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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 움베르토 에코

길가다/언젠가는 2006. 1. 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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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녀를 낳는 것과 책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성공을 위해 책을 쓰지는 않는다. 다만 훗날 나의 책이 다른 연구자들을 위한 한 권의 참고문헌으로 영원히 살아남아 한 줄 인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성공으로 얻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책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다소 도움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에코에게서는 다른 천재적 예술가들의 숙명과도 같았던 비극성 또는 엄숙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극적이기는커녕 그의 글에는 번뜩이는 재치와 신선한 위트가 넘쳐 흐른다.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어 온 주요한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유한한 삶의 허망함을 극복하고자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일생을 걸고 불멸의 작품들을 남기곤 했다. 움베르토 에코도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다른 천재적 예술가들의 숙명과도 같았던 비극성 또는 엄숙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극적이기는커녕 그의 글에는 번뜩이는 재치와 신선한 위트가 넘쳐 흐른다.

 

또다른 차이점이 있다.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필연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창작을 하는 것과 달리, 에코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글을 쓴다. '위대한 작품은 트릭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작품은 머릿 속으로 '계산'해서 만들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에코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분석과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장미의 이름>이라는 놀라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런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의 '문학과'을 밝힌 글을 썼다. 오늘 소개할 책은 그의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이다.

 

도서관이란 이미 읽은 책들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읽어야 할 책들의 창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경험하게 되는 공통된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볼 때마다 자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독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스럽게 이러한 자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두들 알고 있다시피,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그 읽은 책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은 점점 더 늘어나고 이자에 다시 이자가 붙는 악순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 기호학, 문학, 철학, 역사학 등 수많은 학문 분야를 가로지르며 방대한 지식을 쌓은 움베르토 에코도 이러한 소용돌이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집에 약 '4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짧은 삶을 고려해봤을 때, 그 4만권의 책 중에서 읽은 책보다는 읽지 못한 책들이 당연히 더 많을 것이다. (하루에 한 권씩 읽을 경우 4만권을 읽기 위해서는 약 109년이 필요하다).

 

 

언젠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읽어야 할 책들의 창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경험하게 되는 공통된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볼 때마다 자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그의 '지적'인 소설들은 그의 엄청난 양의 독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탄탄한 자료 수집을 토대로 쓰여진 그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지적 충격'을 안겨 준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엄청난 금액과 물량을 투자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면, 그의 소설은 엄청난 자료수집과 지식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 소설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소설가들은 얼마나 '저예산 소설'에만 매달리고 있는가.

 

그의 소설들은 독자들을 '지적 게임'으로 초대한다. 물론 모든 독자들이 그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아무런 배경 지식없이 읽어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에코가 의도한 '지적 게임'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소설의 구석구석에 의도적으로 갖가지 암호들을 숨겨놓았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소설을 두 개의 독자층을 염두해 두고 '더블 코딩'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숨겨진 암호들을 찾아내는 것은 두 번째 독자층인 '고급 독자'들의 몫이다. 이는 마치 인터넷 문서가 수많은 하이퍼링크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하이퍼링크를 무시하고 문서를 읽어도 이해할 수 있지만,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수많은 갈래들을 탐험하다보면 끝없이 방대하게 펼쳐지는 '지적 게임'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기표에 대한 작업은 원자보다 아래의 수준에서 작용하지만, 기의에 대한 작업은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원자들의 수준에서 작용하여 새로운 분자들 속에서 그것들을 조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만약 지식의 원자들이 무수하다면, 시인의 유희는 그 원자들을 순환시켜 무한하게 다시 조립하고, 단어의 어원들뿐만 아니라 바로 관념들까지도 무한하게 조합하는데 있다는 것이지요.

 

에코는 '문학'도 철저하게 '기호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언어구조를 기표와 기의의 개념을 통해 분석한 이후, 구조주의는 문학, 철학 뿐만 아니라 전 학문 영역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움베르토 에코는 문학 작품을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하고, 텍스트는 수많은 기호들의 조합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듯 한데(<책의 향기> 48호 참조),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구조주의적 관점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우리는 음악이  'mp3'라고 하는 하나의 컴퓨터 파일로 담겨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의 컴퓨터 파일 속에 담길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음악이 '0'과 '1'의 조합으로 변형가능함을 의미한다. 만약 어느 작곡가가 새로운 음악을 작곡했다고 하자. 그것이 mp3로 변환될 때, 음악은 하나의 숫자의 조합으로 변형되게 된다. 그는 새롭게 만들어낸 '숫자의 조합'을 그의 창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하나의 숫자 조합을 찾아낸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렇듯 구조주의는 텍스트를 기호들의 조합으로 간주하며, '창작'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구조주의자들은 하나의 텍스트들은 수많은 다른 개념들이 조합되어 '상호 텍스트성'을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찌기 프랑스의 수학자 파스칼은 '내가 새로운 것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시라. 소재들의 배치가 새롭다'고 말한 바 있다.

 

보르헤스에게 근본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백과사전의 아주 다양한 파편들을 사용하여 관념들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능력입니다. 물론 나는 그러한 가르침을 모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두 현대 작가'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영국의 제임스 조이스를 꼽고 있다. 특히 에코에게 있어 보르헤스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도사는 바로 보르헤스를 모델로 한 것이다. 에코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밖으로 나가는' 도서관이었다면, 보르헤스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 도서관의 이야기를 들여준다고 말한다. 돈키호테는 책 속'영웅 이야기'에 빠져, 현실 속으로 뛰쳐나가 '영웅 이야기'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느 기사의 이야기이다. 반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즉 세상 그 자체가 도서관인 세계를 보여준다.

 

앞에서 mp3 음악 파일을 예를 들었듯이, 책들도 궁극적으로 기호들의 복잡한 조합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기호들의 모든 가능한 '경의의 수'를 담고 있는 도서관이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 ' 경우의 수'를 벗어나는 책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도서관의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어느 원숭이가 무분별하게 자판을 두드리는데 결국 <신곡>을 쓰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이러한 구조주의적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교육>이라는 말을 그리스인들의 <피아데이아 paideia>라 불렀던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임무는 좀 더 흥미로워질 것입니다. 피아데이아는 단지 지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기술들의 총체이며, 그걸 통해 젊은이들은 인간 형성의 이상에 따라 성인의 삶에 입문하게 되었지요. 파이데이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성숙한 인격체, <칼로스카가소스 kaloskagathos>, 즉 착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아름답기 때문에 착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덧 70대에 들어선 노학자 움베르토 에코. 그는 전 인생을 통해, 교육과 학습의 중요성을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 에코는 여전히 배움의 열정을 잃지 않은 채 우리에게 '게임'을 하자고 조른다. 깊이와 한계를 알 수 없는 '지적 게임'을. 그래서 난 그의 책이 새로 나올 때마다 중독된 환자처럼 그의 '게임'에 빠져들고 만다. 여러분들도 '게임'에 한 번 빠져보기 바란다. 카트라이더만 하지 말고.^^

 

에코는 여전히 배움의 열정을 잃지 않은 채 우리에게 '게임'을 하자고 조른다. 깊이와 한계를 알 수 없는 '지적 게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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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영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진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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