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2010년 신춘문예 당선 시 모음

길가다/언젠가는 2010. 1. 12. 17:22

 <동아일보>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 유병록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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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검은 구두/ 김성태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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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직선의 방식 /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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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터가이스트*/ 성은주

 

하늘은 별을 출산해 놓고 천, 천, 히 잠드네

둥근 시간을 돌아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어 동구나무처럼 서 있다가 숨 찾아 우주를 떠돌던 시선은 나를 더듬기 시작하네 씽끗, 웃다 달아나 종이 인형과 가볍게 탭댄스를 추지

그들은 의자며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고 가끔, 열쇠를 집어삼켜 버리지 그럴 때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울곤 해 스스로 문이 열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릴 때 화장실 문은 물큰물큰 삐걱대며 겁을 주기도 해 과대망상은 공중으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리지 끊임없이 눈앞에서 주변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조였다 풀어져

골치 아픈 그들의 소행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광대를 찾아갔지 광대는 자신이 두꺼운 화장에 사육당하고 있다며 웃어야 할 시간에 울고 있었어

천장을 훑어 오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때론 엉성하게

그러다 접시가 입을 쩌억 벌렸어

누워있던 골목들 일제히 제 넋을 출렁였지

붙어있던 그들은 홀가분하게 나를 떠났어

온갖 소동 부리고 떠난 자리,

무성한 음모만 시끄럽게 남아있네


* Poltergeist: 불안정하게 소란을 피우는 영(靈)

 

성은주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한남대 대학원 문창과 재학 중

 

[심사평]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 문학적 역량 높이 평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 외 2편과 김아타의 '달로 날아가는 방' 외 5편이었다.

김아타의 시는 새로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체 실험실에서 나온 듯한 그의 의욕적인 작품들은 특이한 언어의 선택과 뒤틀린 배치, 엉뚱한 결합을 통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물론 평범한 문법을 거부하려는 신인의 자세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소통의 단절을 앞세우는 듯한 난해하고 모호한 문장들을 누가 읽어낼 수 있겠는가. 현란한 수사에의 도취는 자칫 시의 본질을 벗어난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쇄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내는 큰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는 이견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든든한 문학적 역량이 느껴졌고 신뢰가 깊이 갔던 작품이다. '폴터가이스트'는 불안을 형상화했다. 불안을 토로하는 것은 쉽지만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심이 묻어 있는 어눌하면서도 차분한 어조, 공포를 잠시 해소시키는 짧은 농담, 살얼음처럼 떨리는 섬세한 문체로, 불안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최승호. 문정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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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일보>

 

새의 낙관(落款)/ 정영희

 

새들에게 있어서

낙관이라는 습관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문신을 새긴 암벽마다 둥지가 되었고

뜨뜻한 아랫목이 되었으므로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부리를 비벼 족적을 남기는 일은

축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족적이란 새들의 풍향계였다가도 천적에게는

눈물일 수 있는 것

바닷가의 익룡 발자국 또한 그러했으리라

 

묵화 한 점 쳐 놓고 낙관을 해야 할 여백을 놓쳤다

자작나무 숲 물안개 사이로 새들이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루터기마다 태점(苔點)을 찍어놓은 듯 했다

부리는 날카로웠지만 발톱은 무뎠으니

새벽이 되도록 새들은 칠흑의 어둠을 방황해야 했다

 

돌아갈 곳 없는 묵화 속의 새들

강물에 먹물로나 풀어져 쪽배마냥 흘러가길 기다렸다

딱딱거리는 딱따구리는 한 칸짜리 초가집이 전부였으니

헛간이라도 한 곳 덧댔으면 좋으련만

이미 붓을 말끔히 빨아버린 뒤였다

 

한 무리의 새들이 화선지 밖으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잠시 흐름을 멈춘 강물 위에 낙관을 찍었다

 

푸드덕, 새들이 도처에서 솟구쳐 올랐다

 

심사평

 "깊이 있는 시적 사유ㆍ상상력 뛰어나"

 

스물네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일상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묘사가 주를 이루었으며, 서정적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들을 읽는 내내 시가 시인 까닭과 새로운 시인에게 기대하는 요건을 떠올려보곤 했다. 시가 여타의 산문과 변별되는 근본적인 지점은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적 긴장 혹은 시적 비약 등으로 일컬어지는 바일 것이다. 시는 언어적 숙련을 기반으로 하는 응집이고 맺힘이다. 그러기에 시의 언어는 팽팽하고 첨예하게 벼려져 있기 마련이다. 모든 시인에게도 마찬가지겠으나 특히 신인에게 기대하는 개성의 새로움과 깊이는 더욱 간절하다.

선자의 손에는 끝까지 네 분의 작품이 남았다. 먼저 이문정 씨의 '장수풍뎅이 우화기'외 5편은 장수풍뎅이, 옥수수, 포장마차, 조약돌 등 서정적 사물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탁월했다. 그러나 일상적 대상들이야말로 그 대상을 새롭게 조명해내는 발견의 시선 없이는 시적 울림을 주기 어렵다. 정수원 씨의 '일획' 외 3편은 서정적 통찰이 빛나는 시편들이었다. 특히 강(물)을 일(一)획의 글자에 비유하는 시적 발상은 신선하다. 그러나 이 두 축을 엮어가는 점착력과 역동성이 미흡했다. 시적 통찰에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초과하는 시적 애매성일 때 그 의미가 웅숭깊게 될 것이다. 강혜원 씨의 '재기 발랄 모퉁이 쇼'외 3편은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 가장 활달했다. 유머와 해학의 시선으로 일상을 포착해내는 솜씨가 경쾌했다.

