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표현 기법>
시인은 한 방울의 이슬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투철(透徹)한 현실 인식 능력’에 의해서 평범한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개성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한 편의 시에서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이다.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연상(聯想)한다’, ‘비유해서 표현한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시인이 지목한 사물을 전혀 연관(聯關)이 없어 보이는 다른 사물과 연관을 짓는 것이다. 시를 분석할 때에는 ‘의사(擬似)진술’, ‘가(假)진술’, ‘시적 허용’, ‘시적 진술’이란 용어를 흔히 쓴다. 시에서는 논리적 서술을 생명으로 하는 산문과는 달리 일상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표현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의 진정성을 은연중 전달하며 독자를 사로잡을 만큼의 화자우월성과 시적 위의(威儀)를 형성한다.
여기서는 ‘시적 진술’, ‘이미지’, ‘참신한 발상(관계짓기)’, ‘관념시’, ‘심리적 거리’ ‘산문화 경향’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논리를 벗어난 ‘시적 진술’ 즉 통상적으로 시다운 표현이지만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정도로 얼토당토하다면 기법에서 실패한 시이다. 본래 시란 ‘언어의 연금술’이란 말 그대로 언어를 가장 감동적으로 언어미학에 의거해서 형상화하기 때문에 창작과정에서 좀 트이게 보이고자 해서 기교에만 치중하면 자칫하면 언어를 남용한 말장난으로 인식되기 쉽다.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대로 지나친 기교는 시를 오히려 망치게 하고 ‘장교어졸(藏巧於拙)’이란 말대로 시는 투박함 속에 기교를 숨기는 것이다.
시적 진술하면 흔히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미지에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역동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신적(지각적, 심리적)이미지에 속한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 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중략)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송찬호의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에서)
“정신의 집은 대체로 딱딱하고 무표정해 보인다/사물의 덩어리 같다//형체 없이도 딱딱한 덩어리, 관념이여/그대 우선은 그 투박한 오명을 벗고/참으로 딱딱한 사물의 벽 속으로 들어가 보자/사물이 되어 보자// (김추인의 <환타지아>에서)
“진달래는 고혈압이다./굶주린 눈멀어/우글우글 쏟아져 나온 빨치산처럼/산기슭 여기저기서/정맥 터질 듯 총질하는 꽃//진달래는 난장질에/온 산은 주리가 틀려/서둘러 푸르러지고/겨우내 식은 세상의 이마가/불쑥 뜨거워진다.//도화선 같은 물줄기 따라/마구 터지는 폭약, 진달래/진달래가 다 지고 말면/풍병(風病)든 봄은 비틀비틀/여름으로 가리라.
(강윤후의 <진달래> 전문)
인용된 시들에서 보듯이 이미지란, 시인이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을 발휘해서 특정한 언어의 선택과 배열을 통해서 시인의 정서나 시적 사유를 강렬하게 나타낸 그림과도 같은 것이다. 시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학적 글에는 이미지를 살려서 써야 정서에 호소한 글이 된다.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이란 한 편의 시에서 한 가지 소재만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해 보이는 것과도 연관을 짓는 것이다.
“영산홍 꽃잎에는/산이 어리고//산자락에 낮잠 든/슬픈 소실댁(小室宅)//소실댁 툇마루에/놓인 놋요강//산 너머 바다는/보름살이 때/소금발이 쓰려서/우는 갈매기”
(서정주의 <영산홍(映山紅) 전문)
미운 털 박히며 공간을 차지한 놋요강 신세처럼 제대로 대우를 못 받으며 슬프게 살아가는 소실댁이지만 영산홍 꽃으로 비유하며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사막의 폭풍은 시작되었다. CNN은 바그다드 시내의 폭발음을/생방송으로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전쟁도 프로 야구처럼/생방송으로 즐기게 되었다. 다국적군의 사기는 높고/현금이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수첩 갈피에 적힌/BC카드의 비밀번호를 확인해본다. 끼리리릭,/끼리리리릭, 현금자동지급기의 검색은 계속되고/모래 밑으로 묻혀가는 병사들,/그들은/그렇게 죽어가고/(중략)현금자동지급기는 끝끝내 나를 돌려주지 않는다.” (오정국의 <현급자동지급기 앞에서의 불안>에서)
시적 화자는 문명의 이기인 현급자동지급기를 이용하면서 걸프전(1991년)에서 다국적인 이라크를 공격하는 시사적인 사건을 연상하며 현대인의 불안을 나타내고 있다. 비유중심적인 시적 표현이란 소재주의에 입각한 객관적 상관물을 활용하므로 어떤 면에선 낯설게 하기를 지향하고 있다.
