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시간

[스크랩] 손글씨와 컴퓨터

길가다/언젠가는 2011. 10. 21. 16:38

손글씨
송재소(성균관대 명예교수)

지금은 마흔 살이 된 큰 아들 놈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연필깎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끝내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른들로부터 ‘연필을 예쁘게 깎아야 공부도 잘한다’는 말을 들어왔던 터라 기계로 깎지 말고 직접 손으로 정성스레 깎아 쓰라고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야말로 요순시대의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난 6월, 교육과학기술부와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는 ‘스마트교육 추진 전략’을 발표했다. 이 ‘전략’에 의하면 2015년까지 초, 중, 고교의 교과서가 디지털화 된다. 기존의 교과서뿐만 아니라 각종 참고서, 문제집, 사전, 보충학습 자료가 모두 개인용 컴퓨터에 저장된다. 종이책이 없어지고 공책이나 연필, 지우개, 필통도 필요가 없어진다. 학생들은 등교할 때 달랑 컴퓨터 하나만 들고 가면 된다. 정부가 이런 ‘전략’을 수립한 이유는, 학생들의 가방 무게를 줄여주고,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 한다. 2025년까지 국가 경쟁력을 세계 3위로 끌어올린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책가방 무게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면 학생들의 사물함을 활용하는 등의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국가 경쟁력 문제는 보다 깊이 생각해야 한다. 끝없는 정보의 바다위에 떠 있는 단편적인 지식 사이를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검색하는 컴퓨터를 통한 지식 사냥이, 오래 집중하고 깊이 사색하는 능력을 저하시키고 인간 고유의 창의적 사고를 방해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국가 경쟁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식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진정한 국가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디지털 교과서, 과연 ‘국가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학교가 어디 지식만 전달하는 곳인가? 학생과 선생의 인격적인 부딪침을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교실이 아닌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청소년들의 도덕 불감증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은 그래도 학교 밖에 없다. 학생은 묻고 선생은 답하는 가운데 사람 냄새가 나야할 곳인데, 사람 냄새는 나지 않고 기계 소리만 가득한 삭막한 디지털 교실에서 어찌 도덕적 불감증이 치료될 수 있겠는가? 학생과 선생 사이의 최소한의 예의마저 사라진 지금, 디지털 교과서가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아닐까?

이번 ‘스마트교육 추진 전략’에서 전체적 맥락으로 보면 작은 문제일 수 있지만, 연필로 상징되는 필기도구의 실종이 나에게는 더욱 충격적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손글씨가 사라진다. 손으로 글씨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글씨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혼이 담겨있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손글씨를 쓰게 했더니 차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더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런 판국에 ‘전략’이 실행되면 학생들의 손글씨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중국 당나라 때에는 과거시험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적용했다고 한다. 신언서판이란 용모, 언어, 글씨, 판단력을 말하는데 그 중에 ‘書’ 즉 글씨가 들어있다. 글씨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연필을 예쁘게 깎아서 공책에 또박또박 써내려 가면 성격도 차분해지고 참을성과 집중력도 길러진다. 미친듯한 속도전의 시대에 학생들의 인성을 자연스럽게 길러주는 데에는 손글씨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흔 살이 된 나도 지금 컴퓨터로 이 글을 작성하고 있지만 적어도 초, 중, 고교에서 만이라도 손으로 글씨를 쓸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교실에서 책 대신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연필 대신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학생들, 이들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인가 아니면 잘 길들여진 로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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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송재소
· 성균관대 명예교수
· 전통문화연구회 이사장
· 저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출처 : 장흥초등학교60회동창회
글쓴이 : 엄길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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