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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진규의 시론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1,2,3)

길가다/언젠가는 2008. 11. 17. 21:00

정진규의 시론(35)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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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한 달 동안을 내내 송찬호의 시들에 시달려 왔다. 내가 그의 시를 처음 대하기는 평론가 이남호의 귀띔에 의해서였는데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외 2편의 시들을 대하는 순간부터 그 <시달림>에 대한 예감이 나를 깊게 흔들었고 그것은 과연 적중했다. 많은 시간이 그에게 바쳐졌고, 마침내 충청도 보은 땅에 하나의 <말의 감옥>을 짓고 들앉아 있는 그를 찾아내기에 이르렀으며, 그를 10여 편의 작품과 함께 서울로 불러올리기까지 했다.
나는 한 잡지 편집자의 사무적인 태도 이상을 그에게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도 그 냉엄함이 조작된 것이라는 걸 그는 눈치챘을 것이다. 이미 그에 대한 <시달림>이 꽤 깊게 진전된 상태에서 내가 그를 만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나는 그 때 그에 대한 그런 <시달림>을 떨쳐 버리려는 또 하나의 <시달림>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내 사적인 자유를 위해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사적인 자유에 머물 수 없게 하는 것이 송찬호의 시였다. 궁극적으로 그의 시는 그런 만남의 예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송찬호의 시가 내게 던진 이 <시달림>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나는 그렇게 시달려야 했던 것일까. 이를 밝히는 것이 곧 송찬호의 시에 접근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1.
내가 거듭 쓰고 있는 이 <시달림>이란 말은 그 본래의 뜻과 뉘앙스대로 부정적인 상태의 것이지만, 송찬호의 시에 대한 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음을 우선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한 고통의 양식으로 온 것이 틀림없으나 내면적인 하나의 섬광으로 나를 어지럽게 한 상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하나의 섬광, 그러나 그 빛의 정체가 좀체 쉽게 잡혀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표현들은 강도가 큰 것, 폭발적인 것, 유연성의 것, 조용한 움직임의 것, 잠재성의 것, 곡선적인 것, 나선의 것 등으로 어떻게 보면 매우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었으며, 어느 한쪽을 명료하게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시적 질서가 그의 시 전체를 통어하고 있었다. 그것의 발견과 확인이 나의 과제였다.
나는 그의 시를 거듭 읽는 동안에 그의 모든 조사적 기능이 어느 한 공간에 바쳐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곳을 그는 <말의 감옥>이라 부르고 있었으며, 그 곳을 <숨쉬기 부드런운 곳>, <둥근 곳>, <중심에 이르는 모든 길이 지워진 곳> 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나무를 포로로 잡고서
나무가 구조적인 척추동물임을 알았다
나무의 중심을 지워 없앤다
오, 놀라워라 나무가 둥글어진다

말 속에 이런 둥글고 넓은 감옥이 숨겨 있었다니
말의 감옥은 얼마나 숨쉬기 부드러운가

말을 감옥 밖에 놓아 두고
안으로 들어오면
외부의 말은 세계를 둥글게 감싸 감춰 버린다
중심에 이르는 모든 길을 지워 없애고
감옥은 더 큰 감옥에 폭넓게 갇혀 버린다

말에 포착된 것은 무엇이든 말은 감옥을 만든다
말은 상호간 대화를 한다
말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말을 할 때 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
말을 하여
우선 감옥을 만들라
말로부터의 자유는
중심을 무너뜨리고
그 중심으로부터 해체되어 나오는 길 뿐이다
-[공중적원 3] 전문

