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房(문학외일반)

06,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사산(死産)/황병승

길가다/언젠가는 2006. 8. 26. 16:48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⑩·끝 시- 황병승 [중앙일보]
한글로 쓰였으되 `해석 불가`
소통 불능의 실험 또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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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병승.

21세기 한국 시단의 한 극단(極端)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아니다. '극단'이란 표현도 중심이 전제된 개념이니, 이도 맞지 않겠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황병승을 '미래파'라 호명하며, 그에 대한 해석을 미래의 어느 날로 유예시킨 평론가 권혁웅의 심정을 차라리 알 것도 같다.

등단한 지 갓 3년이다. 시집도 지난해 처음 나왔다. 그러나 지난 한 해 황병승은 가장 자주 인용된 시인 중 하나였다. 열렬한 호응과 맹렬한 비난이 팽팽히 맞섰다. 논쟁은 여전히 뜨겁고 시인은 오늘도 입을 열지 않는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제 시에 관해 말해야 할 때가 제일 싫습니다"고 답했다. 하기야 황병승이 자신의 시를 일일이 설명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다.

단언컨대 황병승은 해석 불가의 시인이다. 그의 시는 기존의 모든 문법 너머에 존재한다. 그래도 황병승을 번역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여태의 논의를 모아 황병승의 특징 몇 가지를 추려본다.



▶시적 자아의 혼란:황병승의 시적 자아는 복수(複數)다. 황병승에게 시는 1인칭 문학이 아니다. 그나마 쉬운 편인 예가 있다. 첫 시집의 표제작이 '여장남자 시코쿠'였다. 시적 자아 '시코쿠'는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존재다. 따라서 시코쿠는 하나가 아니다. 둘이다. 형이 있는 시코쿠와 오빠가 있는 시코쿠가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적 자아는 확장 또는 분열한다. 주체가 복수이므로 풍경 속 소실점도 늘어난다. 형이 있는 세상과 오빠가 있는 세상이 병존하는 것이다.

▶개인의 언어:사전에도 없는 단어가 황병승에게선 자주 발견된다. 비유란 것도 좀체 짐작이 어렵다. 가령 '문친킨 문친킨,/스위트 워러의 말이다/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말을 자주 중얼거린다'('문친킨' 부분)에서 '문친킨'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애초부터 소통을 염두에 둔 시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로 쓰였다고 해서 규명될 필요는 없다.

▶형식 파괴:후보작 중 하나인 '눈보라(snowstorm) 속을 날아서(하)'는 35연 107행의 장시(長詩)다. 황병승의 시는 대부분 길다. 한데 요즘 더 길어지는 추세다. 까닭을 물었더니 "시도 되고 소설도 되는, 시도 안 되고 소설도 안 되는, 시와 소설의 모호한 경계에서의 밀고 당기는 재미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20년쯤 전에도 제목 '묵념, 5분 27초'만 적어놓고 시라고 우긴 시인이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황병승의 시는 둘 이상의 화자가 등장해 외계인의 언어를 잔뜩 늘어놓은 것쯤 되겠다. 맞나? 여하튼, 여기서 드는 의문. 황병승은 왜 소통 불능의 시를 쓸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시인 자신은 알고 있을까). 다만, 두 가지는 꼭 알아야 한다. 첫째는 21세기인 오늘, 어떠한 미학적 실험도 미학의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실험 자체가 이미 하나의 관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모든 종류의 실험, 즉 위반.일탈.해체 따위는 자체로 '클리셰'(Cliche.진부한 표현)가 되고 만다.

또 다른 하나는, 황병승이 시를 쓰는 이유다. 20여 년 전의 황지우는 시대와 맞서는 전술로써 해체를 선택했다. 그러나 황병승에겐 싸우고픈 생각이 없다. 딱히 무찔러야 할 적도 없는 요즘이다.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시인은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 중 하나"라고 답했다. 일종의 유희란 얘기다. 그렇다고 장난삼아 끼적대는 건 아니다. 앞서 실린 '사산된 두 마음'의 시작메모에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고통이 재능이라면, 두 번만 죽었다 깨어날 걸 그랬지.'

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