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36’- 이성복(1952~ )
봄, 연둣빛, 흐린 하늘, 그날 왜 나는 짐승스럽다는 생각을 했을까 분명히 연둣빛 잎들이 짐승스러운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짐승이었기 때문일까 봄, 연둣빛, 아침 아홉시의 흐린 하늘, 생명의 한 싹이 베어물고 있는 흐린 하늘, 내가 떠나면 날이 개이리
동물적 본능을 가졌으면서 열린 지능을 가진 인간이 이 뜻하지 않은 윤회를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동물이 다시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둣빛 잎이 짐승이 될 것 같은 불가능 의미로서의 윤회. 연둣빛이 하늘을 베어 물고 있는 저 쪽의 화자는 행복하고 나는 다만 이 윤회가 아름다울 뿐이다. ‘나’란 하나의 길이지만 장애다. 하지만 이성복은 내가 떠나면 날이 갤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무위를 연둣빛 흐린 날에 허용한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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