어떻게 <감옥>이 <자유>의 공간이 되는가. 그 <감옥>은 일상적인 의미의 감옥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것은 송찬호의 시에 잇어 초월적인 한 공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나무>라는 말에 이르는 모든 길- 일상적인 모든 것, 지시적인 모든 것, 가시적인 모든 것의 세계를 오히려 1차적인 의미의 감옥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모두 지워 없애고 그가 당도한 그의 <감옥>이 1차적인 의미의 감옥을 가두는 더 큰 힘의 감옥이 되고 있는 셈이다. (<감옥은 더 큰 감옥에 폭넓게 갇혀 버린다>) 그것을 그는 자유라 이름한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물론 기호화된 <말> 자체가 이미 오염된 것이며, 그 이전의 상태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일종의 원시주의, 또는 상징주의적 체계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정기가 조금도 부패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최초의 장소, 또는 그런 시간에 그는 크게 기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일상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그의 인식이 절대적인 가치의 것이냐 아니야의 문제는 또다른 시각에 의해 논의될 수 있겠으나, 대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보지 않고 이와 같이 가변적인 것, 또는 개혁적인 것으로 투시하는 부정정신이 상징주의적 범주로만 묶여질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 이러한 부분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송찬호의 또다른 시에 또다른 각도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는 시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

 

정진규의 시론(36)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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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이러한 그의 부정정신의 맥락에서 행해지는 그의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시적 행위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궁극의 장소로 선택하고 있는 그 자유의 <감옥>과 함께 <구부리다>라는 동사와 <둥글다>라는 형용사를 자주 쓰고 있음이 그것이다.

a.
나무가 구조적인 척추동물임을 알았다
나무의 중심을 지워 없앤다
오, 놀라워라 나무가 둥글어진다

- [공중정원3]부분

b.
내 몸을 감는 수천 수만의 불의 고리들
어머니는 둥글다
어머니는 끊을 수 없다
-[ 어머니는 둥글다]부분

c.
고정된 자리에서 나무들은 운동을 한다
가지와 줄기를 뒤틀고 비틀어
비체계적으로 보이는 운동들,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를 구부려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정치적 낭만주의자들
-[공중정원2]부분

앞의 시들을 찬찬히 읽어 보면 <구부리다>라는 동사는 결국 그의 궁극인 자유의 <감옥>을 묘사하는 동의어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 <구부리다>라는 동사가 나오고 있기도 하지만 (c의 <구부려>), a의 <척추동물>, <중심을 지워 없앤다>, c의 <운동>, <뒤틀고 비틀어> 등이 모두 <구부리다>라는 동사적 속성을 수용하고 있는 말들이며, 그 행위 뒤에 나타나는 세계들이 곧 <둥글다>의 그것이다(a의 둥글어진다, b의 둥글다, c?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둥글다>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세계로 절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화의 인식은 역시 일상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부정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우리는 삶을 진행적인 <기다란 형상>, 직선적인 것으로 이해, 수용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당도해야 할 곳을 향해 걸어가는 <길>, 서로 다투어 달려가는 <마라톤>따위의 1차적인 상징 속에 삶을 관념적으로 가두어 왔다. 그러나 그는 그런 관념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이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하여, 어떤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설득 또는 억압해 온 그 획일적이고 표피적인 <길들여짐>으로부터의 해방을 그는 아름답게 획책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한 해방의 세계, 절대적인 세계는 둥근 이미지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그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세계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모든 것의 세계이지 어느 하나로 한정된 세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생명의 궁극으로 선택하고 잇는 그의 세계가 둥근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그의 그러한 총체적인 시각을 통해 우리도 함께 극복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둥글다>의 세계를 사물화할 경우 <태양>이나 <신>을 관행적으로 선택하기 마련인데 그는 그의 일련의 시들에서 <달빛>에 크게 기대고 있는 점이다.


어두운 밤 아이가 잠을 깨어 운다 그 때다
구름 뒤에서 달이 불쑥 고개를 내밀 듯
어미의 옷깃을 헤치고 출렁 솟아오르는 뭉실한 젖통
아이가 달빛을 빤다
달빛이 온 세상에 환히 퍼져 흐른다
어두운 밤길을 가던 사내가 갑작스런 달빛에 찔려 비틀거린다
달빛, 달빛, 칼빛

(중략)

밤길을 걷는다 옆구리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을 움켜쥐고
휘청거리며 걸어간 그 옛길을
달빛이 무뎌질 때까지 달빛을 밟으며 오늘밤도 그 길을 간다
- [달빛 밟으며]부분

