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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름 그림자 - 신용목(1974~)
태양이 밤낮 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초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
바닥 없이는 그림자 생기지 않으니, 부딪힐
몸이 있어야 구름의 족보도 가질 수 있지.
구름이 구름을 낳고, 낳고, 낳는 동안, 가
죽을 얻은 후라야 가죽을 버릴 수 있었지.
몸을 얻은 후라야 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네. 우금치 한낮처럼 도처에 비린 구름
들 울며 떠가는 하오. 울지 마라, 밑바닥
없이는 구름의 유적이 이토록 쓸쓸하니. 절
벽에 몰린 밥 때를 알리는 종소리 뭉게뭉게
번진다. 구름의 유언장들이 21세기의 들녘
과 거리에 쌓여 쓸린다.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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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별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죽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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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심을 쏘다 / 신 용 목
..사수가 한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
해서다
..어떤 형벌이 사수의 눈동자 속에
..과녁의 동심원을 그렸을까
..한 입 어둠을 씹어먹는 허공의 아득한 중심에서
..정확히 자신의 죽음을 겨누어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은 방패가 아니다
..바람 불 때마다 영혼의 부력으로 뒤집히는 중심의 테두리 그 팽팽
한 시간 위에서
..빗물이 명중의 제 몸 잠시 허공에 흩어놓을 때
..한 발의 生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그리하여 저편
..영혼으로 과녁을 치는 무지개,
..중심을 산 너머에 숨겼으므로
..검은 부리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구름 사이로
..누구를 겨누어 저달은 오늘도, 눈꺼풀을 내려 초점을 잡는 것일까
한쪽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둥글게 갇힌 자신의 영혼 그리고
..영원히 외눈인 해와 달,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
*<시작> 2007. 봄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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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멀리 왔다
돌아 갈 수 없다
바퀴의 제단에 뿌려진 붉은 피!
아스팔트가 성스럽게 받아내고 있다 살갗속에
단단한 슬픔이 흩어져 환호성치고 있다
이른 아침, 그녀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성단의 첫 참배자였던 자신의 손에 쓰레기봉투가 들려져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의식이 시작되고
경광등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잠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이 지닌 마지막 습성이 그들을 그 자리에 서 있게 했다
얼마후, 군중을 헤치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한눈에도 그가 급작스런 의식의 제사장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는 너무 늦게 왔다
그녀는 멀리 갔고
쫓아가기엔 변심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가 주저 앉아 입을 열었을 때 세상의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내는 소리는
물 속에서 키웠던 욕정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한 마지막 발기처럼 붉게 부푼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의 빈 수레가
원을 그리며 돌고, 우주의 한 골짜기가 그렇게 무너졌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바퀴들은 다시 소리를 내며 구르기 시작했고
불안한 사람들은 또 다른 성단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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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들의 페루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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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저녁이 지나간다
바람이 가로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산발의 여자가 남
자의 멱살을 흔드는 것처럼 버스로 지나가는 신촌 하늘
에 노을이 쇠가죽처럼 걸려 있다 그을린 집들을 빠져나
온 연기가 해꼬리에 선선히 몸을 주는 가을 남자는 노란
윗도리 꼼짝 않고 서 있는데 남자를 치다 쓰러진 늙은
여자여 제풀에 손 놓고 한 세월 울고 있다 우두두두 길
위로 떨어지는 은행알들 터져 또 여식처럼 캄캄한 골목
불빛 뒤로 사라지고 객지에서 속살처럼 불거지고 누구
