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 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 ?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 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경남신문
십이월의 교차로 / 한인숙
상여를 보낸다
초겨울. 언 슬픔이 기억의 행렬을 짓고 있다
한 세월 이정표도 없는 길
소리꾼의 요령소리가 산역으로 향하는 ?! ? 구비 능선을 넘어서고
흑백의 한 생이 울음에 섞인다
상여꾼의 후렴소리를 더듬던 누군가
알 수 없는 기억에 찔린 듯 추위 한 자락을 움켜쥐고
한동안은 눈물도 상처도 없는 길이
북망의 깊이를 더듬적거린다
슬픔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노잣돈을 뒤척이는 햇빛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도
교차로를 통과시키고서야 안식의 길로 접어들 것이고
인연들 또한 죽음을 통과하고서야 눈물의 깊이를 알 것이다
졸고 있던 새 한마리
꽃상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움찔. 날아오른다
◈무등일보
李賀를 펼치다 / 오장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편에서 울던
갈가마귀떼가 동편으로 분주했다 한점,
멀리 갈대밭에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오랜 슬픔같은 그의 아쟁이 등뒤에서 ! 먹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의 두 눈 속으로
노을이 설핏 지고 있었다 낯선 그의 발자국 소리로하여
야트막한 강 언저리에서 몇몇 물고기들이
물밑으로 잠수하곤 하였다 미세하게 출렁이는 강물과 함께
그의 아쟁도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그의 산발한 머리카락과 어깨를 잘 익은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쟁을 풀어내렸다 어둠 속에서 아쟁만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쟁의 가는 絃이 아주 낮게
동심원을 그리자 강물에 한 발을 담그고 있던
풀들이 춤을 추었다 갈대들이 불타올랐다
그의 모든 絃들이 몸을 놓아버렸을 때,
일곱 마리의 용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마른 번개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지상으로 일제히 꽂히고 있었다
동편에서 분주했던 갈가마귀떼가
그의 앞에서 무작정 내려앉고 있었다 강물 깊숙히 잠수했던
물고기들이 차례차례 물길을 차고오르며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絃 사이사이로 은빛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며
수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동양일보
집 / 박순서
!
언 강을 떠나는 새는
내 눈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는다
나는 ? 糖? 관 뚜껑을 닫지 못한다
하루살이처럼 세상 휘저으며 여태껏 살아
나는 누구의 보금자리가 되었는가
언 강에도 새들의 집이 있고
꽃이 진 마른 대궁에도
봄볕의 집은 남아있다
내 눈 속의 새들아
이제 돌아갈 길일랑 잊어버려,
마지막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흐르다 흐르다 내 몸에 칭칭 감기어
안온한 보금자리에 머무름 같이
너 이제 날개를 묻으라
능선을 넘으면 내 무덤이 있다
낯선 바라마에 끌려가다
부리로도 울지 못한 네 눈물이 있다
저기, 보아라
저승 가는 길목에 굶주린 까마귀가
까르륵 까르륵
빈 솥에 밥을 푸고 있지 않느냐
◈전남일보
허공 위에 뜬 달 / 정동철
얼어 죽은 새들을 주우러 강변에 나갔다
일찍이 우리가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들
한 무리 되새떼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에 휩쓸리고 있었다
쩡쩡 얼어붙은 강은 속내 깊숙이!
낡은 달력들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빠 르게,
추운 햇살 한 묶음 지나가던 동화 속의 집
왜 아버지는 거칠고 마른 삭정이만 골라
허공 위에 집을 지으셨을까
마루 밑에 놓인 신발들이 안쓰럽다며
어머니는 자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밥알 같은 눈발들이 지붕 낮은 집들을 지워버리는 동안
잠들 때마다 등을 쿡쿡 찔러대던
낡고 불편한 나뭇가지의 집
우리들의 하루는 종일 공중에 떠 있었다
귀 시린 겨울밤을 지우개로 지우며
연탄난로 위에 마른 건빵을 굽다가
갈라진 손등으로 벌건 연탄집게를 들어 글씨를 썼다
어디로 공처럼 튀어나갈 수도
굴러갈 수도 없었던 날들
사방연속무늬 벽면에서 철지난 통신표들이 노랗게 바래갔다
청색의 동치미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져 갔지만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꽁 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농민신문
숲 해설가 / 권지현
휘돌던 매 부리내린 능선에
나무구름 풀구름 흐르고
바위틈 얼비치는 물빛 건너온
숲 해설가 어깨에
날아와 앉는,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
산초나무 나란히 사람들 멈추어선다
저기 양 팔을 층층이 펼친 건 층층나무구요,
이건 누리장나무, 뒷간에 심어 냄새를 중화했지요
잎을 뜯어 냄새 맡아보세요
산뽕나무 가지에서 머리 들고 돌아보는
구름표범나비 애벌레, 눈 사이 일렁인다
잎새 건네받은 얼굴에 푸른 수액이 돌아
촉지도 읽듯 나뭇결 더듬대며 쓸어보는 사람들,
양평 봉미산이 들어올린 잣나무 사이로
다래덩굴 타고 내린다
은빛 가지 틈틈 부신 해, 머리 위에서 화선지를 펼치고
바람에 결 다듬은 잎새를 뒤집는 숲으로
호랑지빠귀 푸르르르 날아올라
촘촘히 타래 풀리는 빛,
나무뿌리 밑으로 플러그를 꽂는다
산 아래 굽어보?! ? 자작나무가
비탈 얽어내린 뿌리를 땅껍질 위로 차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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