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06-08-25 15:03]
[한겨레] “H씨, H씨는 왜 느닷없이 내게 그런 편지를 보낸 거냐고 꾸중 조로 저에게 말했지만
그냥 그것은 연상 작용처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냥 어느 날 저녁 H씨가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 지난주 내내 제 방은
태풍의 전조들이 보였지요.(…)저의 경우 열정과 정염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겸연쩍어 속에 담고 있기에 너무도 불편합니다. 제 몸에 난 마개들을
열고 터져 나올 듯합니다. 장난이라니요, 제가 왜 H씨를 상대로 장난을 하겠습니까.”
소설가 하성란씨는 200X년 X월 X일
‘H(에이치)’라는 이니셜을 지닌 이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에이치’는 지난 3년 동안 띄엄띄엄 만났던 사람. 그러나 상대방은 달랑 넉
줄짜리 냉랭한 답장에서 “장난을 친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 꾸짖는 어조로 벽을 쌓는다. 거기에도 굴하지 않고 하성란씨는 다시 문을 두드린다.
“토요일 한 시. 창덕궁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소설가 김다은(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씨가 엮은 <작가들의
연애편지>에는 시인·소설가·극작가 27명이 쓴 연애편지가 실려 있다. 작고한 소설가 김동리를 제하면 모두 현역 문인들이다. 김다은씨는
문인들의 연애편지를 문학작품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책에 실린 문인들의 편지를 모으는 동안 <이상한 연애편지>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직접 쓰기도 했다.
하성란씨의 연애편지는 조용하고 음전해 보이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이고 격정적이다.
그러나 그런 ‘변신’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결과는 다시 실망이었다. ‘에이치’는 토요일 오후 한 시 창덕궁에 나타나지 않았고, 사랑을 거절당한
여인은 무리 속에 섞여 홀로 궁 안을 거닐다 돌아온다. 두 번째 편지의 말미에는 후일담 같은 추신이 덧붙여졌다: “H씨, 나와주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돌풍이었을까요. 언젠가는 H씨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사드릴 날이 올 겁니다. 댁내 평안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엄마를 닮은
H씨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소설가 박상우씨는 열다섯 중학생으로서 스물셋 여선생님에게 보낸 생애 첫 연애편지에 얽힌 추억을 또
하나의 편지에서 털어놓는다. 소설가 함정임씨는 생의 힘든 겨울에 오래된 이성친구 ‘J(제이)’에게 받은 편지와 그에 대한 답장을 함께 공개했다.
시인 정끝별씨는 1988년 제야에 받은 ‘Y(와이)’의 편지를 내놓았다. 젊은이 특유의 방황과 모색을 보여주는 그 편지의 말미는 이러하다.
“저는 지금 그저 미지의 길을 마악 접어든 신출내기의 심정으로 하염없이 멀기만 하게 보이는 능선, 그 능선 너머로 빛나는 별을 찾아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상당수는 실패한 연애를 증거하고 있지만, 연애에 성공하고 결혼에까지 이른 커플들의 편지도 있다. 극작가
장성희씨와 시인 반칠환씨는 결혼 10주년을 맞아 편지를 주고받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당신을 신이 내게 주신 최상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당신과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것은 내 인생에서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아내의 고백에 남편이 쑥스럽다는 듯
화답한다. “두 그루 나무처럼 나란히 바람에 흔들리며 넉넉한 그늘 한 자락 드리워보세. 십 년 세월과 함께 그대 한 번 꼭 안아드리고 싶네.”
시인 박제천, 박형준, 이홍섭, 이승하, 이재무, 정해종씨와 소설가 송하춘, 김훈, 서영은씨 등이 추억의 서랍 속에 꼭꼭 숨겨
놓았던 묵은 연애편지를 꺼내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