자면, 「시골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름때가 묻지 않은 자전거와 같은 그만한 속도감이면 족할 것 같다. 이는 1993년도 로마클럽에서 제시한 ꡐ성장의 한계ꡑ에 보이는 속도다.
4.
그녀는 서 있다 내 눈꺼풀 위에
그녀의 머리칼이 내 머리칼에 섞이고
그녀는 내 손과 같은 형태,
그녀는 내 눈과 같은 빛깔을 지니며
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 사라진다.
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그녀의 꿈은 눈부신 빛으로 싸여
태양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게 하고, 또 울게 하며,
할 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
이는 폴 에뤼아르가 첫 번째 연인 갈라에게 바쳤던 「사랑스런 여인」이란 시의 전문이다. 한 육체와 육체가 완전히 합일되어 있는 연인의 이미지, 이를 두고 사랑의 화신(化身)이라고도 부를 만큼 역동적인 이미지로 구축되었다. ꡐ눈꺼풀 위에 서 있는 그녀ꡑ, ꡐ그녀의 머리칼이 내 머리칼에 섞이고, 그녀는 내 손과 같은 형태ꡑ라는 대담한 표현으로 정사의 장면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받치고 있는 ꡐ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 사라진다ꡑ라는 말에서 단순한 정사가 아닌 영혼과 영혼의 만남은 신성한 세계로 이끈다. 이 대목에서 처절한 에로스는 에로스로 끝나지 않고 아가페적인 구원으로 이르며, 한껏 그 정사장면도 장대한 의식으로 떠오른다.
사랑은 전일주의(unanimisme)를 꿈꿀 때 아름답고 보편성을 획득한다.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희생됨이 없이 미래의 낙관주의 위에서만 꽃을 피우고 그 궁극의 도달점은 영혼의 개방이며 자유정신의 발화이다. 반 파시시트 투쟁에 참여했던 폴 엘리아르(1895~1952)는 그의 첫 번째 여인이고 애인이었던 ꡐ갈라ꡑ에게 바치는 「사랑하는 여인」으로도 합일체에 이르지만, 두 번째 부인인 뉘스에게 바쳐진 시는 그를 완전한 자유정신에 도달하게 한다. 갈라의 관능미에서 보였던 에로스가 뉘스에 이르러 영원한 아가페의 합일정신으로 깨끗이 승화하며 아픈 상처를 씻어낸다.
내 학생 때의 공책 위에
내 책상과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비어 있는 그 모든 책장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중략)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자유여
그의 시 「자유」의 일부분이다. 총 20연의 긴 시이지만 반복구의 차용이 열렬하게 자유의 이름을 갈망한다. 처음은 ꡐ자유여ꡑ 이 한 마디를 ꡐ뉘스여ꡑ로 했다가 ꡐ자유여ꡑ로 고쳐 적었다고 고백한다. 즉 자유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며 동시에 자유가 동일주체며 심상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자유가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자유정신을 획득하고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그의 세 번째 아내 도미니크와의 행복한 사랑에 비쳐진 후기의 시 「죽음, 사랑, 삶」을 보자.
그대가 오자 그때 불길은 다시 타올랐다.
어둠은 걷히고 지상의 추위는 별빛으로 빛났다
대지는 그대의 맑은 육체로 다시 덮이고
내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대가 오자 고독은 힘을 읽고
다시 대지 위에 안내자를 갖게 되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갈 길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터무니없이 크다는 것을
나는 전진했으며 시간과 공간을 얻었다
(중략)
인간은 서로 화합을 위해 태어났다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인간에겐 인간의 어버이가 될 어린이가 있다
불도 없고 거처도 없는 어린이들이 있어
그들 역시 다시 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또 자연과 그들의 조국을
모든 사람들의 조국을
모든 시대의 조국을
대지를 덮으며 지상으로 출렁이는 사랑의 기쁨, 모든 별빛마저 축복이다. 낙관주의로 열리는 문을 통하여 긍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 우주를 껴안는 것과 같다. 이것이 곧 전일주의의 사랑이다. 개인의 사랑을 통하여 온 인류를 껴안는 사랑의 승화야말로 위대하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사랑은 탐욕이 아니라 영감(Inspreistion)을 불러일으키는 끝없는 원천이다. 그러므로 이 영감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며 시인의 사후에까지 빛을 발한다.
