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길이 떠올랐다
1
어떤 나이든 여자는 자신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젊은날의 사진을 골라 버젓이 실어놓았다. 그리하여 기인 생머리칼 자락이, 그녀의 한가로운 閑談集 안에서 물비린내를 훔씬 풍기며 출렁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그 나이든 여자의, 과거의 상반신에 대하여(탱탱한 유방 근처와......) 그리고 그녀의 현재의 저의(?)에 대하여, 상당한 의혹과 유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2
어머니는 한땀 한땀 힘들게 바늘귀를 놀렸다. 당신의 그런 집착과 망아의 시간 곁에서, 나는 곧잘 실패라거나 골무 등속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은(귀머거리와도 같았던!), 어쩌면 온통 회색의 색감이었다.
어머니는 손바닥만씩한 헝겊을 덧대어, 상보라거나 책보 같은 걸 기워놓곤 하였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힘들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얘야, 나는 내 안팎의 상처를 깊곤 했구나.)
3
마음의 실꾸리에 감긴 좌절을 재료삼아 그렇게 자신을 기웠노라던 한 여자(어머니). 내게도 문득 흰 길이 하나 떠올랐다(흐릿한 길......), 혹시 그 여자들은(늙은 여류 한담가와 어머니), 제각기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옛날 사진 한닢과 손바닥만씩한 헝겊조각들 속에서, 어느 여름날의(사무치게 은성했던 날의) 숲길 앞에 이르는, 푸르름의 길모서리 하나씩을 글썽한 눈매로 떠올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게도 오랜 전의 먼길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 가뭇한 유년의 강둑(- 강변)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 하나. 이제 막 맨발의 푸른 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희미한 배경 속에서, 마치도 생시처럼 아프게 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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