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스크랩] 백석시인과 김자야의 사랑이야기

길가다/언젠가는 2006. 2. 17. 15:57

*[내사랑 백석]* 비평세미나(송수권)* 발표/한귀복(들꽃시인)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단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사랑은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형체도 없지만 우리를 늘 몸살나도록 갈구하게 만든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의 시인으로 알려진 백석과 그의 애인 김자야와의 눈물나는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둘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자야님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자야.1916년(현89세)서울 관철동에서 출생.백석1912년평북 정주출생(93세). 김자야님은 일찍 부친을 병으로 잃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910년대에 성장했으니까 그때 당시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시기이고 조선 사람들은 어떤 사업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몰두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금광업 밖에는 없었다. 1918년 당시 금광 채굴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 미칠광자 광산가의 바람은 결국 김자야님의 집에도 불어닥쳐 할머니의 친척분이 찾아와 사정하는 바람에 집문서를 빌려주어 가정이 파산되었다. 그 전 까지는 훈장선생님을 두고 살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친척으로 인해 집이 불탄 집처럼 망해버리자 김자야님도 중학교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언니의 동창(여창 가곡의 명인)김수정 언니를 만난다. 그 언니는 집이 가난해서 일찍부터 기생의 길로 나가고 있었던 차 그 뒤로 집안도 넉넉해지고 부모님도 편안하게 모시는 걸 본 자야님은 수정언니를 졸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금하 하규일 선생님의 수제자가 된다.
그때 나이 16세이다. 가난을 벗어보려고 찾아갔던 그곳은 기생으로서 갖추어야할 예의와 무가,창,맵시등의 호된 훈련으로 바가지가 마치 설움을 받아내는 도구인냥 눈물을 담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자야님은 남다르게 맵시나 창솜씨가 뛰어나 금하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조금도 즐겁지 않았고 오직 가슴속에는 어떻게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하는 일념뿐이었다. 한때 중학교를 중단하고 이모를따라 안동고녀에 입학해서 학업을 계속할 때 뛰어난 실력으로 조선어연구회에서 관심을 보였는데 그후 해관 신윤국선생님의 도움으로 기생을 그만두고 일본유학을 가게된다.그때 나이20세. 유학중에 연희전문 최순주교수님이 찾아와 ‘해관선생님과 우리 몇 사람이 자야님을 하와이로 유학을 보내어서  장차 조선의 여성 일꾼을 만들고자 의논중이라며 이곳에서 공부는 잘 되는지’ 답습까지 올 정도라면 감히 자야님의 학문도 높이 칭송할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그 무렵 서울에서 소식이 돈절되자 귀국하게 된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본인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해관선생님과의 면회마져 중단되자 선생님을 만나기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기생이된다.  왜냐하면 기생이 되어야 커다란 연회에 참석 할 수 있었고 또한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를 만나서 특별 면회를 부탁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해관선생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함흥관을 나가게 된 첫날밤. 서울에서 함흥 땅으로 부임해와 있는 멋쟁이 시인 총각을 만나게 된다.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 송별회이다. 단 한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다. 