앞서 열거한 대로 시각, 청각, 후각 등등 여러 가지 감각으로 정서를 환기하는 ‘이미지시’가 있는가 하면, 오로지 지적 사유를 매개로 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독자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관념시’가 있다. 물론 관념시라고 불리는 시에도 이미지를 살린 표현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가시적이고 실증성을 추구하는 과학문명과 영상문화가 발달한 현대일수록 시에서는 회화성을 선호하고 있다. 시가 관념성을 강조한다 하여도 시란 근본적으로 환경 생태옹호와 서정성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이미지, 회화성, 정서, 관념 등이 시 표현의 요소이긴 해도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선 시의 외적 요소라 불리는 특정한 자료가 뒷받침되기도 한다. 우리 시사(詩史) 최초의 모더니즘시(회화적 기법)로 알려진 김광균의 <추일서정>(1940)의 첫 연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포화에 이지러진/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ㅎ게 한다.”에서는 낙엽을 망명정부의 지폐로 은유했는데 폴란드 사건을 모르는 독자라면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경제 성장으로 인해 도시화, 산업화가 발달한 1970년대 무렵, 부조리한 사회 현실의 고발을 담거나 현실의 어두운 면모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시가 다량으로 나왔다. 훗날 민중문학으로 이어졌다. 김지하의 <황토>(1970), 조태일의 <식칼론>(1970), <국토>(1975), 신경림의 <농무>(1973),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1974), 고은의 <새벽길>(1978),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1974),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등등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비참하고 초라한 생활상을 그대로 담은 시로는 일제시대의 이용악, 백석의 작품에서도 있었다.
날로 밤으로/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대대손손에 물려줄/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모두 없어진 지 오랜/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이용악의 <낡은 집>에서)
“이웃집 하수구 비린내 쉽게 넘나들고/봄바람에 애기 기저귀 펄렁이던 그 집//다듬던 아욱 한움큼 집어주던 병든 주인집 할멈/움푹 패인 눈에서 서글픔 솟아나던 그 집//밤이면 바퀴벌레, 사각사각, 타이어표 검정고무신/귀에 대면, 쏴아 알 수 없는 소리, 고향 생각에 잠이 헛돌던 그 집//공중변소에 가 바지 까내리면 낮에도 모기가 엉덩이 물고/그래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웃집 처녀 똥에 내 똥 섞던 그 집//새벽이면 불암산 약수터에서 산을 한초롱 짊어지고/안개 속에서 어머니 걸어나오시던 그 집//튼튼한 갈비뼈 좀 보라고 철골 세워지더니 아, 아파트/아파트족들이 쳐들어와요 아파카트 맞고 배山진친 그 집//지금 그 집은 헐어졌어도 내 가슴속으로 이사온 그 집/가끔 그 집 속으로 들어가 그 집을 생각하면 눈물겹고
(함민복의 <상계동 시절> 전문)
인용한 시들은 얼핏 보면 일상 언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 같지만 시인이 창작 이전에 얼마나 주변 사물을 예리하게 바라보았으며 초라하고 비참한 생활상이란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대상들과 어떻게 연관지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시인이 그 당시 그 위치에서 바라보고 느꼈다는 현실중심주의 사고에서 주변과의 동일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구심력이 보인다.
박노해를 비롯한 70~80년대 ‘노동 현장을 소재로 한 노동시에서는 거대한 도시산업화에서 부속품이 되어버린 나약한 피고용주의 생활을 나타내면서 생경한 일상적 시어를 여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시들에 대해선 대체로 시다운 언어 미학에 기여하지 않고 직설적인 주장과 감정을 그대로 나타나므로 시적 가치가 뒤떨어진다는 비판이 초창기에 있었다. 이런 경향이 시의 산문화 경향으로 이어졌다.