정영희 씨의 '새의 낙관(落款)'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함께 응모된 다른 6편과의 시적 편차도 적을 뿐 아니라 시적 호흡과 상상력에 있어서도 그 음역(音域)이 넓은 편이어서 습작의 경륜을 짐작케 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물락거리는 시의 스케일이 넉넉하다. 묵화와 낙관과 여백을,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새벽과 새와 족적과 직조해가면서 시적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고 날렵하다. 이 한 편의 시가 새롭게 탄생한 시인에게 생의 '낙관'을 찍는 한 순간을 제공하였으니, 이제 "푸드득",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일은 시인의 남은 몫일 것이다.

-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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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먼지/ 김혜원

 

1. 무게

체중계를 꺼내려다

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

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

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가뿐한 내공

내가 눈금처럼 꼼꼼히

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

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

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

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

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

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

문득 마음 무겁다

 

2. 높이

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

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

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

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

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

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3. 길

차 안에 쌓이던 먼지

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

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

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

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

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

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

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

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

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

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

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

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

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

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 김혜원 :

1961 전주 출생,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2년 중퇴중앙대 일반대학원 사진학과 졸업, 현재 우석고 국어교사, 사진가, 우석대 경영행정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개인전 4회, 단체전 다수

 

[심사평] 관념적 소재 '견딤' 미학으로 이끌어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시 쓰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한다. 첫째는 광야에서 골리앗 장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던 시대의 공동과녁이 유체화된 데에다, 또 하나는 그 옛날 감히 다가서지 못했던 시 쓰기의 엄위한 비의(秘義)가 이곳저곳에서 그만 해킹되고 만 것이다. 이런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아무 고민 없는 사적(私的) 요설이다.

  이런 몇 가지를 상정하면서 조심스레 심사에 임했다. 807편을 상회하는 응모작 속에서 예심을 거쳐 우리에게 넘겨 온 작품들은 10명의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먼지> <신발 고르는 저녁> <호후(虎侯)> 등 세 편이었다. 이 세 작품은 어느 작품을 내세워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으리만치 수준이 가즈런하나, 규정에 따라 고심 끝에 <먼지>를 택하였다.

 

  <신발 고르는 저녁>은 세차원인 '쑤안'(이주여성)이 파장에 신발을 고르는 모습을 통해 그려낸 인간애가 눈물겹기만 한 작품이다. 그러나 심사자는 응모자를 바라봐야지 시 속의 '쑤안'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냉정 때문에, 그리고 화살이 빗나간 날들의 변두리에 박힐 때마다 손가락질이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녁으로 서보라는 <호후(虎侯)> 역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훌륭한 작품이나 아무래도 주제의 깊이에서 <먼지>에 밀릴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크다.

 

  당선작 <먼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세 편으로 나눈 일종의 연작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신춘문예 응모작으로는 대단히 모험적인 기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작품은 내적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하찮은 <먼지>는 화자 자신, 나아가 우리 인간존재의 등가물로서 내밀한 삶과 그 가치를 성찰하고 긍정코자 한 시도로 이해된다. '1. 무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먼지'처럼 버리고 비우며 가뿐하게 사는 소박한 모습을 통해 가진 자들의 욕망에 대한 반성을 꾀하였고 '2. 높이' 역시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은, 바로 내일이라는 희망에 물꼬를 대고 있다. 특히 "먼지도 세월을 견디며 높이를 갖는구나"라는 아포리즘적인 시행이 두 심사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였다. '3. 길'은 쌓였다가 깎였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먼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을 드러내려 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운율이 돋보인다.

  그리고 '방구석→차 안→허공→우주'로 확대되는 공간배치의 기법도 탁월하다. 자칫 관념으로 떨어지기 쉬운 소재를 끝내 작은 것들의 '견딤'의 미학으로 이끈 것은 오랜 동안의 습작의 뒷받침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시는 지천으로 흐드러지는데 정작 시인이 안보인다 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된다. 금번 최종심으로 넘어온 10명의 응모작들은 그 궁핍증을 덜어주는데 족히 일조가 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들강변으로 널려 있는 등단길을 외면한 채 연마에만 몰두해온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므로 낙심은 금물, 응모자 제위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는다.

