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房(문학외일반)

도마 위에 오른 고은의 ‘만인보’

길가다/언젠가는 2006. 9. 1. 17:58

[국민일보 2006-08-20 11:49]


중진 시인 이시영(57)씨가 올해로 초판 발간 20년을 맞는 원로 시인 고은(73)의 대표적 연작시 ‘만인보’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수 차례에 걸쳐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던 문학적 입지로 인해 그동안 비평가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고은의 시 세계에 대해 그와 절친한 후배 시인이 비평의 메스를 댄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씨는 최근 출간된 계간 ‘문학수첩’ 가을호에 게재된 ‘만인보가 이룬 것과 잃은 것’에서 “앞으로 30권으로 마무리될 고은의 만인보를 얘기할 때 1∼3권을 으뜸으로 치고 있어 과연 명불허전인지,명실이 상부한지를 한번 따져보고 싶은 비평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전제한 뒤 “그 다산성에 비해 그다지 특출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비슷비슷한 시들의 되풀이 내지 앞의 작품들의 모방이 결코 대작이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추켜세울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시인의 착심(着心)이 완강하여 ‘관묵이 아저씨’ ‘조필우 부자’ ‘굼벵이 새끼’ 같은 시에서 보듯 작의의 노출이 심한 태작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며 “작품의 군데군데 삽화처럼 끼여있는 역사적 인물이나 조선시대 성리학자,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운 열사들을 그린 시들이 그러하다”고 꼬집었다.

예컨대 그는 “가라/가서 네 나라를 세워라/한밤중 어머니는 아들을 보냈다/아 아들을 붙들지 않는 어머니여 벼랑이여//졸본 땅 비류수 기슭에 세운 나라여”(‘고주몽’ 일부)를 적시한 뒤 “위와 같은 단언은 확실히 2000년대의 시점에서 보면 낡은 관점임이 틀림없어 보이며 시적 상상력 또한 협소하기 이를 데 없고 자아의 새로운 타자 발견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씨 자신이 만인보를 출간한 창비의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고은을 문학적 은사로 여겨왔음에 비추어 이번 평문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니라 ‘만인보’를 우리 문학의 명실상부한 자산으로 만들기 위한 고언으로 읽힌다. 이씨가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부분은 ‘만인’의 정체성 문제다. “만인이란 민족 또는 민중이라는 집합적 실재와의 일치를 통해 확대를 꿈꾸는 자아다. 하지만 ‘만인보’에 담긴 ‘만인’은 인간 중생에 대한 인정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안심하고 수긍할 만한 민주주의 사회의 비전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씨는 이와함께 “‘만인보’를 대표한 작품을 단 한 편만 고른다면 인물이 자기의 삶을 증언하는 ‘선제리 아낙네들’을 들고 싶다”고 말했다.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선제리 아낙네들’ 중)

1986년 11월 창비에서 초판 발행된 ‘만인보’는 지금까지 모두 23권이 출간되었으며 수록된 시는 총 2890편에 이른다. 그러나 1권과 23권 사이의 기간은 무려 20년이나 달하는 등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시대를 변화시킨 만인들의 정체성도 변한 것이 사실이다. 이씨는 “시대의 변화화 함께 만인들도 변한 이상 이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솔직히 말해서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 16∼20권에 묶인 시들엔 조금만 더 절제되었으면 하는,앞의 작품을 복제한 듯 비슷비슷한 것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나는 이것을 ‘만인보’가 가장 크게 잃은 것이라고 본다. 보다 많은 작품들에 의해서만이 그 시대상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언젠가 고은에 의해서 ‘자선 만인보’가 새롭게 엮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