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눈길/고은

길가다/언젠가는 2011. 10. 7. 00:10

 

 

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高銀, 1933~ ). 전북 출생. 본명은 은태(銀泰). 1952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1962년 환속함. 50~60년대의 초기시들은 주로 죽음과 허무라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표현했으나 1970년 이후 ‘전태일 분신 자살’, ‘3선 개헌’, ‘유신 헌법’등을 목격하면서 민족 및 민족사에 관심을 돌리면서 민중시인으로 전환하였음. <피안감성>, <해변의 운문집>, <문의 마을에 가서>, <만인보> 등 많은 시집과 평론집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