/허소라(시인)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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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오르골/ 이 슬

 

나무의 뿌리들이 태엽을 감고 있는 시간

누군가 상자뚜껑을 열듯 소리를 쏟아내는 나무들의 춤

소리가 멎을 때까지 흔들리는 일에 한창이다

울긋불긋 어지러운 현기증을 다 털어낸 자리

나뭇가지를 뛰어 다니며 놀던 수액들은 모두 바람이 된다

앞뒤를 보여주며

숨기는 것 없다는 듯 보여주는 엽록의 투명한 연주가 길다

잎의 사이사이마다 음계가 반짝 거린다

 

새들이 앉았다 간 나무 밑 마다

불안한 노래가 가득 떨어져 있다

뿌리가 감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이다

칸칸의 어둠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들

가끔 잎을 털어내는 환한 시간이면 날아오르는 새들이 있다

 

가장 밝았던 한 때

꽃잎의 치어들을 다 허공에 날려 보내고

나무는 지금 푸르게 비어 있다

꽃의 그늘이 진 자리에 초록의 소리가 가득 하다

 

바람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 속

나이테를 돌아 풀어지는 태엽

평생 춤출 곡이 빙빙 돌아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푸른 치마를 입고 거꾸로 서서 흔들리는 듯

바람이 상자를 닫는 시간

음계들이 떨어진 나무 밑에는 그늘도 다 졌다

나선형의 나이테 그 길이만큼 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 심사평] 비범하고 감각적인 사유 … 신예 출현 기대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을 유심히 읽었다. 시적인 대상을 나름의 감각과 사유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나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았다. 단정하고 힘 있는 문장이 드물었고, 대개는 장황했다. 한 편의 시는 생략을 통해 되비추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불가피했다면 그것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임요희씨가 투고한 ‘포장’외 3편의 작품 가운데 ‘포장’을 주목해서 읽었다. “흰 천으로 싼다”는 이 ‘포장’의 의미는 꽤 중의적으로 읽혔다. 존재의 흔적을 없애는 행위, 혹은 철거라는 의미에 상당할 이 상징은 신선했다. 다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이 작품에 비해 미흡했다.

이문정씨의 ‘장수풍뎅이 우화기’외 5편은 시적인 대상을 내심(內心)으로 끌고 들어가는 인력(引力)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시한 서정의 내용이 대체로 평이했다.

박은영씨의 ‘검버섯’외 2편은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함께 경합을 벌인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 박씨의 작품은 가만가만 나아가는 시행의 보폭이 신뢰를 갖게 했다. 솔직했고, 과장이 적었다. 작품의 내용이 가계(家系)에 국한된 것들이어서 다른 작품들을 더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슬씨의 ‘모닥불이 달을 굽는다’외 3편은 첫눈에 들었다. 이슬씨의 작품은 부드럽지만 독특한 상상력을 선보여 위력적이었다. 시적인 대상을 둥글게 감싸는 빛 같은 게 느껴졌다. 대상을 그 외곽에서 한 번 더 감싸는 이 비범하고도 감각적인 사유는 대상에 대한 무궁한 사랑과 뛰어난 통시(洞視)에서 비롯된 것임에 분명하다.

시 쓰는 이로서의 미덕을 천생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 신예의 출현을 각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당부를 드린다. 당선을 축하한다.
 

‘新春’ 85년 사상 첫 여고생 당선 17세 천재 소녀시인 문단 강타
 
57년 전통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용인 동백고 이 슬양

 

매년 12월이되면 전국의 문학청년들은 ‘신춘문예 열병’을 앓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예비문인들이 밤을 새워가며 써내려간 원고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 가운데 201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서 만 17세의 여고생이 당선돼 화제다. 최근 국내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로서는 최연소 기록이다.

주인공은 용인 동백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이슬(사진) 양으로, 201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모닥불이 달을 굽는다’외 3편을 응모해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당선작은 ‘오르골’.
 

 `나무의 뿌리들이 태엽을 감고 있는 시간/누군가 상자뚜껑을 열듯 소리를 쏟아내는 나무들의 춤'으로 시작되는 `오르골'은 섬세한 관찰력과 음악을 듣는 듯힌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사를 맡은 문태준 시인은 “부드럽지만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인 위력적인 작품이었다”며 “대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뛰어난 통시(洞視)에서 비롯된 비범하고도 감각적인 사유가 번득인다”고 평했다.

지금까지 국내 일간지 신춘문예 최연소 당선 기록은 1938년 당시 18세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뽑힌 곽하신(89)옹이다. 입선과 가작을 포함하면 아동문학가 고(故) 윤석중(1911∼2003)씨가 14세의 나이로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가작 입선한 것이 최연소 기록이다. 최근에는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변기’로 당선된 당시 만 19세의 홍지현씨가 있다.

이밖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 황석영씨,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소설가 최인호씨 등이 대표적인 10대 등단 문인(文人)들로 알려져 있다.

이 양이 글 쓰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1학년때 부터. 중학교 때부터 지역문학회 활동에 열심인 엄마 송남순(44)씨를 따라다니며 문학과 친해진 이 양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인 글 쓰기를 시작했다. 이후 시쓰기의 매력에 푹빠진 이 양은 각종 백일장과 예술제 등에서 입상하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자기계발서 등 다양한 책 읽기를 좋아하고 사색을 즐긴다는 이 양은 “어디든 시선이 머무는 곳을 관찰해 소재거리를 찾는다”면서 “남들과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사물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게 내 시 쓰기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지금도 이 양은 지역 문학회에서 운영하는 시 창작교실에서 배우고 익히기를 반복하고 있다.

