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강정숙 시인의 시 몇 편

길가다/언젠가는 2007. 4. 15. 22:00

흔들의자 

 


절뚝이며 너무 오래 걸었나 보다

발바닥 마디마디 시퍼런 멍이 들고

접혔던 기억 하나가 도드라져 일어선다


맨 처음 떠나온 게 오지의 숲이었나

구절초 오만하게 꽃잎 터뜨리는 날

불지른 한 생의 끝에 달랑 남은 뿌리 하나


상처를 긁어내던 벼린 손 벼린 칼끝

무늬를 맞추면서 빗금을 궁글리며

비로소 완성에 이른 환한 창가에 섰다


낮게 흔들리다 부드러워지는 시간

내안의 하얀 그늘이 고요처럼 깊어지고

지상의 한 모서리가 이명 같이 멀다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조부문 당선작

 

 

환한 봄날의 장례식

 


장제지 건너편의
주유소 음악소리 쾅쾅대며 흩어진다.
갈색머리 붉은 유니폼의 여자아이는
까딱까딱 발장단 맞춘다
옆구리가 샌드백처럼 흔들린다.

 

기름 묻은 목장갑을 또르르 말아쥐고
세차장 물보라 속에 뛰어든다
물방울 터지고
일곱 빛깔 소리가 튀어오르고
가로수 꽃잎 쏟아져내리고
버스정류장 철제의자에 앉아 있는
모녀의 목덜미가
희고도 붉다 그리하여
잠시 한순간의 풍경에
가벼워져가는데  

 

대낮 네거리에
전조등을 밝히며 건너오는 영구차
차창에 내걸린 슬픔들이
흰 망울처럼 벌어진다
조등弔燈 없이도 환한 봄날이다.

 

나쁜 그림

 

 

아버지, 술항아리 버캐 낀  입 속으로

벌컥벌컥 물 쏟아넣던 아버지,

저녁상 시든 야채 같은 엄마한테 물 사발을 던졌다

엄마 얼굴엔 피가 흥건했다

손에 잡힌 걸레로 핏 구멍을 막으며

어린 나는 아비를 노려봤다. 죽어라

어서 죽어라 빌었다

 

엄마 앓다 죽자

됫병 소주로 끼니 삼던 아버지,

머리카락이 댓 발로 늘어져있다. 나는

잠든 아비 머리칼을 싹둑싹둑 잘랐다

가위 손이 발발 떨고

 

스무 해도 더 묵은 일이다

아직도 가위손은 꿈속을 헤매고

아비의 머리끝엔 피가 줄줄 흐른다


주방의 가위 날을 내 팔에  대어본다  

흉터 자국이 움푹하다. 부르르르 몸 떤다  

아침 햇살에 반짝, 가윗날 속엔

아버질 죽이면서 아버지를 닮은

핏발선 내 눈이 숨어있다

 


네  안에서  죽다

 

 

호랑가시나무 잎은

어긋나 있다

찌르지 않기 위해

톱니 잎새들은 옆으로 퍼진다

서로를 피해가는 그 좁은 통로로 내가

들어가는 날은

빗방울 후두둑 드는 날이었다.

젖지 않은 길을 찾아 젖은 내가 기어간다

솜털을 바짝 세워

온몸을 밀고 가면

캄캄한 내 아래쪽에 자꾸

핏물이 돌고

죽어서라도 가야지 , 난

내 남은 생을

거침없이 밀어 넣는다.

 

 

 꽃의 하부

 


젖어있던 몸 아래에서

마른 풀 냄새가 올라오는 저녁

 

길고 구불한 그 속에 무슨 일이 있었나

부어오른 관절들끼리는 서로 슬픔이나 쓰라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젖어야하는 이유 말고는 아는 게 없다

 

안구 건조증의 눈까풀은 너무 많은

풍경을 담고 있어

산동네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면

늘 부딪치는 회색빛 이끼들,

얇은 유리미닫이와 시멘트 골목이

한 경계를 이루고

문 열면 부엌, 문 열면 안방이던 집은 사철

푸른 물이끼가 자라나고

현관 바깥 골목까지 튕겨 나온 신발들과

머리카락이 삐죽삐죽한 아이들이

이발소 간판아래서

막대기로 시궁창을 찌르곤 했지만


꽃 대궁의 아래위는 막힘없는

길이어야 한다,

 