<아이가 달빛을 빤다>에서 보듯 <달빛>을 그는 생명의 근원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그가 어머니를 둥글다로 정의한 대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여기서 발견한다.
달빛=어머니=생명의 등식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이는 우선 둥글다라는 형상적 이미지로 일체화되기도 하지만, 생명 배태의 실체인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와 달의 인력현상과의 어떤 관계를 우리는 여기서 암시받는다. 정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달의 운동현상과 여자의 달거리, 그 생리현상이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생명읜 근원 상징으로 말해지는 물,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현상이 달의 인력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은 과학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이 떠오르는 데 따라 밀물이 일어나고 그 달이 자오선을 지난 후 지게 되면 썰물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달이 지구의 반대편 자오선에 가까워짐에 따라 또 밀물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지식으로는 충분한 예증을 들 수가 없지만 그의 시 도처에서 조용히, 또는 폭력적으로 잡입. 출몰하고 있는 달빛 상상력은 그의 궁극적 세계인 둥글다, 또는 생명의 근원에 근거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진규의 시론(37)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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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에서 그의 <부정정신>은 단순히 원시주의, 또는 상징체계 속에 묶여지는 것만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시에서 이러함의 한 확산 형태를 또는 한 전형을 발견한다.

희망은 도처에 우글거린다 사제가 뚱뚱한 식당주인으로 보이고
그 식당의 밥찌끼를 핥으며
희망이 어떻게 사육되는가를 보았다

개새끼, 하고 대들어도 판사는 절망에게 희망을 선고하고
의사는 절망에게 희망의 진단서를 송부하고
긴 복도를 걸어오는 희망의 발자국 소리
문을 노크하는 희망의 인기척 소리
그 고문 기술자의 가방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이 들어 있던가

(중략)

이제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예비군복을 갖고 있다)
그 많은 산업예비군 중에서 내게 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오늘 전선으로 떠난다 아직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며
역 한구석에서 나는 오래 못 볼,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 한때 직업과 계급을 혼동해도 좋을 행복한 순간입니다.
- [희망]부분

앞의 시는 이번에 발표하는 아홉 편의 시들 가운데서 가장 강도가 큰 것에 속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을 크게 뛰어넘은 집단적 인식에 그 물줄기를 대고 있다. 앞 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희망>은 그가 판단하고 있는 바대로 <사육되고 있는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 구역>으로 그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안에 치열한 부정정신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제와 판사, 의사, 그리고 고문기술자들, 그 절대적 권위주의자들이 조작해 내는 희망들이 이 현실 속에 들끓고 있음을 그는 준열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구호화된 언어로서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깊게 우리 가슴에 와서 박힌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의 그 궁극적인 세계인 <구부리다>와 <둥글다>의 생명적인 세계를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아직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으며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것은 <구부리다>의 영원한 시적 행위이며 <둥글다>의 생명적 원형이다.
이렇게 어느 한 곳, 개인적인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집단적인 세계에도 가서 깊게 닿고 있는 그의 총체적인 시각은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까뮈가 그의 [여름]에서 고백한 바대로 <무엇인가를 제외시키기를 강요하는 것은 어느 것도 참되지 못한 것이다. 따로 분리된 아름다움이란 결국 찡그린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며, 고독한 정의는 결국 억압에 이르고 만다. 다른 것은 제외시키고, 봉사하고자 하는 자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도 봉사하지 못하고 결국은 이중으로 불의에 봉사하게 된다. 마침내 너무나도 뻣뻣해진 나머지 그 어느 것에도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모두가 다 아는 것이어서 시들하게만 여겨지며 그저 같은 것을 반복하여 다시 시작하느라고 인생을 다 보내게 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은 시인으로서, 부정정신의 소유자로서, 늘 초월을 꿈꾸는 자로 계속 지녀가야 할 시각임을 나는 희망한다.
다만 이러한 그의 총체적인 시각이 그의 시에서 개인적인 시점과 집단적인 시점으로 지나치게 분리된 형국을 노출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면서 나는 송찬호의 시 읽기, 그 <시달림>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그는 지금도 <한 자궁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파괴와 건설을 반복하는>([인공정원]) 달빛을 밟으며 <말의 감옥>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다음 블로그- 시인의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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