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다흘린흰소리

가벼워서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길가다/언젠가는 2014. 11. 2. 13:28

 

[백련사 가는 길/10월 30일]

 

가벼워서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10여 년 전, 도시 생활의 무거움에 못 이겨, 한 발이라도 더 담그면 폭발이라도 해 공중분해가 될 것 같은 버거움에 시달리다, 담았던 무주의 산골 마을은 나의 고향이 돼 있었다, 산과 함께 일꾼으로 살겠다고 작정하는 날부터, 산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는 산을 보듬고 살았다,

 

주변 동네 팔십 고개를 앞둔 이석중, 안태주 아재와 더불어 때로는 형이라 부르며 산등에서 계절을 보냈던 유지남, 유재식 엄경수, 이덕승 형...그리고 거반 육십 줄이 넘어도, 곧 죽어도 처녀이길 고집하던 순득, 연순, 정숙, 귀녀, 영아, 명식, 금이, 정분 언니들도, 동이 트기 전, 어둠을 헤치며 예초기를 들쳐메고 산등선을 오르락거리며 한 여름 어린나무가꾸기 사업의 극한 노동을 함께했던, 생길, 인철, 현경, 철주, 인만, 용학...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또한 일감을 만들어줬던 산림조합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봄이면 나무를 심고 여름이면 심었던 나무를 가꾸며 가을이면 칡넝쿨을 훑고 추계식재며 등산로를 정비했다, 겨울이면 모든 짐을 풀어놓고 가벼움으로 책이나 읽으면서 겨우살이를 했다, 이것이 나의 일 년이고 십 년의 되돌이표 세월이었다,

 

무주에 내려와 마땅히 하릴없이 보냈던 몇 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망해본께 알겠더라, 쫄딱 망해본께 물맛이고 술맛이고 글맛이고 사람냄새 조금 더 알겠더라, 바닥 냄새가 징하게도 좋더라“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랬다, 바닥을 치고나니 더는 내려갈 바닥은 없었다, 순수의 바닥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넓고 가벼운 감옥이다, 가벼움으로 펼쳐진 유리창 너머 온 산은 물들어 있다, 봄부터 채웠던 물기를 털어내니 이리 아름답게 펼쳐지는 풍경이다, 가벼움은 바닥으로 내려와 겨울 채비를 한다, 가벼움은 미학으로 다가와 가슴을 후비고 있다, 무거웠던 도시의 독기는 시나브로 삭혀가고 있다,

 

며칠 전에는 백련사를 찾았다, 왕복 12킬로의 옆으로는 구천동 계곡이라 불리는 물줄기가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성급한 나무는 가벼운 몸으로 가느다란 가지의 물기까지 내리고 있었다, 쓸쓸함마저 감돌았다, 나 또한 일 년의 노동도 마쳐가는 끝물인지라 며칠 남은 가을의 가벼움이 한결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10월의 마지막 날, 어제는 비가 왔다, 올 가을이 시작 될 무렵 뭣엔가 무거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애지중지 키웠던 자식들을 여위듯 털어버리고 싶었다,바로 詩였다, 한 번 쯤은 방점을 찍고 가야할 것 같은 미련은 가시지 않았다, 삼 년 전에 찾아왔던 몹쓸 병도 어지간히 잡혀가는 것 같아 작정을 하고 투고를 했다,

전화가 왔다, 시와사람사였다, 가을 내내 민주지산 등산로 작업에 정신 팔리다가 간간히 기다렸던 소식, 감회가 솟구쳤다, 감사했다, 그동안 키우고 주물렀던 나의 자식이 사생아가 되지 않고 출가할 수 있게 됐다니 좋았다, 무거웠던 짐이 한결 가벼워 졌다, 가벼움으로 알찬 또 다른 것을 꿸 수 있으면 좋겠다, 며칠 뒤면 마지막 가을식재를 하려한다, 가을걷이의 마지막 일이다, 이 일이 끝나면 가벼움은 더 할 것이다, 공기보다 더 가볍게 바닥을 기며 겨울을 보내고 싶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