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현대문학> 신인상 당선작
앨리스네 집 / 황성희
일렁이는 수면 위로 밤하늘이 비친다.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다가온다.
놀란 그림자들이 몸 밖을 뛰쳐나간다.
물고기 한 마리가 도시락을 들고 종종걸음을 칠 때의 풍경이다.
집들은 눈을 감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아무 질문도 하지 못한 지 수천 년.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지 수천 년.
헤엄을 치는 물고기는 자신이 물고기임을 의심치 않는다.
회색의 뻣뻣한 전봇대를 끼고 돈다.
교묘한 속임수처럼 전선이 뻗어 있다.
수면 위로 어머니가 몸을 수그리신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 숨을 죽인다.
비늘을 떼어줄 테니 그만 물 밖으로 나오너라.
놀란 물고기는 아가미를 벌렁거린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은
오늘도 멀기만 한데
물고기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고
시계 속에는 시계 바늘이 없다.
그냥 평범한 드라이브
강철로 된 새가 하늘을 나른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단물이 빠진 시간을 뱉는다.
당신과 나.
우리는 드라이브중이다.
오늘을 마친 태양이 하늘 밖으로 흘러내린다.
당신과 나.
우리는 드라이브중인데
우리는 아무도 운전하지 않고
우리는 둘 모두 운전을 하며
신원미상의 고속도로를 규정속도로 달린다.
도로가의 기린들이 하나 둘
백색 제 머리를 둥글게 부풀린다.
새로 깐 시간의 알몸에서는 딸기향이 난다.
당신은 풍선 터지는 소리를 성가셔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속도로 위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는 고속도로 위에서
당신의 빈 몸을 타고 달리는 내가
나의 빈 몸을 타고 달리는 당신이
풍선이라도 불지 않으면 역사퀴즈라도 주고받으란 말인가.
이 드라이브의 기원 같은 뭐 그런.
오, 제발.
그냥 풍선이나 터뜨리시지.
날마다 시시각각 임종
나는 변기위에 앉아 있다.
바닥에는 몇 개의 내가 쓰러져 있다.
지금의 내가 몇 번째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흰색의 이 양변기도 벌써 여러 번 숨을 거뒀다.
휴지를 뜯는 내 손이 휴지걸이에서 대롱거리는데
항문을 닦는 내 손이 물을 튀기며 변기 속으로 떨어진다.
시간의 파도는 일요일에도 쉬지 않는다.
똥 냄새 진동하는 화장실에도 예외는 없다.
변기 위로 내려앉던 내 엉덩이가 저만치서 떠내려온다.
항문에 똥을 끼운 내 엉덩이가 저만치로 떠내려간다.
한가득 물을 머금고 똥을 삼키던 변기 하나가
이제 막 일어서는 내 발 밑으로 또 쓰러진다.
벗겨지는 발목을 뒤로하고 나는 거실로 오른다.
복면의 시간이 범람한 집.
수시로 익사하는 시신을 한 겹씩 벗겨내며
시간의 수면 위로 겨우 코를 내밀어본다.
창문 밖으로
우리 같이 안 갈래?같이?
둥둥 뜬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만 놀고 집으로 와!
둥둥 뜬 엄마들의 고함소리도 들린다.
오늘 뉴스에서는 정말로 죽은 사람들의 소식이 분명 나오겠지만.
후레자식의 꿈
어머니가 죽었다. 참 잘 죽었다고 해본다. 나보고 미쳤다고 한다. 어머니가 죽었다. 참 잘도 죽었다고 해본다. 이번에는 나의 뺨을 후려갈긴다. 어떤 어머니가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나 같은 후레자식과는 놀지 말라고 한다. 내가 그 어머니의 자식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아예 상종을 말라고 한다. 어머니가 죽었다의 죽었다는 지우개에 얼굴이 지워지는 봉변을 당한다. 그래놓고는 어디서 단정한 돌아가셨다 한 마리를 데려와 어머니가 옆에 세워놓는다. 어머니가 죽었다의 어머니가 지우개 가루를 질색하는 것도 모르면서 어머니가 죽었다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로 바꿔놓고 박수를 친다. 사라진 글자들의 비명은 알지도 못하면서 박수를 치다 말곤 큰일날 뻔했다는 얼굴로 어머니가의 가를 싹싹 지우고 께서로 고쳐쓴다. 나는 지우개 가루를 온몸에 묻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정말 잘 돌아가셨다고 해본다. 이번에는 나를 자빠뜨리고 돌아가며 발길질을 한다. 어머니께서 왜 잘 돌아가셨는지, 왜 돌아가셔야만 하는지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물어볼 것도 아니면서, 이번에는 나를 발가벗기고 인두를 달군다. 그래도 소용없다. 어머니께서는 잘 돌아가셨다. 이 어머니, 저 어머니, 그 어머니 등등 어머니들께서는 제발 잘 돌아가셨다. 제발 잘 돌아가셔야 한다. 아, 살이 타는 이 냄새가 정말 꿈이 아니라면, 인두를 들이대는 저 손이 정말이지 내 손이 아니라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 제발 잘 돌아가신 어머니.
탤런트 C의 얼굴 변천사
사이렌이 울린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막 넘어섰다. 탤런트 C는 성형수술한 것이 틀림없다. 백색 화환을 공손이 받쳐든 의장대 뒤를 대통령과 영부인이 뒤따른다. 소복을 입고 가슴에 검은 명찰을 단 쪽을 진 여인의 얼굴도 얼핏 뵌다. 나는 물론 그녀를 모른다. 탤런트 C는 턱을 깎았다. 분명하다.
사이렌이 울린다. 나는 묵념을 하지 않는다. 탤런트 C는 광대뼈도 깎았다. 남편은 내가 그녀를 질투한 나머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하지만 나는 탤런트 C가 출연한 드라마를 데뷔작부터 전부 알고 있다. 그녀는 분명 변했다.
45년도에 광복을 맞았는데 어떻게 48주년 현충일이라는 건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현충일과 광복절을 혼동했음을 깨닫는다. 탤런트 C의 공백은 정확히 1년 2개월. 안면 윤곽술의 경우 회복기간이 오래 걸린다더니. 오늘은 샌드위치 휴일. 부기는 거의 빠졌지만 그녀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아.......... 알려줘야 하는데. 원래 어떻게 생겼었는지. 탤런트 C 말이다. 적어도 남편에게는 증명해야 하는데. 그녀를 시샘해 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지금 중계되는 현충일 기념식보다도 더 생생한 사실이란 걸, 탤런트 C의 얼굴 변천사 말이다. 알려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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