2003년 봄호에 계속
(계간 문학과경계 겨울호부터 송수권 시인의 시론(詩論)을 연재한다. 네루다, 백석, 서정주, 김수영에서 최근의 김혜순, 신현림, 최영미 시인 등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시인들은 왜 사랑을 노래하고 연애를 노래하고 에로티즘을 꿈꾸는가. 한 마리 자벌레의 꿈틀거림으로부터도 사랑을 발견하고 애욕을 발견하고 생명을 발견해낼 수밖에 없는 시인들의 고된 숙명을 이 시대 최고의 토속정서의 시인 송수권 시인이 특유의 끈적끈적하고 유려한 필체로 독자 여러분들을 재미있게 찾아간다. )
<편집자 주>
사랑의 몸시학, 그 꿈과 모순의 미학
- 신에로티즘의 문법 창안을 위하여
송수권
1.
ꡐ사랑ꡑ은 문학의 양식 중 가장 보편적인 주제다. 그것은 국경도, 민족도, 인종도, 이념도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있고 문학이 있는 이상 이 주제 하나는 시대도 역사도 초월해서 존재한다. 모든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끊임없이 생성․소멸하고 변화과정을 거쳐도 이 주제 하나만큼은 고금을 통하여 금강석처럼 닳아지지도 않고 빛을 뿜는다.
C.D. 루이스는 예술의 발생론에서 혈거시대(穴居時代) 원시인들은 사냥을 나가 맹수의 이빨에 씹혀도, 또는 병들거나 상처난 몸을 이끌고 동굴 속에 누웠어도 벽면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시(詩)는 그 원형적 감정형태에서 나온 낙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그의 시론서인 『시학』에서 보는 바 곧 유희본능설과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다. 괴테가 말한 대로, 하늘엔 별, 지상엔 사랑이 우뚝할 뿐이다. 탈색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불가해성이 곧 사랑이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나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여전히 한 시대에 투입되는 인간에 의해 시대적 특성을 달리할지언정 그 보편적 주제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엔 방부제가 필요 없고, 그 존재전이는 시대를 초월해 있다.
또한 사랑은 내용과 형식 그리고 질서를 중요시한 세계의 덕목 속에서도 감성과 자유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낭만성의 덕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객관적이 아니라 개성적이며, 이성적이 아니라 감상적이며, 원칙적이 아니라 항상 변칙적이다. 게다가 도덕성이나 법질서를 뛰어넘어 자연 발생적이며 동시에 본능적이자 공격적이다. 박인환의 시에서처럼 인생은 통속잡지의 표지모델처럼 세월은 흘러가도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극약을 불사하는 죽음 저편에까지 끈끈한 마력을 지닌 까닭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명편을 낳기도 하며, 통속소설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한참 파문이 일었던 영화 『거짓말』과 같은 유치 찬란한 이야기를 낳기도 한다.
마담 보봐르가 탄생한 루앙사는 지금도 도시 전체가 불륜과 속죄의 뒤틀린 감정이 이중성으로 노출되고 있는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성당으로 꽉 채워진 도시가 하루 내내 차임벨에 의한 미사와 기도로 들끓는다. 그런가 하면 마녀 사냥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된 잔다르크의 처형을 증언하는 단두대가 있고 피의 외침이 들린다. 우리나라로 치면 남원골의 춘향이와 벽송사가 있는 추성골의 변강쇠와 옹녀가 있는 그런 분위기와 비슷하다. 한마디로 신성(神性)과 마성(魔性)의 두 얼굴을 가졌다. 때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하면 정당성으로 묵인하려고도 한다. 즉 이성의 잣대를 빼앗아 가버린 것이 또한 사랑의 덫이기도 하다. 이 덫에 『차타레 부인의 사랑』처럼 에로스가 있는가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신곡』의 베아트리체 같은 아가페적인 구원의 사랑도 있다. 이는 곧 사랑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면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순 덩어리이기조차 하다. 이렇듯 문학 속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시대를 초월해서 변함없는 주제로 선택된 것이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명편 「오랑캐꽃」을 살펴보자.
