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房(문학외일반)

솔아 솔아…’ 시인 박영근씨 별세

길가다/언젠가는 2006. 5. 13. 01:35
[부고]‘솔아 솔아…’ 시인 박영근씨 별세

[동아일보 2006.05.12 03:01:32]

[동아일보]운동권 애창곡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시 ‘백제’를 쓴 시인 박영근(사진) 씨가 11일 오후 서울백병원에서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별세했다. 향년 48세. 고인은 고교 중퇴 후 상경해 노동자로 일하다가 1981년 ‘반시(反詩)’ 6집으로 등단했다. 첫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 불린 그는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저 꽃이 불편하다’ 등을 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이사 등을 역임했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8시. 02-590-2557"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길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2003년 <유심> 여름호' 에 수록

 

 박영근 ▷ 철거민 1 최종수정 : 2004-01-11 03:46:11  


어디일까, 주저앉은 신음소리를 밟고
잦아드는 망치소리를 따라
해가 기울고 판잣더미들 흔들며
캄캄하게 바람이 멱살을 잡는 곳.
알 수가 없네, 한길 건너 번지는 아파트 환한 불빛들 곁에
매달려 떨고 있는 깜부기 같은 얼굴들
구둣발 같은 것들이 무심히 밟고 갈 때
언제부턴가 작은 불길들이 오르고 밤을 따라
깊어갈수록 모여드는 사람들
알 수가 없네.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사시장철 어디서나
불던 바람 아니던가 한숨일랑 걷어차고
갈퀴손에 횃불 들고 어서어서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쏟아질 듯 잔별들도
찬 바람에 떨다가 먹장구름 속에 숨는 밤
밝은 하늘 너른 땅이 눈 앞에 넘실 가슴에 뭉클
눈물 짓는 사람들아 이 밤이 새고 해 솟으면
남는 것은 이름 석자 서슬 같은 인심일세
비켜서는 걸음걸음 반평생 어둡던 빛
큰 삽날로 베어내고 어서어서 집을 짓세

망치소리 치맛자락 속에 기어드는
아기 울음소리 밤새 솟아오른 하꼬방 위에
쇠망치소리 열두 살 순이 허기진 손바닥 위에
구호품 떨어지는 소리 잊혀질 것인가
김씨 요장육부에 화주 타는 소리

가자, 가자 또 어느 언덕받이 어두운
빗줄기 속에서 남쪽하늘을 바라볼 것인가
계고장 움켜쥐고 손이라도
흔들 것인가, 정이월 눈보라 건너
이 거리 저 바닥에
철없이 봄빛 쏟아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