배용제 시인과 김종일 시인의 시를 즐겨 읽고 시 선생님이기도 한 박해람 시인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이 양은 “평범한 사물에서 다양한 빛깔의 감흥을 찾아내고 이를 나만의 화법으로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이 양은 이번 당선이 ‘등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만큼 학업에 열중해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시 당선소감] 당선의 무게 큰 성장통 될 것

 

각각의 사람과 사물에게는 그 고유한 시간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에게는 그 고유한 시간의 부피가 부족합니다.

또한 모든 관계에 사이가 있듯, 저는 저와의 시차를 확인하려 스스로 사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저 다운 것들과 멀리했던 그 사이를 오늘은 끌어당겨 다정하게 팔짱을 기고 싶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응모 결과가 또 다른 시차를 제게 던져 주는군요. 시차 부적응시에 두통과 초조함을 유발하듯 당선이라는 무게는 저에게 부담과 불안함을 유발했습니다. 이것이 성장통의 한 종류라면 꽤 괜찮기도 하고 꽤 잔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미팅을 주선하듯 시와 만나게 해 주시고 아직 어린 자질을 칭찬해주신, 그러나 여전히 무서운 박해람 선생님! 이제는 제 두려움도 다독거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늘 말씀하신 명분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 특히 엄마! 엄마와 함께 시를 공부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멀리 백일장에 갈 때 운전기사를 자처해주신 아빠! 자만하지 말라시던 그 말씀까지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동생들, 함께 공부하는 경운서당 학동님들.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용인문학 회원님들.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제가 읽었던 모든 시들과 부족한 시를 선택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마음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 한 광주일보사의 선택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쓰겠습니다. 잊지 못 할 새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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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일보>

제비꽃 향기/김 은 아

 

생선뼈만 남은 개 밥그릇에
개미가 아우성이다
시간이 지나자, 삶의 살을 뼈만 남긴 채
말라가는 빈 밥그릇에서
시간을 붙잡고 보시를 하는 중이다

한 때
거친 바다를 헤엄쳐
푸른 꿈을 키웠을 너
어쩌자고 사람들 입 속까지 들어와
피와 살이 되고 마침내 개 입에서
생을 마감하는 너에게서
제비꽃 향기가 난다

햇볕이 개 밥그릇을 헤집는데
생선뼈는 온 몸으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

비워라, 그릇

  

 심사평

'제비꽃향기' 이미지 전개 깔끔

 시적 성취도 높은 작품들 많아

 

  제22회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이 초등학교 6학년 학생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을 비롯하여 60대 나이에 이르기까지 무려 883편이었다. 지역적으로도 과거 광주·전남 위주였던데 비해 호남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강원도에서부터 서울, 경기, 충청,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분포를 보여줘 서울 중심의 신문에 뒤지지 않는 뜨거운 호응을 보여주었다.

 

  신문사 측에서 요구한 심사 규정은 우선 표절 여부와 기성 문인으로서 문단 활동을 하고 있는 응모작은 심사에서 제외해달라는 거였다. 설령 심사위원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당선되었더라도 후에 밝혀지면 당선을 취소하겠다는 뜻을 심사위원에게 강력하게 주지시켰다. 신문사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응모자의 정성과 노고를 생각하며 긴 시간 동안 심사에 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은 먼저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즉,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작품, 완성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습작, 탄식과 기도문 등 감정노출이 심한 작품, 수필 같은 산문과 시적 구별을 인식하지 못한 작품, 설익은 사회현실 비판, 이미지나 표현이 신선하지 못한 작품, 응모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작품, 그리고 자기만의 삶과 개성이 없이 미당이나 몇몇 유명 시인들, 특히 요즘 유행하는 젊은 시인들의 흉내나 냄새가 난 작품들이 그것이었다. 아울러 시가 지켜야 할 언어에의 경배심이 없이 함부로 언어를 다룬 작품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리하여 일단 걸러진 작품은 '송이도의 당산나무' 외 2편, '하모니카 소리' 외 5편, '폐화분(廢花盆)' 외 3편, '고추잠자리 길' 외 3편, '연탄' 외 2편, '하늘' 외 5편, '감나무 그림자' 외 3편, '제비꽃 향기' 외 3편, '헌책방 주인 고영감' 외 5편, '장미와 칸나 사이' 외 9편, '바람과 바람 사이' 외 3편, '계단을 끌고 다니는 여자' 외 7편, '살아있는 장례식' 외 3편, '아버지와 바다' 외 3편, '금강 슈퍼마켓' 외 4편이었다.

 