한 송이 제비꽃이었다네!
그때 어린 양치기 소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가까이, 가까이
목장으로 걸어오며 노래를 불렀다네
아, 제비꽃은 생각했다네
ꡐ내가 만일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이라면!ꡑ
ꡐ그런데 아, 내가 초라한 제비꽃에 불과하구나
사랑하는 소녀가 나를 따서 가슴에 꼭 안아 준다면ꡑ
ꡐ아 단지, 그 짧은 15분간만이라도ꡑ
그러나 소녀는 다가와서 제비꽃은 보지도 않고
가엾은 제비꽃을 밟아버리고 말았다네
제비꽃은 밟혀 죽으면서 기뻐했다네
ꡐ난 그래서 죽지. 그래서 난 ......ꡑ
- 「오랑캐꽃」 전문
이 시 속엔 극애로 이루어진 자기헌신과 희생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끝없는 자기헌신과 희생이 뒤따를 때 가장 위대해 보인다. 기계에 조작되어 머리 속이 텅 비어가고 있는 대중들, 물리적으로 반응하고 사유하는 기술문명 속에서도 역시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영원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곧 사랑인 셈이다. 즉 머리를 굴리는 지적 책략으로 생산되는 현대시와는 달리 가슴의 언어로 영혼이 투입될 때 사랑의 명편은 태어난다.
다음은 우리나라 현대시 중 이미 고전으로 불리는 명시 한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여우가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서 살자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사랑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시는, 북극정서를 대변하는 나타샤에 흰 당나귀까지 의미부여가 되어 있어 이국정서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ꡐ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ꡑ는 구절로 보아 허름한 북극의 주막쯤이나 될 법하다. 그는 가난하여 현실적으로는 괴롭다. 이 괴로움을 뛰어넘는 힘, 그것이 나타샤를 꿈꾸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래서 사랑은 끝없이 자기헌신을 부르고 꿈꾸는 데서 더욱 그 순수한 감수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ꡐ사랑의 미로ꡑ란 말처럼 사랑은 그 운명이 어떻게 끝날지 항상 예측불허다. 여기서 나타샤는 백계 러시아의 한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와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는 것이다. 마가리는 움막집, 그녀가 산골로 가는 것이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다는 것이다. 발상부터가 낭만주의적 기법이며 또 그 범주 안에 있는 연시다. ꡐ나타샤ꡑ는 몇 년 전 백석의 나타샤라고 주장하는 한국여인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익명성을 띤 여인으로 읽힌다. 유종호가 「시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대로 김광균의 「눈 오는 밤의 시」에도 나타나고, 오장환의 「고향이 있어서」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ꡐ나타샤ꡑ는 마우자, 쫓긴 이의 딸이라는 구절로 보아 오장환의 나타샤는 러시아(마우자) 여인이라는 것이 확실시된다. 더 언급한다면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에 나오는 ꡐ로사ꡑ나 당시 분위기를 잡았던 ꡐ소냐ꡑ등의 여인과 같은 익명성이다. 특히 1920년대에 발표된 조명희의 단편 「낙동강」은 로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
그대는 평시에 날더러, 너는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그대는 죽을 때에도 날더러, 너는 참으로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이것은 묻지 않아도 로사의 사랑에 대한 순교정신을 표현하는 말로 엮을 수 있다. 로사는 박성운의 애인으로 폭발탄이 되기 위해 구포역에서 북행열차를 타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로사는 로자룩셈부르크에서 따온 여주인공의 기호(記號)이다. 1970년대 대중가요인 ꡐ줄리아ꡑ와 함께 1980년대엔 ꡐ제이ꡑ등이 애창되었고, 1980년대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1990년대 후반기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을 필두로 육욕적 사랑 즉 에로스의 미학에 탐닉하는 경향으로 흘러온 흔적이 짙다. 이는 김수영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분히 현대적 페미니즘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연애시 즉 연시라는 그것도 에로스와는 거리가 먼 낭만과 꿈의 언어들을 살펴보았다. 이 꿈의 언어들에 비해 에로스는 스킨러브의 육애적 속성 즉, ꡐ몸시(詩)ꡑ의 육애적 사랑이 강한 속성을 띠고 나타난다. 여기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몸시(詩)들에서 대자성(對自性)이나 대대성(對待性)의 자기희생과 현신의 꿈이 빠져 있는 게 자칫 잘못하면 하나의 재치나 농담(pun)으로 비하할 소지도 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시는 비뚤리고 병든 시대를 알레고리로 해서 쓰여진 사랑의 몸시(詩)다. 이 시를 읽을 때는 시의 문맥 속에 감추어진 콘텍스트에 의하여 시인이 의도한 건강한 정신을 읽어내야 할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 시는 세속화의 유형에 걸려 있고 유통언어와 정보언어에 물들어 있다는 혐의가 짙다.
