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들이 작가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대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러한 절차는 신문과 문학 전문 잡지를 통해 하게 되는 것이 대개의 경우다. 물론 자신의 작품을 책으로 묶으면서 등단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절차가 문단에 대단히 중요한 카스트적 인식을 제공하고 있는데 어느 잡지로 언제 등단했는가 내지는 어느 신문으로 몇 년도에 등단했는가를 따지는 문단의 풍토 때문이다. 이러한 등단 출신지에 대한 문제는 그 사람의 작품의 성과내지는 완성도와는 별개의 문제로 작용한다. 문학잡지에서 작품을 싣는 구조 역시 일단 작품성에 따른 청탁 보다는 손쉬운 인맥이나 잡지사의 이해에 따라 청탁을 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 작품성보다는 네임 벨류를 더 중요시 여기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네임 벨류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 문인들은 그 네임 벨류를 높여줄 잡지를 찾게 되고 어느 정도 작품성을 갖게 되면 흔히 말하는 등단처 세탁을 하게 된다.
내가 아는 시인의 경우도 무명의 잡지로 등단하고 시집까지 냈으나 도무지 원고를 실을 만한 곳에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지방의 잡지로 등단하고 또다시 중앙의 잡지로 재 등단했다고 한다. 또 어떤 시인은 등단처가 이름이 없었던 까닭에 좀 더 자신을 알리기 위해 명망 있는 문사(청탁 여부를 쥔 사람)가 참석하는 모임에 줄기차게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고 노력하여 지금은 시집도 내고 어느 정도 문단에서 자리를 잡기도 한 사실도 있다. 이 경우 그나마 시간과 금전이 뒷받침해준 결과다. 소위 자기 수준에 맞는 괜찮은 잡지로 등단했다는 이유 때문에 기존에 등단한 잡지와 결별하거나, 아예 기등단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등단처는 문인에게 카스트의 쇠사슬과 같은 것이다. 등단처가 유명하지 않는 사람의 시집은 아예 좋은 잡지사에서 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등단처가 좋지 않은 사람은 작품도 안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변별력을 갖고 있는 잡지는 얼마나 될까? 기존의 명망 있는 문학상을 받은 시인들과 작품의 면면들을 보면 의아해진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등단한 잡지 수준에 따라 원고 청탁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바로 현재 한국 문학잡지의 왜곡된 구조를 잘 대변하는 좋은 예다.
우리나라는 약 400여종의 문학잡지가 있고 대부분 신인상 제도나 추천 제도를 갖고 있다 심지어는 일 년에 한 번 발간하는 잡지에서조차 신인상을 주어 등단시키는 예도 있을 정도며 일부 월간지의 경우 한 번에 최고 10여명의 시인과 수필가를 배출하는 것을 보았다. 일 년이 지나면 도대체 몇 명이 등단하게 되는가? 과연 이들이 문인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일부는 좀 더 나은 다른 잡지로 이동할 것이며 일부는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거나 능력이 없어 그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문단의 옥상옥 구조를 받치는 하부구조가 될 것이다. 한 때, 몇몇 잡지사 주간에게 등단처 표기를 말거나 아니면 젤 뒷장에 표기함으로서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권고를 많이 해봤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작품보다는 이름을 원하는 문학사나 그 이름만을 보고 작품을 읽는 독자나 다를 게 없다. 등단 절차는 글 쓰는 자의 계급적 이해를 심화시키고 있고 문단은 스스로 카스트적 사고에 빠져 있다. 물론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다.
일부 시인들의 작태를 보면 할 말이 없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시인들도 여럿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란 누구일까? 그리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금전으로 인맥으로 때로는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넓히려는 사람들은 분명 문단 패거리의 능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얼마 전 민족작가협의회에서 민족이란 명칭을 빼자는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작가를 지우고 민족은 살려놔야 할 것이다. 작가는 넘쳐나지만 민족을 생각하는 작가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미래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단이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사이 그 패거리에 들 수 없는 사람들이 틈새를 공략하여 문인들을 양산하고 잡지를 팔아먹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에 의해 문인입네 거들먹거리는 문학 떨거지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문인의 관을 쓴 사람들이 작품보다는 권력 잡기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문인단체들이 권력 헤게모니 싸움에 능한 까닭이 여기서 읽힌다.
문인이 작품으로 읽히지 않고 계급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또한 문학 건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슬픈 일이다. 농민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시를 쓰는 농민이 없고 노동문학을 이야기하지만 글을 쓰는 노동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면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거시적인 평가를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출판사나 문학사에서 호들갑 떠는 문학의 위기는 분명 여기에서 출발된 것이다. 문단은 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열려진 사회가 아니다. 가장 폐쇄적인 카스트적 계급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