  이 중에서 다시 최종적으로 '폐화분(廢花盆)' 외 3편, '감나무 그림자' 외 3편, '바람과 바람 사이' 외 3편, '금강 슈퍼마켓' 외 4편, '아버지와 바다' 외 3편을 골랐다. 최종심에 오른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오랜 습작을 거친, 비록 한 두편 정도가 치열성이나 언어를 다루는 힘, 이미지의 조화라는 점에서 응모작의 일괄적인 균일성을 갖고 있지 못한 흠이 발견되었을지라도 당선작으로 뽑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적 성취도가 높은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래, 바로 이 작품이야!' 하고 추켜들 수 없는, 다소 머뭇거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소재나 이미지 전개나 묘사나 언어를 다루는 면에 이르기까지 과거 신춘문예 당선작 또는 내가 읽었던 기성 시인들의 몸짓이나 말투와 많이도 닮아 보인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컨대 소재 면에서 폐타이어나 버려진 냉장고를 떠올리게 한다거나 소시민의 등장 같은 것, 표현 면에서 산문 투의 남발이나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일부 젊은 시인들의 흉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 마침내 '제비꽃 향기' 외 3편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결정했다. 당선작인 '제비꽃 향기'는 우선 감정의 억제를 통한 이미지의 전개가 군더더기 설명이 없이 깔끔하다. 뿐만 아니라 '개 밥그릇'과 '개미'와 '햇볕'이 하나로 어우러져 '제비꽃 향기'를 뿜어내는 우주적 통찰력 또한 돋보인다. 특히 마지막 연인 '비워라, 그릇'은 이 작품의 시안(詩眼)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 같은 시인의 내적 통성 같아 든든하다. 물론 함께 응모한 다른 3편의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이 시인의 시적 역량을 믿을 수 있게 한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께는 격려를, 당선한 시인에게는 축하를 보내며 당선작에서 보여준 시적 긴장처럼 이제부터 험난한 시의 여정이 새로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긴장해주길 당부하고 싶다.

 

 -허형만 (시인·목포대 국문과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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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신문>

허氏의 구둣방

 

이미화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은

가난한 마을의 착한 지붕을 건너가면서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부터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이동전화기 판매점에 다니는 착한 처녀의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던 허氏의 남루한 저녁에

잠깐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에 맞춘 그의 굽은 등 뒤로

따각 따각 처녀의 발걸음이 이동전화기 전화 연결음으로 터진다

중심을 놓고 뒷굽을 맞춘 구두가 흔들린다

일용할 하루의 노동이 땀 내음 밴 구둣방을 넘보기도 하지만

늘 기우뚱 한쪽으로만 기우는 그의 세상에서

수선 중인 구두는

기운 없는 그의 한 쪽 무릎에서 완성되는 절망이 키운 꿈이다

다시 언제 그의 세상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구두 뒤축이나

밑창만으로 키워 놓은

환한 세상이 그에게선 자라고 있다

하나 둘 찾아와 박힌 별들의 뒷자리로 들던 그가

창문에 걸린 어둠을 후다닥 걷어내고

달빛 속에서 주춤거린다

볼이 넓고 우직한 신발 속 그의 한쪽 발이

나머지 발의 오늘을 타전한다 

 

 심사평

 

지난해보다 응모 작품은 줄었지만 작품 수준은 뛰어났다는 것이 올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의 중평이었다. 예심에서 본심으로 올려 보낸 작품 중에서 ‘오르골’ ‘몽골숙희’ ‘허씨의 구둣방’ 등 3편의 시를 최종심에 두고 심사자의 숙독과 토론이 있었다.

‘오르골’은 맑고 아름다운 시다. 시 속에서 오르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서정적 특성에 비해 주제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남들이 쉽게 공감하는 주제가 아니라 신춘문예 당선작이 가지는 독특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몽골숙희’는 다문화시대를 대변하는 개성 있는 주제의 시다. 그 시선도 건강하다. 그러나 시를 끌고 가는 변주가 평범하다. 평면적인 구성이 아닌 좀 더 입체적인 구성이 앞으로의 시 창작에도 필요할 것 같다.

‘허씨의 구둣방’을 두고 심사자 간의 이견이 컸다. 시를 두고 장시간의 토론도 있었다. ‘허씨의 구둣방’은 따뜻한 시고, 세상으로 보내는 시적인 메시지가 희망적이다. 그러나 시적인 긴장이 다소 늘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함께 투고한 시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사를 죄는 듯한 압축이 필요했다.

심사자들은 올 시 부문에 당선자 없음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의 기회가 돌아오는 신춘의 자리인 만큼 다른 시들에 비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허씨의 구둣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는 난산 심사 끝에 시인으로 출발하는 만큼 앞으로 경남신문 신춘문예가 배출한 한국 시단의 좋은 시인, 치열한 시인으로 빛나길 바란다. 본심에 오른 분들과 ‘하늘에 상현달이 뜬다’ ‘꽃무릇’ ‘보따리 판타지’ ‘장수풍뎅이 우화기’의 투고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정일근, 김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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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신문>

 

 구름의 화법/ 하기정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

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나를 만지려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줄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심사평

 

예심에서 걸러진 스무 명, 100여편의 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시의 미학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오르골' '살구알락나방 애벌레' '달의 족적' '몽골파오' 등을 응모한 네 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거듭 논의된 여러 응모작의 중심에서 줄곧 거론되었던 것은 '몽골파오' 외 10여 편을 함께 묶어 제출한 응모자의 시편이었다. 그의 응모 작품들은 그만큼 뛰어나 보였다. 그리하여 심사는 자연스럽게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속에서 당선작 한 편을 골라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의 응모작 중 어떤 작품은 말이 낭비되는 수다스러움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요즈음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읽히는 억지스러운 상상력이 살펴지지 않았다. 그의 시가 작위의 산물이 아니라, 가슴으로 익힌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는 개성적인 시의 문법뿐만 아니라 발견의 묘미도 함께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호명되는 낯익은 사물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새롭게 정돈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합의해낸 당선작은 '구름의 화법'이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일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섬세하게 살펴보면 언어적 소비에 대한 반감을 바탕에 깔아놓는 등 시인의 상상력이 사물의 운신과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이는 수사의 굴레마저 벗어버리려는 시인의 의지가 시적 자유를 온축(蘊蓄)해 보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의 공간 안에서 응고되기를 거부하는 이 미정형의 시선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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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박진규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누가 알았으랴, 그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문탠로드(Moontan Road)-대한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언덕에서 달빛의  기운을 받으며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2.2㎞의 산책로.