더도 말고 보름 간만
호텔 룸 서비스를 받으며
호사스런 식사를 하겠다고
아이스크림같이 녹아 내리도록
그녀 품에 안겨 애무를 받겠다고
뜨거운 함박눈 속 바위처럼
다만 묻히고 싶다고
더러워진 와이셔츠, 고뇌의 쇠사슬은
죄다 풀어
태풍 부는 해안처럼 울고 싶다고
어쨌거나 제 임자도 있으면서
엉큼한 당신, 쓸쓸한 당신
육신을 벗으며 몸부림치는 육신
어리석고 서글픈 우리네 육신
-신현림, 「당신의 참 쓸쓸한 상상」 전문
2.
바슐라르에 있어서 ꡐ물의 상상력ꡑ은 결국 대지로 통한다. 모든 생명현상은 물에 잠기거나 대지를 물에 적실 때 풍요로워진다. 애초에 생명이 물에서 탄생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희랍신화에서 미인을 상징하는 비너스도 바다의 거품 속에서 올라왔다. 그것은 묘하게도 오늘날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생태학자들의 가설과도 일치한다. 빅뱅현상으로 보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달이 식게 되고 지구에선 물 속에 한 아메바가 탄생하면서 기포를 만들고 산소를 내뿜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생명의지를 꿈꾸는 아메바의 능동적인 의지에 따른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벌레야말로 이 생명을 꿈꾸는 원형으로 상징된다.
그대의 허리에서 그대의 발을 향해
나는 기나긴 여행을 하고 싶다
나는 벌레보다 더 작은 존재
나는 이 언덕들을 지나간다.
이것들은 귀리빛깔을 띄고 있는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가느다란 자국들을 갖고 있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불에 데인 자국들을,
창백한 모습들을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그대의 다리들을 따라 내려오면서
나선형을 그리며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여행하면서 잠을 자다가
마치 맑은 대륙의
단단한 꼭대기들에 이르듯이
둥그런 단단함을 지닌 그대의 무릎에 나는 도달한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날카롭고, 느릿하고,
반도(半島) 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이트의 허공으로
나는 떨어진다. 눈 멀고
굶주린 채 그대의 타오르는 작은 그릇 모양의
윤곽을 찾아 헤매이면서!
- 네루다, 「벌레」 전문
이 시를 보면 굶주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거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데서부터 이미 아이러니는 발생하고 있다. 그 거대한 우주란 알고 보면 여인의 육체다. 벌거벗은 육체를 아니 침상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육체를 스멀스멀 벌레 한 마리가 타고 내려가는 그 사실적 묘사가 신성한 섹스의 감각을 흔들면서 에로틱한 웃음을 만들고 있다.