시에서 아무리 고통스런 삶을 그렸다 해도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투명하게 응시하며 형상화해야 생동감이 있기 마련이다. 비근한 예로 김소월의 시에는 슬픔, 한(恨), 현실 저항 등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진 않아도 말투나 단어 사용에서 슬픔이 그대로 느껴진다. 시에서 심리적 거리 유지란 대상을 표현할 때에 얼마나 감정을 억제하느냐를 말한다. 그런데 시에서 심리적 거리가 최대한 멀어져서 인간의 생생한 정서가 시적 아우라로 나타내지 못하면 비인간화로 분열된 ‘관념시’가 된다.
노동시처럼 관념시와는 대조적으로 심리적 거리가 아예 없어진 시는 감상적인 시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해 다음 두 편의 시를 비교해 보자.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내리고/(중략)/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히 할 말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에서)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중략)/피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중략)/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애비 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정희성의 <아버님 말씀>에서)
<사평역에서>의 시적 화자는 광주 사태 직후 군중 속의 고독에 잠겨서 제대로 저항을 못하며 체념에 잠기고 있다. 피곤에 지쳐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고 싶지 않은 절박함을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되는 서글픈 시골 간이역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매우 서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이 시는 대상에 대해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시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그에 비해 <아버님 말씀>은 거리감이 거의 없이 직설적으로 감정과 사상을 노출하고 있다. 그 반면 최대한으로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한 시는 박목월의 <윤사월>, <나그네> 등이 있다.
시 창작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어떤 기법으로 표현했건 그것은 시인의 몫이지만 독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쉽고 일상적인 언어를 가지고서 얼마나 강렬하게 감동을 받느냐에 있다. 그러고 보면 시의 기법이란 어찌 보면 독자들이 만들어 간다고도 할 수 있다. 일상의 생경한 단어를 그대로 담은 노동시를 보더라도 시는 우선 감정보다 현실 중심주의에 입각한 사실(FACT) 전달에 우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서 사실을 그려낸 부분에서 독자가 시적 위의(威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시인의 능력에 달려 있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첫 접근 분야는 현실 속에서 시인 자신의 위치와 눈앞의 현실이 지닌 무게감이다. 그 무게는 모든 사물을 고루 판별하는 지각적 능력으로 이어진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시인 자신의 내면의 깊이로 우주의 진리를 판별하는 능력이 궁극적 목표이다. 어쨌든 시의 ‘사실 전달하기’에서 우선 눈에 띄는 패턴은 산문화된 시적 전개와 ‘지금 여기서’를 강조한 시․공간의 명시(明示)와 시적 화자의 구체적 행위이다.
映畵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내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중략)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옛날 영화관에서는 애국가를 경청하는 시간을 의무화했었는데 시적 화자는 그런 강요된 애국심에 반발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 당시 애국가 화면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새들의 자유로운 비상 장면을 부러워한다. 끝 연의 ‘주저앉는다’는 정치권이라는 우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어느 가을 날 오후 비닐 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 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를 보여주었다.
그 녀석이 한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중략)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중략)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나는 몸을 떨었다. 귓속으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쳐들어 왔다.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네. 썩지 않는 인간의 자식이라네.
비닐 봉지는 바람 속에 노오란 꽃처럼 피어났다.“
---강은교의 <어떤 비닐봉지에게>에서---
이 시에서 보듯이 시인의 현존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소한 일상 체험이 우리들이 처한 현실의 특수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지 근사한 철학적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비닐봉지 스스로가 오랫동안 썪지 않는다는 물질적 속성을 ‘노오란 꽃’으로 비유한 시인의 안목에서 미적 감화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시를 쓰고 감상하는 것은 현실(사실)이상의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자연발생적인 일상적 언어 구사를 뛰어넘어 낯설게하기를 통해 내면의 지각을 염원하는 것이다. 요즘 시적 언어가 감성의 언어에서 모더니즘처럼 인식의 언어로 점차 변화하면서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표현했던 종전과는 달리 사물을 통해서 언어 구사의 다양성이 발달한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부합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정효구 (0) | 2008.10.12 |
---|---|
[스크랩] 글쓰기 십계명 (0) | 2008.09.23 |
[스크랩] 문태준 시 읽기 (0) | 2008.01.30 |
[스크랩] 신용목 모음 시-틈 외 20首 (0) | 2007.10.21 |
[스크랩] [서울신문]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 이강산(이산) (0) | 2007.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