 

심사평

 

전체적으로 수준이 고르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부산경남 지역보다 오히려 타 지역에서 응모한 시가 훨씬 많았다. 신춘문예만큼은 더 이상 중앙과 지역을 구분해서 차별화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시는 모두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다만 언어적 기교나 시적 수사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느낌이 들어 신인으로서의 시적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좀 서투른 감이 있더라도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박눈', '탁구치는 자전거', '나무의 온도', '뭉게구름을 확장하다',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패턴화된 시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이미지가 육화된 개성 있는 시를 찾는 데 주력했다.

낡고 진부한 서정에 갇힌 시보다는 풍경과 일상을 응시하는 내적 깊이가 시정신의 심화를 불러오는 작품을 주목하였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삶의 깊이를 내면으로 응시하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미더웠다.

다만 응모 작품들 간에 시적 경향의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은 신인으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어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예비 시인들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 시와 더불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호승, 최영철, 하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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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문>

 

그녀의 골반 / 석류화

 

 1

 나비 꿈을 꾸고 엄마는 날 낳았다 흰 꿈, 엄마는 치마폭에 날 쓸어 담았다 커다란 모시나비, 손끝에 잡혔다가 분가루 묻어나갔다 날개 끝에 고인 몇 점 물방울무늬, 방문 밖으로 날았다 돌담에 피는 씀바귀꽃 그늘을 옮겨다녔다 나비 날개엔 먼지가 끼지 않았다 한 꿈, 계단 입구에서 두 날개 맞접고 오래 기도하고 있었다 환한 꿈, 나는 오래전 그녀의 골반을 통과한 나비였다.

 

 

 2

 초음파상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죠 그녀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보았던 그 나비, 그러니까 그녀의 꺼먼 엉덩이살 안에 나비 날개가 굳어 있었던 거죠 나는 잘 벌어지지 않는 날개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던 거죠 나도 작은 나비모양 엉덩이를 달고 나왔던 거죠 그러니까 그녀가 힘겹게 좌판에 쪼그리고 있었을 때, 날품팔이, 품앗이 할 때 그녀 속의 나비가 조금씩 앓고 있었던 거죠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

 

 석류화

▷1969년 경북 성주 출생.

▷대구 작가콜로퀴엄 수료.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졸업 예정

 

 ■ 심사평

 

 정확한 언어로 시상 엮어 나가는 솜씨에 신뢰

예심을 거쳐 올라온 25명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갈래였다. 안정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익숙한 문법의 작품들과 언어의 긴장이 돋보이는 패기 넘치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안정적인 작품들은 패기가 부족하기 쉽고, 언어의 섬세함이 시선을 사로잡는 낯선 문법의 작품들은 공허한 말놀음의 혐의를 넘어서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심사위원 두 사람이 각각 숙독하고 5편씩 고르니 겹친 한 작품을 포함해 9편의 작품이 다시 선별되었다. 논의 끝에 4편을 최종 후보로 골랐다. 권분자의 ‘여우비’ · 성은주의 ‘검은 고양이 카바레의 검은 고양이 신사’ · 김승훈의 ‘입술에 관한 새들의 보고서’ · 석류화의 ‘그녀의 골반’이 그것이다.

 

 권분자의 ‘여우비’는 삶에 대한 웅숭깊은 시선이 돋보였다. 언어 수련의 과정을 잘 거쳤음을 짐작게 하는 적절한 비유의 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산문적 발상이란 아쉬움을 남겼다. 성은주의 ‘검은 고양이 카바레의 검은 고양이 신사’는 시적 언어의 활달한 운용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의욕이 넘쳐 정작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이에 비해 김승훈의 ‘입술에 관한 새들의 보고서’는 언어 자체의 독특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실험적 작품이었다. 상상력의 참신함과 더불어 구조적인 완결성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신춘문예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영탄의 언어는 시의 진정성과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흠결을 드러냈다. 반면 석류화의 ‘그녀의 골반’은 핍진한 삶의 굴곡을 고루 살피는 성숙한 시선이 깃들여 있었다. 정확하고 곡진한 언어로 시상을 잔잔하게 엮어나가는 솜씨가 신뢰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투고한 작품들 모두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반면 젊은 패기가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같이 남겼다. 심사위원들은 탄탄한 사유구조와 시적 완성도라는 관점에서 석류화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합당한 행운을 차지한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송재학(시인)·엄원태(시인· 대구가톨릭대 교수)

 

 

 

 ■ 당선소감

 

 늘 불안한 나를 지켜준 가족에 감사

 

