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
선착장
짠물에 얼룩진 쇠말뚝, 굵은 밧줄이 똬리를 틀고 말뚝의 목을 조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바다가 드나들었나. 끙차, 목에 밧줄을 휘감고 버틴
시간이 얼마인가. 투두둑 바다의 힘줄을 끊어먹은 말뚝 모가지가 수평선을 향해 늘어져있다.
녹이 슨 밑동. 벌겋게 흘린 눈물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밧줄, 단숨에 바다를 둘러매던 그을린 팔뚝, 노을에 젖은 만선의 깃발, 말뚝에 마음을 묶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철썩, 포구가 몸을 뒤트는 순간 말뚝의 영혼이 새어나간다. 수많은 이별을 치르는 동안 말뚝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선창가 말뚝에 걸터앉아 떠난 사람을 생각한다. 말뚝 뽑힌 자리, 깊이 파였다. 나를 맬 곳이 없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년 3, 4월호)
덩굴은 고집이 세다
허공에 쑥, 손가락을 집어넣는 호박덩굴
가늘고 푸른 손가락이 둘둘 허공을 감아쥐고
하늘을 팽팽히 끌어당긴다
스스로 길이 되는 덩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기댈 곳을 찾는 여린 호박순
당겨보면 벋지르며 살아온 힘이 있다
줄기가 뚝뚝 잘려나가도
거머쥔 손을 풀지 않는다
구부리면 휘어지는 만만한 것들
어깨와 어깨를 엮어 스크럼을 짠다
그 여린 것들이,
담벼락에 올라
벽을 허물기 시작한다
꾸역꾸역 벽을 먹어 치운다
시집 <신발論> 2005년 문학의전당
씨옥수수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불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 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궁시렁궁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 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 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을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걸터앉기 좋은 쪽마루는
지금도 볕이 잘 듭니다
마루 밑에 누구의 것인지 찌든 고무신 한 짝 보입니다
조용한 오후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마루에 봄이 슬쩍 댕겨갑니다
우물은 덮여있다 누군가
입을 틀어막았다
창경궁 뒤뜰, 오래된 우물
무거운 뚜껑을 밀치면
신음처럼 한숨이 샌다
나지막이 새어나오는 울음소리
굳게 입을 다문
우물은 입이 헐었다
돌벽에 더께진 마른 이끼
벽을 치며 오르내린 두레박은 사라졌다
수백 년을 탕진한
저 시커먼 우물 속
몇 권의 슬픔이 묻혀있나
해는 기울고
우물 곁, 굽은 소나무
그림자 한 벌 꺼내 바닥에 깔고
챙모자 쓴 젊은 여자 유모차를 끌고
눈멀고 귀먹은 우물을 지나가고
집복헌* 앞에 쪼그려 앉은 우물
쇠울타리에 갇혀 캄캄하게 늙어간다
뚜껑 위에 발자국 하나 낙관처럼 찍어두고
집복헌(集福軒)- 창경궁의 내전 건물로 사도세자가 태어난 곳
시집 - <신발론> 2005년 문학의전당
'詩가 있는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실의 역사 외 /권혁웅 (0) | 2006.05.03 |
---|---|
[스크랩] 토막말/정양 (0) | 2006.04.28 |
비단길 2 /강연호 (0) | 2006.04.27 |
[스크랩] 오늘의 노래 / 이희중 (0) | 2006.04.25 |
강정숙 시 모음-네 안에서 죽다 外 (0) | 2006.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