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탯줄 / 문정희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문학사상 (2006년 3월호)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졸업
진명여고 재학시 시집 <꽃숨> 발간.
1969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나옴.
1976년 제 21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4년 제16회 정지용문학상
시집 <꽃숨>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우리는 왜 흐르는가>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대>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사랑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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