 때마침 주전자에 물이 끓고 있었습니다. 거세게 끓기 시작하며 김을 내뿜는 저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떨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등점! 그렇습니다. 나에겐 이 비등점에 오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늘 끓기 전에 멈춰버렸거나 식은 내 몸과 영혼을 달래며 다시 끓기 직전까지 올려놓는데도 오래 걸렸습니다. 돌아보면 반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괴로움이 비등점에 이르면, 무언가 다른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그곳을 바라보고만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곳을 향하여 늘 심지를 달궈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고 소외된 것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나를 보았습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얘기를 가장 필요없고 사소한 것에 걸어서 얘기하는 방법을 모색해보았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불가능에 대해 무릎 꿇었습니다. 오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모든 게 시와 귀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시를 썼지만 아직도 쓰지 못한 한 줄을 위해서 앞으로 살아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짧을 수밖에 없는 시 속에서 그 한 줄을 위해 나를 바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감각은 무디기만 합니다. 앞으로 많이 달라지지 않을 듯한 자신을 그래도 또 닦달하고 몰아붙일 것입니다.

 

 책상 머리맡에 붙어 나를 항상 바라보는 근취제신(近取諸身), 원취제물(遠取諸物), 이 말의 귀한 뜻을 깨우치게 해주신 계명대 문창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몸을 들여다보라는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늘 불안한 나를 애정으로 바라봐준 가족들과 선후배님들께도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부끄러운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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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일보>

 

차우차 /김진기

 

 

사자개 차우차우

긴 갈기를 바람에 빗질하며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칠장사 참배객의 발길이 어스름을 따라 사라지고

스님의 독경 소리 어둠에 몸을 누이면

티베트에서 온 차우차우

몰래 경내를 빠져 나가 칠현산에 오른다

바라보면 멀리 눈 덮인 고향이 보인다

달라이라마가 포탈라 궁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이후

그는 이곳으로 흘러왔다

호기심 어린 눈들이 발소리 지우면서 다가오면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듯

괜찮다 괜찮다 가벼이 꼬리 흔든다

꿈속에서나 만나는 그리운 히말라야 캄파라 패스를

이불처럼 두른 라싸 포탈라 궁

누가 구름 위에 백홍의 궁전을 지었나

돌아가는 마니차는 눈빛에 반짝이고 막 피어 올린 향내가

미로 같은 포탈라 경내를 적신다

얼어붙은 티베트 고원을 오체투지, 몇 달을 넘어온 장족이

다리를 질질 끌고 도착할 때마다

차우차우 맨발로 뛰어 나간다

고행을 먹고 사는 것인지

갈라터진 손바닥 무릎에서 흐르는 피, 내세의 제단에 올리면

신은 때때로 길을 비켜 준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먼저 왔는지

칠장사 차우차우가 도착하기 무섭게 라싸 차우차우들이 몰려나온다

부여잡고 얼굴 부비는 뭉클한 안부가 골목에 흥건하다

 

 

김진기

1937년 강원도 태백산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졸업

전 대한일보 기자, 춘천 문화방송 부장

현 태림인더스트리(주) 명예회장

 

  ■ 심사평

 경기·인천 지역의 유일한 신춘문예답게 예심을 거쳐 온 응모작들은 수준이 상당했다. 우선 자기만의 생각이나 체험을 시의 그릇에 얼마나 잘 담아내는가에 주목하며 정독에 들어갔다. 또 은유를 거친 삶의 육화라는 시의 본질적인 특성도 염두에 두었다. 이즈음 시단에 팽만한 시류 좇기나 손끝에서 만든 것 같은 작품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정독 후 고른 작품은 권대희의 '지팡이를 두드리는 부처님', 김진기의 '차우차우', 김태환의 '분필', 이영희의 '풍천장어', 이담정의 '사라진 상징'이었다. 다시 이들의 작품이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따져 나갔다. '지팡이를 두드리는 부처님'은 내용의 진정성을 평가받은 반면 뒤로 갈수록 처지는 완결성 부족과 작위성 등이 지적됐다. '분필'은 가장 많은 작품을 보낸 의욕적인 습작으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분필'의 호소력과 전달력이 두드러졌지만 잦은 반복으로 인한 이완과 직설적인 면이 거슬렸다. '풍천장어'는 신선한 발상과 언어 다루는 솜씨를 인정받은 데 반해 공소한 느낌과 어디서 본 듯한 상투성으로 내려놓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사라진 상징'과 '차우차우'를 놓고 논의를 거듭했다. '사라진 상징'은 무엇보다 발랄한 상상력에 언어 감각이나 비유 구사가 능했다. '사라진 상징', '주파수 이론'처럼 제목에서도 습작의 시간이 엿보였지만, 산문시 형태나 기법 등의 면에서 시류 혹은 기성 시인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낯익음이 지적됐다. 그와 달리 '차우차우'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서정적 울림이 돋보였다. 특히 라싸 '포탈라 궁'이라는 우리 시대의 한 정신적 극점을 현재의 구체적 장소에 겹치면서 성찰로 이끄는 힘이 빼어났다. 티벳에서 온 '차우차우'가 안성의 '칠현산'에 올라 '멀리 눈 덮인 고향'을 보는 모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고행을 통해 올라야 하는 어떤 가치나 세계를 환기하는 힘에도 신뢰가 갔다. 시 당선작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통해 도달해야 할 화해 같은 정신의 향기를 보여준다. 특히 칠장사가 임꺽정이 머물며 거듭난 절이라는 점에서 '티베트에서 온 차우차우'의 발견과 각성은 더 깊은 여운을 지닌다. 당선을 축하하며, 부디 새로운 진경 열어가기를 바란다.

