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있는 사람들(1978년 샘터사) 뒷표지
법정스님 8주기를 기리며 옛 페이지를 남긴다,
10-03-11일, 스님 입적 앞에 향불 하나 사르고 108 배를 올렸다,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에 얼마 남지 않으셨구나 생각하면서 생전에라도
한 번 찾아뵈어야겠다고 속내만 앓고 있던 참이었는데 막상 먼 길 가셨다는 소문에 지남의 만감으로 송광사 마당이며 불일암 오솔길로
끌려만 간다.
고교시절이었던가, 충장로 나라서점에서 <무소유>와 <영혼의 모음>이란 낱알의 껍질을 벗기면서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시작된다,
나의 영혼 속에 든 모음은 어설프기 한이 없었고 하잘 것 없는 바람에도 흔들리고 찢겨지는 언약한 영혼의 모음은 몸살기로 더했다,
이 두 권으로 하여금 어설프게 알았던 종교와 철학 그리고 풋내기 삶 틈새에 파고들어 밤을 앓게 하였다, 그때의 감동은 충격이었다
해도 거짓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백년을 넘어 선 지금도 다를 바 없이 진행 중인 몸살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만... 지금의 앓음에는 지독한 삼독(貪,嗔,痴)의
열꽃은 시들라 하고 덕유산을 향하여 손짓하는 청량산 옥수골 계곡물에 몸을 씻긴 암반처럼 더 이상의 이끼 낀 옷은 입지 않을 것이다.
<서 있는 사람들>이란 법정스님의 책을 끼고 넝마 꼴이나 다름없이 종로통의 어둠에서 대학이 뭐라고 이 골목 저 골목 기우뚱 거리며
강의실을 찾았던 앳된 스물 날의 애송이는 여기까지 걷다가, 봄 기운에 몸을 푼 계곡물에 목을 적시며 조계산을 향하여 합장한다.
지금, 조계산 마당엔 80년이 다하도록 잘도 쓰셨던 스님의 법기(法器)는 불 속의 재가 되어 녹아내리고 나의 귓전으론 - 法輪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국수를 맛보여 주시겠다 - 하시면서 불일암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고 마루에 앉아 맛이라곤 하나도 없는 맹탕국수
를 끓여주셨던 일이며, 맛도 모른 나에게 누렇게 뜬 잎사귀 물을 따라주시며 이것도 세상에서 젤 맛 좋은 차茶라 하셨던 낭랑한 울림만이
고적하게 스며든다.
방학 중 어느 겨울, 구산 방장스님께서 써 주신 부처佛과 是甚磨(이뭐꼬)의 글자를 보시며 큰스님(구산)의 필체가 막바지에 다가서고 있으시다좋다! 하시면서 써주신 글씨에 의미를 새기셨던 스님, 法兄!
九山 스님께서 주신 법륜(法輪)의 法名으로 계를 받았던 날, 같은 法 자 돌림 형제뻘이다 하시면서 동생같이 불제자처럼 정감으로 감싸주셨던
50대 중년 그 때 모습은 헐고 낡아, 새 法器(法體, 법을 담은 그릇) 받으시려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맡긴 채 한마디 없다. 불사르고 계신다.
불일암 마당 끝에서 조계산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앞산이 좋지, 하시면서 가랑이 밑으로 고개를 박고 거꾸로 보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주문하셨던 당신의 깊음으로, 32, 3년 전의 시곗바늘 끝에 매달려 그때의 시간을 더듬으면서 향불 하나 사르고 108배로 스님의 가신 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훨훨 잘 가십시오, 당신이 남기신 수많은 모음은 당신의 유언에 걸린 말빚이 아닌, 길 잃은 어둠에 빛이 되었고 갈증 난 중생에게 감로였다오.
가난을 탓하지 않고 비움을 향하여 청정으로 향하는 행인에게 당신의 그림자는 불생불멸 부처의 모습으로 함께할 것입니다.
불기2554년 정월 28일 옥수골에서 張法輪 合掌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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