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달개비의 사생활 2 / 고형렬
내 잎사귀의 모양만큼만 햇빛이 들어왔다 내 눈에
만져진 광량은 환했고 깨끗했다
지하에서 음지식물들이 자꾸 기침을 할 무렵
식물대는 찢어지면서 물들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
새가 날아간 듯 풀들이 놀라 눈을 뜨지만
그들은 아무런 장비가 없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들
구불텅한 달걀 외피 모양의 잎사귀뿐
아무리 수많은 햇살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어도
내게 필요한 면적은 다만 나의 잎사귀 형상뿐
저 무량의 빛들이 다 받아야 할 건 아니다
내 줄기 속에 한줌쯤의 어둠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죽음이 숨어 있다고 예측하지 마라
나는 일년초, 나는 절대 너희와 월동하지 않는다
보라, 나는 죽어서 건너온다 너희에게
눈도 뜰 수 없는 딱딱한 땅속 겨울의 동결 속으로
돌아가리란 이것만 기억한다, 흙과 뿌리
한낱 생장점과 기억의 무늬들
언제나 내 잎사귀의 면적에만 햇살이 들이친다
그리고 가끔 어두워지고 밝아지곤 하지만
내 가느다란 피막이 감각의 구멍을 통해 느끼길
잠깐 여보세요, 조금만 비켜서주시지 않겠습니까
(시작 2007, 여름호 발표)
*고형렬 약력
1954년 강원도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 <김포 운호가든 집에서>, <밤 미시령>, 등 다수
지훈상, 일연문학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제비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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