백석님은 첫 대면에 자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했고, 마신 술잔을 건네면서 손목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죽기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그는 다시 손을 잡으며 ‘마누라,마누라.’라고 불렀으며 밤이 지날세라‘오늘부터 마누라 뜻대로 내몸을 맡아 주어야 해요.’자야님은 그날밤 파격적인 충격과 애원에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22세.그때 백석님은26세였고 동경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준재였고,이미 [사슴]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신인 시인이었고,19세에 이미 단편소설[그 모와 아들]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조선일보]기자로, 잡지[여성]의 편집장으로 있었다. 학교의 축구교사를 전담할 만큼 스포츠에 능했으며 이국적인 곱슬머리에 미목이 수려하며,그야말로 ‘모던보이’로 불리우는 청년신사였다.자야는 백석 시인이 지어준 아호였으며 22세의 어여쁜 기생이었다.그때의 기생이란 가무를 갖추고, 예의범절 행실이 단정하여, 사교계에서 이른바‘해어화’즉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날 뿐만아니라 대화도 능숙하고, 예능까지 갖추었다하여 세상에서 그렇게 칭했던 것이다. 그 무렵 자야님은 파인 김동환으로부터 수필제의를 받아 [눈오는 밤]이라는 수필을 썼고 그해 친정 어머니는 결핵으로 사망한다. 이렇게 문학 기생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둘은 함흥의 같은 마을에서 각각 하숙을 하며 깊은 사랑에 빠진다.영생고보에 재임하시던 백석님은 5만밖에 안되는 함흥에서는 좀처럼 보기드문 멋쟁이셨고,학생들은 그를 ‘모던보이’라고 불렀다. 2학년 담임을 맡은 3일후 출석부없이 50명을 호명하여 학생들은 신기한 존재에 선생님의 포로가 되었다고한다. 영어는 반드시 외어오게하여 뒷날 꼭 시험을 보았다. 학교 축구부 지도를 맡았고 공차는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러시아인과의 대화도 거뜬히 해냈다고 월간[현대시]에 나와 있다. 백석은 자야를 바다같이 생각하고,바다처럼 넓고도 깊은 마음으로 사랑했다.겨울방학이 되자 고향에서 오라는 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다시 자야품으로 돌아올만큼 애지중지여겼으며 고향에 내려가서는 신문이 배달되 듯 편지는 자야님의 문간에 화살처럼 꽂혔다. 백석님은 고향에서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와 첫날밤을 보냈으나 손 한번 잡지 않고 도망쳐와 만주로 도피성 이주를 간다.‘마누라, 이 연약한 손으로 그토록 추운 만주땅에 가서 어떻게 나의 와이셔츠를 빨고 고생하지?’하며 깊은 포옹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구태의연한 관습에 젖은 부모님은 자유결혼을 완강히 반대할뿐아니라 더군다나 기생출신으로서는 결혼도 할 수 없었다.자야님은 미천한 여자로서 그의 입신과 출세를 가로막고 흠집을 남길까 두려워 몰래 서울로 도망쳐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새처럼 훌쩍 떠나온 그녀앞에 백석은 다시 우뚝 나타나 변함없는 미소로,도량으로그녀를 감격시킨다.그녀를 데리고 함흥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흰 봉투를 건네준다. 그속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혀있다.그 둘의 사랑을 다시한번 실감하기 위해 읽어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마가리;오두막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서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야말로 백석님은 연애 철학자이다.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세상의 더러운 신분같은 건 다 버리고 오두막에서 둘만이 살고자햇던 사랑은 우리들의 마음을 새암나게 한다.
이렇게 서울에 와 있는 자야를 잃을까봐 영생고보를 그만두고 자야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조선일보사에 근무한다.그리고 서울 청진동 뒷골목에 살림을 차리고 그녀와 살던집에 의미부여를하여 시를 짓고,그녀가 사다준 넥타이에 의미부여를 하여 시를 짓고 백석님은 그녀 앞에서는 익살꾼이었고, 젠틀맨이었고,사랑의 열정가였다. 또한 푸줏간을 자나갈때면 시뻘건 날고기 덩어리들을 쳐다볼 수 없어 돌아 다녔으며,친구와 악수만해도 손을 씻고 손님이 왔다가면 문고리를 잡고 나서도 손을 씻을만큼 결백증이 심했다. 자야님이 화를 낼때면 깊은 포옹으로 늘 진한 키스를 퍼부어 대화를 대신하며 그것이 서로의 의사전달이라고..