 

내안의 세렝게티

 


  물한모금을 먹기위해 수천킬로씩 여행하는 누우떼들이 악어집에 갇힌다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다 장렬하게 죽는다 완전한 자유란 저런 것일까  주검의 냄새가 새벽처럼

자욱한 세링게티 늪 속을 건너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자유라면,  나도 기꺼이 그 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내안에는 초원이 없다  지독한 건기와 우기가 있을 뿐, 한입 조개를 줍

기 위해 황새는 한종일 허릴 굽혀 걷고있다 나는 내 가느다란 발목을 구부리는 연습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물어다 준 먹이를 기다리며 기꺼이 그대 감옥에 갇힌다. 탈출울

꿈꾸며 애초에는 없었던 마음의 은장도 새파랗게 갈아서 날 세워도 먹이를 베기에는 어림

없는 일,

 

 초원의 하바나는 비를 준비하지만 내 안의 습지에는 물기 한점 없다 누우떼는 여전히 늪

을 향해 돌진한다

 

 

 

가족

 

 

네 눈이 향기로운 건

피멍 때문이야 아카시아,

오월의 거리엔

다시 연등 행렬이 시작되고

꽃들의 망막에는 실핏줄 번지네, 그 해

비탈진 언덕위의 초막에선

아홉개 가지들이 영양실조로 말라갔지

품을 수 없는 새끼라면 입이라도 덜어야 한다,

아들하나 딸 하나 남의집살이 보내던 날 어미는

마른입술 베어 물고 말문을 닫아버렸지

바람 없어도

남은 가지들 잉잉거렸지

콧물을 훌쩍거렸지. 다시 오월이야

아카시아,

모질게 뿌리내린 네 먼 발끝에서 

한 나무 한 수액 한 몸의 냄새 피워놓고

울지마세요 어머니,

방울 방울 잎새 흔들어

어미의 마른눈을 적셔줄 뿐이었지


 


구월

 

 

 그는 하안거 중이었다

 

 어두워 지는것도 모르고 경을 읽고 있었다

 

나도 따라 어두워 지고 싶었지만

 

맥없이 발등만 붉어졌다

 

고사목이 되어가는 그의 몸,

 

그의 옆구리에서 잎이 돋고 있었다

 

나도 곁에서 꽃피우고 싶었지만

 

그의 발치를 돌고 돌 뿐이었다

 

난 아직도 그 해독불가 경전을

 

홀로 읽고 있다

 

 

스치다

 

 

내일은 또 무엇을 스쳐야 할까

 

구름 주머니를 이고 날아오른 새가 있다.

아침 수면위로 지느러미 긁으며 차오르는 물고기가 있다

허공의 한 순간을 뚝 져내리는 나뭇잎이 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낯익은 사람들이

공복을 끌고 집으로 가는 길,

아이들의 웃음보가 공기 주머니 속에

까르르 터지고

저녁밥 냄새는 달콤하다 

 

내일은 또 누구를 스쳐야 할까

 

아이도 불도 없는 현관은 무섭다

홀로인 어둠 속, 노래방과

채팅방을 돌아나온 내 목덜미 스믈스믈하다

눈물겹게 비켜가는 어머니가 남겨둔

흉터자국이 빤짝 빛을 낸다. 온 몸이 상처인

피톨 안쪽을

 

내가 아직 이슬 젖은 처녀림일 때

내 몸에 와 박힌

별똥별 하나,

생의 비경은 푸른 운무였다

바람결에도 빗방울 속에도 소소히 흔들렸다

나는 늘 출발지점에서 서성거렸다

 

내가 오늘 습자지처럼  빨아들인 체취 하나

 

 

*강정숙 시인 ; 경남 함안 출샐

                       <흔들의자>로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조부문 당선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 2006, 2월 (2006 상반기 최우수도서 선정) 

                       <시와 색> 동인회장

                       <e -시인회의> 주인장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제비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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