             -정수자, 정호승

 

 ■ 당선소감

 

 일요일 아침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좀처럼 흥분을 모르던 내 단단한 노하우가 맥없이 빗장을 풀고 말았다.

 

 "감사 합니다."

 

 남들은 "그 나이에 무슨 시 공부냐? 편히 지내지"하며 핀잔 반 충고 반 던지곤 했다. 그러나 아득한 꿈은 나를 지금에야 불러냈다. 대학에서 4년간 국문학 공부를 한 나는 배고픈 시인의 길을 버리고 현실을 좇아 취업을 택했다. 3년 전 다시 여유를 찾아 시에 매달리게 된 것은 4년 동안 공부한 문학의 애착이 아까워서였다. 나는 국문학 중에서도 특히 시가 좋았다.

 

 그러나 시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이 쪽은 결코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복병, 선수마다 꺼내든 무기가 달랐다. 같은 말을 표현하는데 표현하는 방법이 신출귀몰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수없이 망설였다. 아직도 정확한 길은 모른다. 남들이 하루 5시간을 자면 나는 4시간을 자야 하고 남들이 하루에 시 10편을 읽으면 나는 15편을 읽어야 한다. 나는 지금에 머무르지 않겠다. 뒤 돌아보지 않겠다.

 

기축년 한해는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인생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나를 기특하게 보신 것 같다. 태백산 검용 소물이 흘러 한강의 젖줄이 되듯 내 고향의 맑은 마음도 시처럼 흐를 것이다. 항상 내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면 조건 없이 도와준 인간미 풍기는 여러 선생님들의 정이 생각난다. 그리고 객지에서 동분서주하는 내 아내와 중국의 큰 아들 내외와 손자 동주, 싱글 의 둘째 아들 모두와 기쁨을 나누고 싶다. 특히 미숙한 내 글을 뽑아 불씨를 당겨 준 경인일보 관계자와 심사 위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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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모른다고 하였다/ 권지현

 

우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권지현

▲1968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성장함

▲국민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9년 ‘김수영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현재 국민대학교 강사

 

 

 ■ 심사평/ 유종호, 신경림

 좋은 작품이 여러 편 눈에 띄었다.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는 담담하고 소박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담담하고 소박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공항 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 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갈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처럼 평이한 일상 속에서 삶의 결을 찾아내는 눈은 결코 예사로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를 가지고 무슨 엄청난 것을 해보겠 다는 허영심이 억지와 무리로 이어지면서 읽기 어려운 시가 범람하는 우리 시단을 향하여 던지는 새로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낡지 않은 서정성과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주말부부의 쓸쓸한 삶의 단면을 그린 ‘냉동실’이며 박물관을 통하여 과거와 오늘을 대비시킨 ‘플래시’도 이 작자의 저력이 탄탄함을 말 해준다.

 

 고민교의 ‘어느 결혼이민자를 향한 노래’는 아주 재미있고 따뜻하면서, 시의에 맞는 주제이기도 하다. 쉽게 융합할 수 없는 둘 사이를 가래추자에 비유한 것도 적절하고, 간절한 마지막 구절도 강한 울림을 준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시는 역시 시의 특성을 버릴 수 없으며, 시가 산문의 상태를 그리워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

 

 신은유의 시 가운데서는 ‘고딕식 첨탑’이 가장 좋았다. 좀더 난삽한 ‘바닥만 보면서 걷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도 마찬가지이지만, 깊은 사유와 고뇌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읽으면서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하지만 너무 말이 많고 어지럽다. 말을 고르고 빼는 보다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면 참으로 좋은 시를 쓸 사람으로 생각된다.

 

 이상 세 사람의 시를 놓고 토의한 끝에 선자들은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 당선소감

 하이데거는 시의 본질을 구명하는 자리에서 ‘시는 존재의 개명(開明)’이라고 말했습니다. 완성된 시작품 자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시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존재를 개명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삶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에서 시 쓰기는 제 생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주물을 부어주고 숨결을 들어앉혀 생동감 넘치는 세계들을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보내고자 합니다. 그 세계 속으로 초대된 사물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 다른 마음결로 싱그러워지기까지 저는 나폴대며 떠가는 민들레 씨앗에 가볍게 얹혀 날아오르다가도 시원한 장대비 따라 두 발 철벅이며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리곤 어디쯤에선가 튼실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단지 절반만 그 자신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의 표현이라고 에머슨은 ‘시인’에서 이른 바 있습니다. 작품을 쓰기 전에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작품 속에서 다시금 새롭게 자신의 생을 구체화해야 함을 이른 말이라 생각됩니다.

 

 문학의 길을 가르쳐주신 스승 신대철 선생님께 큰 절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 박성우 시인과 딸내미 규연양, 언니와 동생 가족들,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 국민대 학우들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양 김용택 안도현 선생님을 비롯한 전주 쪽 응원부대 여러분, 참 고맙습니다.

 

 저에게 큰 기회를 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더 넓은 문학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에 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