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指紋)을 찍다
마경덕
기억에도 지문이 있다. 생각의 회로를 따라가면 코일처럼 친친 감겨있는 기억은 풀렸다가 되감긴다. 수없이 재생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면 소멸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처가 깊을수록 기억은 생생하게 재생된다. 기억의 첫 페이지에 새겨진 ‘통증’이라는 지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1. 나무의 지문
나이테는 계절이 한 바퀴 돌아나간 흔적. 나무는 몸을 빠져나간 계절을 기억하고 제 몸에 지문 하나를 둥글게 그려 넣었다. 목판 위를 흐르는 물결무늬가 물을 찾아 기어간 뿌리의 흔적이라면 옹이는 빛을 향해 팔을 뻗은 흔적이다. 갓난아기가 젖을 빨듯, 어린나무도 빛을 빨기 위해 허공을 더듬어 나간다. 평생 하늘을 우러러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나무는 허공을 짚으며 허리를 편다. 몇 벌의 그늘을 짓고 장문의 편지를 쓰는 사이 나무는 또 하나의 띠를 둘렀다.
일제히 소인을 찍고 있는 나무들,
봄부터 쓴 장문의 편지들이 쏟아진다
허공에 쓰는 저 간절한 필체들
해마다 발송되는 편지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
켜켜이 쌓인
주소불명, 수취거절, 수취인부재
미처 소인도 찍지 못한, 저 미납의 사연들
비파를 타던 그 사내
단물이 흐르는 목소리를 내 일기장으로 옮겨오곤 했다
그 소리를 만지며 사나흘 울었다
울음소리에 비파나무 귀는 파랗게 자라
그때 나를 찢고 다시 썼다
몸은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손끝이 스칠 때 비파나무 그늘도 가늘게 떨렸다
빗물에 젖은 열개의 손가락으로 그의 갈비뼈를 더듬고 싶었다
끈끈한 시간의 뒷면에 혀를 대면
그는 떨어진 우표처럼 기울어있다
우체국은
마감된 하루를 가지 끝에 내건다
어둑한 그늘 아래 시큼한 연애가 익어가고
비파를 켜듯, 그 사내를 연주하고 싶던
그 가을
건너간 마음이 수취인불명으로 걸어나온다
한 다발의 묵은 편지를 태우듯
노랗게 발등으로 떨어지는 기억을 털어내는
우체국 앞 나무들
키 큰 비파나무가 마지막 현을 퉁긴다
수없이 반송된 계절이 또 한 페이지 넘어간다
-「비파나무 그늘」전문
2. 물의 지문
돌멩이를 삼킨 호수는 제 상처를 기억한다. 오물오물 돌을 삼키는 호수의 입에 물주름이 퍼진다. 저 커다란 입안으로 하늘이 끌려오고 산이 딸려온다. 수면을 박차고 치솟는 해오라기도 스쳐가는 바람도 호수를 피해갈 수 없다. 지근거리(至近距離)로 접근시켜 사진을 찍어내는 놀라운 접사 기술은 모두 잡아당겨 제 품에 가두려는 습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 위에 적어놓은 것들은 쉽게 지워지게 마련, 출렁이는 물의 지문은 수시로 바뀐다.
3. 몸의 지문
열 개의 손끝에 소용돌이 같은 指紋이 있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싶었을까? 더는 갈 수없는 끝에 지문은 멈춰있다. 강물처럼 흐르고픈 기억이 지면에 찍히는 순간 나는 나를 증명하였다. 그뿐이랴. 눈(眼)에도 지문이 있다. 각막과 수정체 사이에 있는 홍채, 동공 주위에 있는 막이 수축과 이완을 통해 안구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한다. 카메라 조리개 역할을 하는 홍채는 두 종류의 민무늬근으로 홍채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 방사모양으로 퍼져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홍채, 그러니까 내 눈의 홍채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지문, 내 눈에 뛰어든 풍경을 기억한다. 넘치거나 모자랐던 풍경이 있었다. 눈을 부릅뜨거나 눈을 감아야 했다. 가슴에 새겨진 화인(火印)도 있었다. 가라앉았던 몸이 소용돌이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4. 울음이라는 지문
소란하던 나무가 고요하다. 나무 아래 매미가 죽어있다. 그 많은 소리를 풀어놓고 매미는 어디로 갔을까. 한동안 우듬지까지 울음이 오르내렸다. 참으로 간절한 기도였다. 한철 잠을 설친 느티나무가 모처럼 낮잠을 즐기고 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울음 떼가 찬바람이 불기도 전에 모두 내 귓속으로 뛰어들었다. 소리라는 파장이 내 달팽이관을 따라 돌고 있다.