그것이 통하지 않는 부부는 둔한 센스요.벽창호라고 백석님은 말한다. 그의 성격은 남을 비평,결함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도 않고 그야말로 관대함이 큰 장점이었다.술을 좋아는 했으나 마구 마시는 경음가는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 마시는 애주가였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고.책을 읽을때는 자야님의 손을 꼭 잡고 읽었으며 잠이들면 팔을 괴어 2,3시간 저린 팔을 참았다고 한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하며 개방적이며 넉넉함과 따뜻함으로 늘 관대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았고 책망도하지 않았고 우스게소리로 스스로 깨닫게 했다. 둘이 산책을 다녔으며 영화를 보았으며,한강변의 낙조를 함께 보았다. 그가 즐겨 읽었던 책은 모리악의[예수전] 변윤의[오불이전]을 즐겨 읽었다. 그 당시 세 벗이 있었는데 소설가 허준,의사이며 수필가인 정근양,극작가 함태훈그리고 방정환,영화감독 박기채들로 청진동을 드나들었다.
자야와 사는 동안 백석은 부모님의 만류에 3번이나 결혼을 했으나 3번다 식만 올리고 도망쳐와 ‘여보,당신 생각으로 여자들의 손은 단 한번도 잡지 않았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 당시 자야님은 백석님의 부모님으로부터 시달려서 방황을 하고 백석또한 봉건적인 관습 때문에 고민하며 무언의 반항을 보이기위해 머나먼 이국당 북만주 황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백석은 함게 가기를 애원하지만 자야님은 작전상 지혜를 짜 떨어져 있는 동안 잡음도 가라앉고,노여운 부모님으로부터 잠시 무관심해 질때까지 홀로 지내다가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고자 했다.그러나 남과 북의 땅덩이는 허리가 잘려 두 사람을 마치 갈라놓기라도 할것처럼 소식조차 확인할 수 없는 38선이 생기고 말았다.
이것이 백석님과의 짧은 사랑이자 긴 이별입니다.
해방후 백석과 함께 북만주에서 하숙을 같이한 송지영씨를 통해 들은 백석의 행적은 신경에서 무슨 관청을 다니다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인의 말에 사표를내고 그 후 많은 고생을 겪었을 것이라 한다. 인편에 한복 바지 저고리와 검정두루마기 한 벌을 보냈는데 송지영씨 말에 의하면 그 옷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자야님은 늘 꿈속에서 백석님을 만난다.‘평양에서 나를 찾으니 가서 일을 보고 오리다.북조선에서 나를 스파이로 몰아서 체포령이 떨어졌으니 나를 어디든 좋으니 안전한 곳에 좀 숨겨주오. 당신 옆에 누가 혹시 없소?.여보,나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아무거나 먹을 것을 좀 빨리 주어요. 이거 어디 허기가져서 사람이 살 수가 있나,‘ 늘 꿈속에서 굶주려하는 모습으로 왔다가 살며시 가 버리는 백석 시인
자야님은 시집이라도 안아보고 싶은 생각에 국립도서관까지 갔으나 대출이 금지된 시집이라 시집만 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한때 월북시인이라하여 사회적 비난도 받았으나 당치도 않은 말이다. [중앙일보]문학평론가 백철 선생은 재북시인임을 피력하고 있다. 분단의 혼란속에서 북의 이념을 선택하여 올라간 시인이 월북 시인이다. 그러나 백석은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안도 정주로 내려와 살게 되었을 뿐이다.
1991년 음력 7월1일,백석의 80세 생신날 아침.
당신의 나이26세,내 나이 22세 우리들의 청춘은 이제 뜨거운 눈물에 젖어 푹푹 한숨되어 나린다. 연연한 사랑만은 영원하건만 신의 질투인가. 이별이 찾아와 우리는 어이없는 남과북으로 나뉘어 26세의 사진만을 놓고 갖가지 원한으로 말없이 타오르는 한 자루의 향심만이 저 혼자서 쇠리 쇠리 꺼져갑니다.
이제 머지않아 빈손으로 돌아갈 때 당신의 순정이 그대로 서려있는 정열의 시 한 수 들고 저승길 갈날 기다립니다. 흰 당나귀타고 당신곁으로 떠나가는 자야
영광스럽기만 합니다. 김자야님은 3년 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시인이란 글을 잘 쓰는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고운 시인이 진정 아름다운 시인이 아니겠는가.
한귀복..이었습니다.

 


 

출처 : 진영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진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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