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房(문학외일반)

뼈 없는 뼈/박정원, 종려나무/김남권

길가다/언젠가는 2010. 9. 18. 17:32

 

박정원의 시세계가 [고드름]에서 [뼈 없는 뼈]로 건너왔다. 제 속을 다 드러낸 채 결기로 서 있던 물의 뼈에서

나와 타자 사이를 이어주는 물렁 뼈, 상생의 다리로 걸쳐놓은 것이다.

이번 시집에 그가 파종한 언어들은 대상과의 거리를 접사시킨 이미저리로 출렁인다.

다양한 바람과 햇살에 몸을 굴려온 모오리돌의 삶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눈물이 말라 뜨는 별, 깊은 환부를 드러 낸 감, 적막 한 장의 낙엽, 생리혈 한 무더기의 개어귀...',

작품 곳곳 시안을 새롭게 눈뜨게 하는 언어의 질감은 서로 조율하며 만개하여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진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촘촘히 들여다 보면 아직도 그의 울혈은 가시지 않은 채 멍자국에 갇혀 있음을 본다.

새들도 퇴근하는 저녁, 바보의자에 앉아 옥고를 메워가는 그의 울음이 아직 그치지 않았음이리라.

독자로서 아프다. -이영식 시인

 

누군가 왔다간다

바람이다

슬쩍 건드려보기도 하고 세게 치고 달아나기도 한다

숨이 잦아들자 강물은

하늘 자리엔 하늘을 구름 자리엔 구름을 산 자리엔 산을

어김없이 품는다

다시 바람이 꽃잎으로 조로록 내려앉자

거꾸로 앉힌 그들 자리에서는

안팎으로 드나들던 독수리 날갯짓이, 새끼염소 울음이,

푸른 멍을 입히던 물푸레나무이파리가

갈기갈기 찢어진 깃발로 팔랑인다

신발 두 짝만 보듬은 사내의 젖은 눈이 아롱자롱 강물위를 걷는데

수면을 박차고 치솟는 물고기 한 마리

덥석 그 눈빛을 물고 따라간다

갔던 바람도 돌아와 촤르르 빗질을 한다

강을 건너던 사내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빗살문자를 해독한다

하늘이, 구름이, 산이

흐트러짐 없이 그 광경을 베끼고 있다

수심愁心이 깊은 자리마다 빛을 낸다

저리 빛나는 줄도 모르고 강물은 가끔 빗살로 흐느낀다

굴절의 그늘이 더욱 눈부시다

 

-[물비늘을 읽다] 전문 12쪽

바람이 강물이 물비늘이 수심이 깊은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다.

강을 건너는 시인의 눈동자가 보인다.

물고기 한마리의 찬란한 비늘을 보며 닮아가는 시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가 물고기고 물고기의 언어를 해독하는 시인의 가슴이 깊다.

 

내 몸속엔 뼈가 없지, 있다면

분해된 ㅂ이나 ㅃ, 그걸 받히고 있는 작대기

아니면 유지 내지 보수하느라 애쓰는 ㅓ 또는 ㅕ

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씁쓰름한 소프트아이스크림

단박에 부러지는 감나무가지가 아니라

송곳처럼 쭉쭉 잘도 뻗어가는 수대나무

그것들을 조각조각 꿰매어 조각보로 만들면

쓸모가 참 많지 손수건부터 멋진 머풀러까지

후하고 불면 보이지 않던 바람도 보인다니까

신났어, 뼈 없는 찻잔이라나 유리컵이라나

가만히 주워 모아 탁자에 놓으면

끼리끼리 뭔 말들이 그리 많은지

왔던 바람도 잽싸게 창밖으로 물러나곤 하지

뒤짚어봐 물이 쏟아지잖아

뼈와 뼈를 이어주는 것도 물렁뼈잖아

물이었군, 내 몸에서 요동치는 것도

뼈가 아니라

뼛속 깊이 채워졌던 눈물이었군

물이나 먹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군

무심코 내뱉는 말이 곧 뼈였군

 

-[뼈 없는 뼈]전문

뼈 없는 뼈의 이유를 묻는다.

뼈가 물이 되고 물이 눈물이 되고 다시 뼈가 된다.

나를 본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형체인가.

언어의 식탁을차려 놓고 빤히 나를 기다려 본다.

말의 뼈를 찾아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랑이여

그대가 물푸레나무인 줄 몰랐다

물푸레라고 숨죽여 읊조리면

그대 우러르는 먼 산이

시 한 편 들려주고

돌아보는 뒷모습이

그림 한 장 남겨줬다

물푸레나무 아래서

이 나무가 무슨 나무냐고 물었듯이

사랑이여

나는 그대가 사랑인 줄 몰랏다

웃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치어다 볼 때마다

정강뼈 아래 물빛을 온통

물푸레로 물들이던

사랑이여

물푸레 옆에서 물푸레를 몰랐다

점점 내가 물푸레로 번져가는 것을 몰랐다

물푸레 물푸레 되뇌기만 하면서

맑은 물 한 종지 건네는 그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푸레 나무]전문 100쪽

시인이 이 시를 써 놓고 며칠동안 흐뭇했다고 한다

한번에 써 내려간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물푸레나무를 외칠때마다 사랑이 걸어 나온다.

잃어버린 옛사랑도 달려 나오고 그리움에 사무친 사랑이 달려 나온다.

아, 지금 물푸레 나무 심장속을 흐르는 사랑은 곧 내가 된다.

물푸레...물푸레... 사랑이여.

 

딱 하나 남은 홍시를 까치 한 마리가 먹다 가고 또 한 마리가

먹다 가고 뒤에 남은 또 한 마리가 쪼고 쪼다가

달랑 꼭지만 남은 감,

그 달디단 것이 파먹히고 있을 때 먼저 먹힌 일부는 까치의

몸속에서 빤히 먹히고 있는 자신의 남은 몸뚱이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쪽 귀퉁이를 빌어 매달렸던 홍시가 꽤나 짐스러웠다는 듯

감나무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

그 아래

바짝 몸을 숙이고 있던 낙엽들

여기저기 흩어진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왔다간 줄을 앎이

어찌 바람뿐이랴

그 달디 단 것이

마이너스통장에 들어앉아 맛나게 먹어치웠던 내력이

한숨으로 읽힐 때

아이들 빈 수저 부딪히는 소리, 기어이

밥그릇을 들고 강가로 간다

 

-[까치밥]전문 94쪽

따뜻한 마음과 결기가 느껴진다.

아무리 배고프고 허기로 사람을 채우던 시절에도 집 앞 감나무의 까치밥은

남아 있었다.

밤나무 아래에 밤 톨 몇 개는 남겨 두었다.

시인의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감나무에 까치밥이 달려 있는 마을풍경을 바라보면 가슴마저 환해진다.

사람의 마음에 까치밥이 걸려 있다면 그건 시인일 것이다.

 

함께하는 시인들의 회장이기도 한 박정원 시인은 시를 쓰는 몸이다.

온 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시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선 술 잔을 닮은 물의 냄새가 난다.

물이 웃고, 뼈가 웃고, 시인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