소리도 흔적을 남긴다. 침대에 누우니 심전계는 심장의 활동전류를 그래프로 그려넣는다. 청진기를 들이대니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준다. 맥박이 뛰는 소리도 몸이 알려주는 ‘소리의 지문’. 새들은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개가 짖는 것, 개울이 물소리를 내는 것, 압력솥의 추가 소란하게 우는 것도 모두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사람들도 노래나, 울음으로 몸에 고인 소리를 털어낸다. 때로는 술의 힘을 빌려 몸에 쌓인 슬픔을 털어낸다. 지문이 깊을수록 귀가 따갑다.
추가 움직인다. 소리가 뜨겁다
달리는 기차처럼 숨이 가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추를 마구 흔든다. 지금 당장 말리지 않으면
머리를 들이받고 자폭할 기세다
저 맹렬한 힘은 무엇인가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신음이 고여 있는가 슬픔이 몸을 찢고 나온다
소리가 집 한 채를 끌고 달린다
밤기차를 타고 야반도주하는 여자처럼
속이 탄다. 부글부글
-「칙, 칙, 압력솥」전문
5. 바람의 지문
강을 건너는 수많은 바람을 보았다. 수면위에 찍히는 바람의 발, 눈부시게 빛나는 발이었다. 또 언젠가는 높이 뜬 가오리연의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새들의 날개를 붙잡고 가는 부드러운 바람과 풍차를 돌리던 바람의 힘찬 손도 보았다. 매개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몸을 드러내는 바람은 뜨거움과 차가움이 만나는 곳에서 태어난다. 열기에 달아오른 공기나 물이 부력의 힘으로 하늘을 오르다가 온도가 식어 무거워지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고 그때 바람은 만들어진다. 바람은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방을 쏘다닌다. 너울너울 밀려드는 지루한 바람의 행보를 다 받아 적던 강이 노을에 젖고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람, 멈추는 순간 바람은 잊혀진다. 바람의 지문은 수천 개, 꽃이 만개한 회화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허공에 희디흰 지문이 찍혔다.
5. 결
소리에도 높고 낮음이 있듯이 기억의 지문에도 결이 있다. 부드러운 결, 날카로운 결, 촘촘한 결, 듬성한 결, 마음이 시끄러우면 결이 서로 엉킨다. 모가 난 소리에 결이 흩어진다. 소리와 냄새로 남은 기억들, 몸은 흉터로 남은 그것들을 번번이 기억한다.
그날 이후 여자는 무덤에 들었다. 간과 쓸개를 빼준 여자, 깜깜한 무덤에 누워 생각했다. 그를 지우려고 스무 해를 온통 그에게 매달렸다. 이별은 늘 생생한 어제, 남자는 조각조각 찢어지고 이어졌다. 늙지 않는 추억의 힘으로,
여자가 부활했다. 수렁 같은 몸을 열고 벌떡 일어나 TV를 켜고, 꾸역꾸역 밥 먹고 화장하고,
누구? 누구야?… 간과 쓸개를 먹고 자란 남자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그날처럼 숨이 턱 멎었다……저, 저에요. 귀신같은 여자가 스무 살로 떨었다. 늙은 여자가 별안간 스물이었다. 누구? 수경이가 누구야?
딸깍!
그녀는 오래 전에 죽었다. 부활은 힘들어 보였다.
-「죽은 여자」전문
가슴에 찍힌 파문을 꺼내보니 오래 전 그때, 그녀는 죽었다. 수십 년 방치된 거친 마음결을 반죽한다. 열 개의 지문이 찍힌다. 딱딱했던 여자가 말랑해진다.
<문학세계> 2010. 9월호
[출처] ‘시와 에스프리’43 / 지문(指紋)을 찍다 |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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