도 사연을 묻지 않는다 노란잎을 바라보는 눈망울을 버
스는 어디론가 실어 나르고 아무도 말리지 않는 이 가을
노을이 싸움처럼 번지는 건너편 차창으로 장의차 한 대
지나간다 그 저녁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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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형틀 숭배/신용목
이 마을엔 처형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어 높은 옥탑마다 형틀을 꽂고 찬
양의 공력을 공중에 띄운다
형틀 붉은 형광의 꼬리를 잡아끄는 바람,
십자의 그림자가 깔리는 아침마다 잘린 발소리가 바지에 검은 때로 올
라앉았다
기도의 통성이 젖은 무늬로 땅을 덮는 날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옥상을 오르내리지만
그림자만 이따금 옥탑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아무리 못을 박아도 밤은 구
멍나질 않았고
형틀에 감기는 바람만 서쪽하늘에 붉은 피로 굳어가는 저녁, 어떤 처형
으로라도, 오래전 당신이
이곳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를 물었던 것처럼
내가 이곳에 버려진 이유를 묻고 싶었다, 재개발 연립 옥상에 널린 빨래
가 흰 바짓가랑이를 힘차게 놀리며 바람 속으로 뛰어가고 있엇다
<시로 여는 세상>,2006,여름호
[좋은 시 2007],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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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민들레/신용목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 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 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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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신용목
개 혓바닥이 맑게 닦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반짝 제 눈을 달아
놓는다 한 되들이 개밥그릇
마당을 지나간 바람은 백만 되 다시 백만 되
누가 바람의 등에 개 문신을 새겼을까-너무 많은 눈빛을 어슬
렁거리느라 흘려보냈다
개의 내장처럼 찌그러진 개밥그릇
어제는 종일을 잠만 잤고 오늘은 허공을 컹컹 짖는다 오랫동안
구름이 지나가는 바람의 내장처럼
잠잘 때마다 몸이 주리고 짖을 때마다 허공이 환하다
누가 바람의 목에 개목거리를 채웠을까-너무 많은 걸음을 땅
을 파느라 심어버렸다
몸 한쪽을 울끝에 묶어놓고
햇살을 잘게 빻는 빈 마당으로 서서 사립으로 열린 내장의
처음과 끝을 바라본다 컹컹
개밥그릇에 반짝이는 허기는 다시 백만 되
개는 바람에 짖지 않지만 바람은 개를 먹이지 않는다 개의 내
장에는 바람 문신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시 2007],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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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세상을 뒤집는 여자/신용목
아침마다 세상을 뒤집는
여자가 있다 목장갑에 기름보다
콧물 더 많이 묻고
바람이 붉은 포장을 건드리면
얼룩으로 이력을 쓰는 앞치미 한 장
먼저 달려가 펄럭인다
오른쪽 문짝이 삐걱거리는 트럭으로
반죽을 실어다놓은
여자의 사내는 골목 어귀에서
담배 한 대 다 태우고 돌아가고
뒤집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기름방울은
마을버스가 닿지 않는 동네 엄마
없이 밥을 먹는 아이
얼굴에 주근깨 자국으로 번진다
날마다 남은 잠을 끌고 온 사람들은 말없이
가스불을 바라본다 거리를 채질하는 바람
두 볼을 스쳐
가도 세상을 벼르본 날
하루도 없다 그저 제향 같은 연기 더러 오르고
여자의 가난으로 구운
손바닥만한 세상을 받아든 사람들은
기름방울처럼 길 위로 스며들었다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고
버스 노선이 바뀔 즈음
겨울과 함께 그녀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지만
빈 내장의 기억
만은 그녀가 있던 자리에 붙어
풍선껌처럼 늘어났다
우연히 버스를 기다리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까지 밀려간 적이 있다
아침마다 그녀가 보았던 세상이
이삿짐처럼 눈앞에 부려지고 잠시
붉은 포장이 잡힐 듯
펄럭였다 뒤집어도 익지 않는
겨울을 뒤집느라 아침마다 혼자
뒤집히던 그녀
기름방울 속에 누렇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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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혀의 해안/신용목
저녁이 발을 헛디딘 곳 - 지팡이를 빚으러 가야 하네
물은 왜목의 좁은 해협을 지나며 어촌 불빛에 묽은 뺨을 건넨다
누가 제 혀를 잘라 서쪽하늘 붉게 기웠는가
섬 산 능선 늦바람에 감기는 고백도 되지 못하고 죽어서야 입 벌리는 조개들, 무슨 말을 삼키려다 속을 태웠는가
석양에 넘어진 저녁 - 지팡이를 건네러 가야 하네
**중앙일보(2007. 9.19<월>31면' 시가 있는 아침')게제
**고형렬시인말씀:
시인의 한 상처가 어느 저녁 바다 앞에 서 있다.
해협을 빠져나가는 물을 보며 육체의 언어를 건네주고 싶지만 뺨만 건너갈 뿐이다.
어떤 내면의 고백도 전달하지 못한 채 어촌의 불빛만 빤하다.
이것이 젊은 시인의 주제다. 왜 건너지 못하는가.
석양을 대면하고도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혀를 잘라 붙였다.