이 에로스적인 탐미 욕구는 저 끝없는 우주의 정신에까지 닿아 있고, 그래서 육체는 신이 만든 그릇이며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육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한 시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도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여인의 미끈한 허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그 발가락 끝에서 다시 하얀 시트의 허공으로 떨어지게 만들면서 끝없는 우주정신을 천착하고 있다. 여기서 여인의 육체야말로 신이 만든 최고의 그릇이며, 기쁨이며,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네루다는 자신을 작은 벌레로 비유하면서 굶주린 채 전신으로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ꡐ나는 벌레보다 작은 존재ꡑ라고 말한다.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그는 이처럼 여인의 육체를 더듬어 내려가면서 불쑥 융기한 ꡐ산ꡑ에서 분화구를 찾아내고 촉촉이 젖어 있는 이끼와 불의 장미 한 송이를 꺾는 열정의 스킨러브를 노래한다. 오르가즘의 절정! 그는 그 이끼 속에 숨어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시야말로 에로티즘의 절정을 노래한 시라 말할 만하다. 그러면서 시의 후반부에 오면 육체의 하반신을 타고 내리면서, 그 벌레는 무릎에 당도하고 있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날카롭고, 느릿하고,
반도(半島) 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이트의 허공으로
그 미물인 작은 벌레는 아니, 나는 눈멀고 굶주린 채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여인의 육체를 탐하고 정복했다 해도 그 우주인 육체 속의 정신은 다 발가벗길 수 없음을 이 미물의 존재는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이 만든 오묘한 악기이면서 타오르는 작은 그릇 모양의 윤곽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네루다의 위대한 정신을 일깨울 수 있다. 일찍이 브레이크는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 천국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네루다는 이 신의 그릇 즉 신이 만들어낸 이 지상의 최상품인 명기(名器) 속에서 우주와 천국을 읽어낸 것이다.
이와 같이 시에서는 엉뚱한 ꡐ이미지ꡑ 즉 시적 자아를 벌레로 치환시키면서 무서운 충격과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는 기발한 착상이면서 엉뚱한 발상에서 시의 아이러니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우기도 한다. 한 편의 시를 다 읽고 난 후에 떠오르는 웃음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코미디언들이 순간순간 쏟아내는 웃음이 아니라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웃게 되는 웃음은 얼마나 이지적이며 책략적인 것인가. 이 웃음은 또한 고금소총이나 와이담에서 쏟아내는 웃음도 아니며 그렇다고 소설인 흥부전이나 배비장전, 변강쇠타령에서 맛볼 수 있는 그런 사설조의 웃음과도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는 발의 마술사라 불리는 카메라의 영상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홍콩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경쾌한 웃음 즉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형사로 분하여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어린애를 구출해 나오다가 바지에 불이 붙었을 때, 어린애가 포대기 속으로 흘린 오줌이 불을 끄는 그런 재치로 웃는 웃음도 아니다. 이런 재치나 순간적인 기지로 떨어지는 웃음과 시(詩) 속에서 웃는 웃음은 근본적으로 지적 책략에서 생산된다. 때문에 시(詩) 속에서의 웃음 만들기는 저 신의 미소에까지 닿아 있는 웃음이고,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내밀한 웃음인 것이다. 시인은 단지 언어의 뚜껑을 열고 그 웃음을 꺼내는 마술사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까닭도 여기 있다.
이런 웃음이야말로 시에서만 요구될 수 있는 지적(知的) 상상력의 웃음임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3.
