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블로그 10005-산과들
굴참나무 술병/손택수
와인을 처음 마실 때 코르크 마개를 딸줄 몰라 애를 먹은 일이 있다
촌놈 주제에 아내 앞에서 분위기 좀 잡으려다 식은땀을 흘린,
그때 뽑다 만 코르크 마개가 저 굴참나무다
얼마나 단단히 박아놓았는지 지난밤 태풍도 끙끙 힘만 쓰다 지나갔다
뽑혀나가지 않으려 땅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버틴 나무들
살짝 들려 있는 뿌리를 따라 땅거죽도 얼마쯤 불쑥 잡아당겨져 있다
펑 따면 꽉 틀어막은 구멍 너머로 몇 백년 묵은 술 향기 같은 것이 올라올 것 같은데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 치는 시간을 대지는 향그러운 알코올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
온 들판이 버티는 나무뿌리의 술병이 되게 했던 것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나도 한 방울의 술이 되어 녹는 날이 올 테니
그때는 굴참나무 쪼록쪼록 술 익는 소리에 취해 천년을 더 기다려도 좋을 터
뿌리에 매달려 떠오를 듯 들썩이던 길과 잡아당기다 만 저 산봉우리와
엉덩이를 들었다 놓은 바위들이 이제 나의 벗이다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출생.
*경남대학 국문과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과 『목련전차』(창비, 2006)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이 있음.
*부산작가상, 현대시동인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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