지팡이의 언어가 오지 않은 때의 단절된 시. 하지만 내면엔 석양이 문을 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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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권태로운 육체/신용목
소래 뻘밭 비스듬한 포장집에서 꽃게를 삶았다
앞치마의 주인네가 엉거주춤 게의 앞뒤를 잘랐다
붉은 살 속에 흰 뼈를 감추고 간 나는
붉은 뼈 속에 흰 살을 숨긴 게를 본다
그렇게 안방에서 내일 죽을지 모를 아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카메라에 배고픈 양손을 내미는 반세기 전 아버지를 보았다
칠면초 갯내를 만졌던 바람은 내 척추를 찌르지 못해, 빙그르
르 포장을 두드리고 간다
가도 낯빛만 붉혔을 뿐
태양을 겨누어 일제히 솟구치는 원주민의 창처럼 서 있는 노을
처럼
뼈마디 꺼내놓고 붉도록 맞서본 적이 없다
뒤집어 입은 외투처럼 자족의 美에 취했으므로
내 몸은 오랫동안 치욕을 사육해왔다, 발버둥을 버린 갑각류
의 몸
마음으로 결박한 영혼의 유배지
낡은 철교 위를 걷듯 쇠 부딪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지나간 자
리는
언제나 상처였으니 몸에 난 수술자국, 그 위로 기차를 달리고
싶다
서둘러 협궤의 저녁을 통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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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울고 있는 여자 / 신용목
봄 오는 놀이터 누운 의자에
한 여자가 우는데
그냥 물린 아침상 흰빛 밥알처럼
묽은 그늘을 입고
갓 지은 소복으로 놓였구나
온몸 상여가 되어 광목필 지전처럼 떨리는데
마음의 장지를 찾아 먼 데 마음이 숨겨둔 길 가는 걸음에
나무는 나무대로 아픔이 많아 저 가지들을 내고
마음은 마음대로 새로이 무수의 길들이 생겨나
간두의 끝을 딛고 선 슬픈 애인이
물에 집니다
얼굴이 남긴 갈래의 길을 따라 시절의 깊이를 파고 파되
끝내는 닿지 못할 죽음의 등으로 물이 찹니다
차되 기어이 넘치지도 못할
바람도 손 놓은 허량한 한 날 묘지의 공원에 소풍 온 마음
주소 없는 걸음 되어
어디 목은쌀 눅는 산간에나 들어 잠이나 청하면 연잎
처럼 젖은 마음도 탈상의 기억을 돌아 끄덕끄덕 낡은 집
사립 안으로 그러나 봄볕에 늙으며
울고 있는 여자 내 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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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틈 / 신용목
바람은 먼 곳에서 태어나는 줄 알았다 태풍의 진로를 거스르는 적도의 안개 낀 바다나 계곡의 경사를 단숨에 내리치는 물보라의 폭포
혹은 사막의 천정, 그 적막의 장엄
아랫목에 죽은 당신을 누이고 윗목까지 밀려나 방문 틈에 코를 대고 잔 날 알았다
달 뜬 밖은 감잎 한 장도 박힌 듯 멈춘 수묵의 밤 소지 한 장도 밀어넣지 못할 문 틈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고 고 고 좁은 틈에서 달빛과 섞이느라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육체의 틈 혹은 마음의 금
그 날부터 한 길 복판에서 간절한 이름 크게 한 번 외쳐보지도 못한 몸에서도 쿵쿵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나와 나 아닌 것 삶과 삶 아닌 것이 섞이느라 명치끝이 가늘게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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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거미줄 / 신용목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세월은 잠들면 九天에 가 닿는다
그 잠을 깨우러 가는 길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많이 향하고
길 너머를 아는 자 남아 지도를 만든다
끌린 듯 멈춰 설 때가 있다
햇살 사방으로 번져 그 끝이 멀고, 걸음이 엉켜 뿌리가 마르듯 내 몸을 공중에 달아놓을 때
바람이 그곳에서 통째로 쓰러져도 나는
그 많은 길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작은 것들 날아와 길 잃고 퍼덕일 때, 발이 긴 짐승
성큼 마지막 길을 가르쳐주는
나는 너무 큰 짐승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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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저녁에 / 신용목
사선(斜線)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을 가둔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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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산수유꽃 / 신용목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을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은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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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우물 / 신용목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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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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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허공에서 감자를 캐다
해의 알, 눈 감을 때만
보이는 검은 알
붉은 줄기에 달린 감자,
캐러 간다
눈 뜨면 불타는 감자밭
(아이들이 허공에 대고
감자를 먹이고)
눈 뜨면 환하게
재가 되는 감자밭,
눈 감고 간다
죽은 친구를 불러 간다
잠든 애인을 깨워 간다
바람 이파리 바람 이파리
볕 쨍한 대낮 공원,
목숨이 호미 같다
내일은 비
호미날처럼 꽂히는
비, 감자알 같은
가슴팍을 내리치리라
<창작과 비평>200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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