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6-08-16 18:36] 박인환(사진 오른쪽)이 자신이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세월이 가면’ 전문) 이 시와 관련한 유명한 ‘전설’이 있다. 서울 명동의 한 선술집. ‘명동백작’ ‘댄디보이’라고 불리던 박인환 시인(1926~56)이 즉흥시를 지었다. 한 자리에 있던 극작가 이진섭 역시 즉석에서 작곡, 테너 가수 임만섭과 나애심이 그곡을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이 노래는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국민적인 애창곡이 됐다. 또 ‘목마와 숙녀’는 한국시사에서 감상주의 또는 낭만주의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후략)” -시·산문등 51편 새로 발굴 수록- 잘 생긴 외모, 도시적 낭만성, 그리고 대중가요의 선율에 실린 두 편의 시….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게 그에게는 ‘덫’이었다. 문학청년들의 영원한 우상인 김수영 시인이 문학 라이벌 박인환을 질투·폄훼하면서 박인환은 ‘가장 저평가된 시인’의 하나가 됐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박인환 탄생 80주년인 지난 15일 그의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문승묵 엮음, 예옥)이 출간됐다. 시 80편과 산문 70편이 실린 ‘사실상 최초의 전집’이다. 전체 150편 가운데 ‘언덕’ ‘1950년의 만가’ ‘봄은 왔노라’ ‘봄 이야기’ ‘주말’ ‘3·1절의 노래’ ‘인제’ 등 시 7편과 산문 44편 등 무려 51편이 새롭게 발굴됐다. 박인환과 김수영의 불편한 관계는 박시인의 유일무이한 개인시집인 ‘선시집’(1955) 수록작 ‘센티멘탈 저니’에서도 엿보인다. 54년 월간 ‘신태양’에 발표 당시 ‘수영(洙暎)에게’라는 부제가 있었으나 시집에서 빠진 사실이 이번에 확인된 것이다. 전집을 일괄하자면 탈식민지를 지향하거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전쟁의 고통을 내면화한 작품이 지배적이다. 55년 미국 여행 때 쓴 시편들에선 반미(反美)의식까지 드러낸다. 박시인은 “모든 자본이 붕괴한 다음/태풍처럼 너희들을 휩쓸어갈/위험성이/태풍처럼 가까워진다”(‘자본가에게’) “착각이 만든 네온의 거리”(‘충혈된 눈동자’) “아메리카는 링컨의 나라로 알았건만/쓴 눈물을 흘리며/브라보… 코리안 하고/흑인은 술을 마신다”(‘어느 날’)라고 읊었다. 그는 “이 이국의 땅에선 나는 하나의 미생물이다”(‘새벽 한 시의 시’)라며 급기야 “굿바이”(‘투명한 버라이어티’)라고 했다. -시대의 아픔 노래한 작품 주류- 시 해설을 쓴 박현수 교수(경북대)에 따르면 박인환이 해방공간에 쓴 작품에는 강렬한 비판정신에 기반을 둔 긍정적 미래전망이 깔려 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암울한 시선으로 전망의 부재와 시대적 모멸감을 노래했다. 박교수는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얻은 통찰을 그에 맞는 수사학으로 정직하게 그려준 1950년대의 유일한 시인”이라고 밝혔다. 산문 해설을 쓴 방민호 교수(서울대)는 “새로 발견·정리된 시와 산문들의 총목록에 비춰보면 박인환에 대한 기존 평가는 너무 인색하다”면서 “박인환은 다면적 문화 비평가이자 문명 비평가”라고 했다. 박인환은 49년 경향신문사에 입사, 51년 경향신문이 대구에서 전선판 신문을 낼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52년 퇴사했다. 새로 발굴된 ‘1950년의 만가’도 경향신문 1950년 5월16일자에 실렸던 작품이다. 한국전쟁 발발 한달여 전에 전쟁과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하다. “불안한 언덕 위에로/나는 바람에 날려간다/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나는 죽어간다/이 행복에서 차단된/지폐처럼 더럽힌 여름의 호반/석양처럼 타올랐던 나의 욕망과/예절 있는 숙녀들은 어데로 갔나/불안한 언덕에서/나는 음영처럼 쓰러져간다/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나는 죽어간다/지금은 망각의 시간/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아름다운 연대(年代)를 회상하면서/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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