끝임없이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벌레 한 마리가 걸어간다
한껏 긴 몸을 늘였다가 움츠릴 때
몸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으면서
몸 아래에 둥근 공간이 생긴다
긴 몸으로 그 공간을 밀어
벌레는 앞으로 나아간다
가만히 벌레의 걸음을 들여다보니
흰 알을 까며 가는 것 같다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할 때마다
하나씩 품어져 나오는 그 알을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굴리며 가는 것 같다
- 김기택, 「벌레 2」 전문
한 마리 벌레가 기어가는 그 생명성의 운동이 참 재미있다. 이 벌레야말로 원형상징 속의 알(번데기)에서 나온 것이다. 벌레가 기어가면서 만든 둥근 원이 알처럼 보이는 데서 시인은 지금 생명의 원형을 읽고 있다. ꡐ둥근 원이 알처럼 보이는ꡑ 이 비유는 그의 또 다른 시 「꼽추」에서처럼 생명의 질서와 정신을 앙양함으로써 지적인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네루다의 시 「벌레」처럼 여인의 육체를 대지로 본다면 이 대지 위를 기어가는 벌레도 하나의 알을 만들기 위한 에로스로 떠오른다. 실제로 이 대지의 어느 끝인가를 기어가 알을 만들리라는 것도 쉽게 연상된다.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붓꽃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 이정록, 「물소리를 꿈꾸다」 전반부
얼어붙은 대지에서 물소리를 꿈꿀 수 있는 알집, 그런 벌레의 집을 버드나무에서 보고 있다. 그래서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고 표현한다. 더구나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그 생명의 숨소리를 숨차게 반추하며 붓꽃씨처럼 늙고 싶다는 원초적인 생명의 환희를 꿈꾼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보았던 프랑스 혁명군이 거리의 시계에 새겨진 문자판을 쏘아대는 그런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은 없다. 생각해 보라!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속도감과 총알의 속도감. 더구나 자전거도 아닌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벌레의 속도감은 한없이 느리고 더디다. 달리 말해서 이 시에 나오는 벌레는 우리가 꿈꾸는 시간 밖에 있다.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천박한 한 형태일 뿐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의 속도대로 말한다면 ꡐ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ꡑ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더 언급한다면 ꡐ그들을 감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관능적 분위기는 바로 템포의 느림에서 생겨난다ꡑ고 말할 수 있다. 근접한 예를 든다면, 덜커덕거리는 시골길의 마차 위에서 두 육체가 처음에는 그들 몰래 접촉하다가, 곧 그들이 알게 접촉하며, 그리하여 물방앗간이나 다른 어디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엮이는 것과 같다. 무제한의 속도로 달리는 아우토반 위에서는 속도가 지각되지 않으므로 이런한 에로스의 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 이성선, 「벌레」 전문
이 시는 관조의 깊이에서 오는 동양적인 통찰력으로 인하여 고고한 분위기가 흐른다. 한 마리 자벌레의 꿈틀거림이 그대로 산이 되고, 들판이 되고, 풍성한 대지의 생명으로 넘치는 우주율이 된다. 여기서 자벌레의 굴신운동은 그대로 섹스를 하고 있는 과정으로서의 인터코스를 상징하고 있다. 이것이 곧 생명운동의 신성한 춤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기계 또는 물리적 시간에 의해 단추 하나만 누르면 금방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ꡐ다마고치 게임ꡑ속의 유사 생명현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혐오스런 시간 속의 생명이고, 누구나 모방하고 조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느림의 속도에 대해선 자벌레 한 마리가 만들어내는 ꡐ산이었다가ꡑ, ꡐ들판이었다가ꡑ 하는 그 굴신운동의 생명 속으로 시간과 공간, 더 나아가서는 생태환경을 다시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되는 깨달음에 와 있다. 이것이 70년대 초입에서 써진 생태환경을 다루었던 환경시들과는 다른 시가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 핏줄 속에는 이러한 생명의 원시정신들이 충분히 살아 있어 보편적인 세계정신으로 그 싹을 키울 만한 토양이 충분하다. 노자의 도덕경, 장자의 제물론, 선불교 정신, 그 이전의 풍류정신과 토속신앙에 의한 물활론까지가 이 영역에 해당한다. 우상 파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바울에 의해 전파되는 가부장적인 유일신의 숭배야말로 기술문명 즉 유아화(Intantillzation)문명이라고 이미 해답을 얻어놓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기술문명으로 보자면, 「시골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름때가 묻지 않은 자전거와 같은 그만한 속도감이면 족할 것 같다. 이는 1993년도 로마클럽에서 제시한 ꡐ성장의 한계ꡑ에 보이는 속도다.
4.
그녀는 서 있다 내 눈꺼풀 위에
그녀의 머리칼이 내 머리칼에 섞이고
그녀는 내 손과 같은 형태,
그녀는 내 눈과 같은 빛깔을 지니며
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 사라진다.
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그녀의 꿈은 눈부신 빛으로 싸여
태양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게 하고, 또 울게 하며,
할 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
이는 폴 에뤼아르가 첫 번째 연인 갈라에게 바쳤던 「사랑스런 여인」이란 시의 전문이다. 한 육체와 육체가 완전히 합일되어 있는 연인의 이미지, 이를 두고 사랑의 화신(化身)이라고도 부를 만큼 역동적인 이미지로 구축되었다. ꡐ눈꺼풀 위에 서 있는 그녀ꡑ, ꡐ그녀의 머리칼이 내 머리칼에 섞이고, 그녀는 내 손과 같은 형태ꡑ라는 대담한 표현으로 정사의 장면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받치고 있는 ꡐ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 사라진다ꡑ라는 말에서 단순한 정사가 아닌 영혼과 영혼의 만남은 신성한 세계로 이끈다. 이 대목에서 처절한 에로스는 에로스로 끝나지 않고 아가페적인 구원으로 이르며, 한껏 그 정사장면도 장대한 의식으로 떠오른다.
사랑은 전일주의(unanimisme)를 꿈꿀 때 아름답고 보편성을 획득한다.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희생됨이 없이 미래의 낙관주의 위에서만 꽃을 피우고 그 궁극의 도달점은 영혼의 개방이며 자유정신의 발화이다. 반 파시시트 투쟁에 참여했던 폴 엘리아르(1895~1952)는 그의 첫 번째 여인이고 애인이었던 ꡐ갈라ꡑ에게 바치는 「사랑하는 여인」으로도 합일체에 이르지만, 두 번째 부인인 뉘스에게 바쳐진 시는 그를 완전한 자유정신에 도달하게 한다. 갈라의 관능미에서 보였던 에로스가 뉘스에 이르러 영원한 아가페의 합일정신으로 깨끗이 승화하며 아픈 상처를 씻어낸다.
내 학생 때의 공책 위에
내 책상과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비어 있는 그 모든 책장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중략)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자유여
그의 시 「자유」의 일부분이다. 총 20연의 긴 시이지만 반복구의 차용이 열렬하게 자유의 이름을 갈망한다. 처음은 ꡐ자유여ꡑ 이 한 마디를 ꡐ뉘스여ꡑ로 했다가 ꡐ자유여ꡑ로 고쳐 적었다고 고백한다. 즉 자유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며 동시에 자유가 동일주체며 심상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자유가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자유정신을 획득하고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그의 세 번째 아내 도미니크와의 행복한 사랑에 비쳐진 후기의 시 「죽음, 사랑, 삶」을 보자.
그대가 오자 그때 불길은 다시 타올랐다.
어둠은 걷히고 지상의 추위는 별빛으로 빛났다
대지는 그대의 맑은 육체로 다시 덮이고
내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대가 오자 고독은 힘을 읽고
다시 대지 위에 안내자를 갖게 되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갈 길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터무니없이 크다는 것을
나는 전진했으며 시간과 공간을 얻었다
(중략)
인간은 서로 화합을 위해 태어났다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인간에겐 인간의 어버이가 될 어린이가 있다
불도 없고 거처도 없는 어린이들이 있어
그들 역시 다시 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또 자연과 그들의 조국을
모든 사람들의 조국을
모든 시대의 조국을
대지를 덮으며 지상으로 출렁이는 사랑의 기쁨, 모든 별빛마저 축복이다. 낙관주의로 열리는 문을 통하여 긍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 우주를 껴안는 것과 같다. 이것이 곧 전일주의의 사랑이다. 개인의 사랑을 통하여 온 인류를 껴안는 사랑의 승화야말로 위대하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사랑은 탐욕이 아니라 영감(Inspreistion)을 불러일으키는 끝없는 원천이다. 그러므로 이 영감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며 시인의 사후에까지 빛을 발한다.
2003년 봄호에 계속
출처 : 진영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진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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