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房(문학외일반)

윤동주 시인 ''최후의 사진'' 공개

길가다/언젠가는 2006. 9. 1. 17:46

[세계일보 2006-08-2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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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초여름, 교토(京都) 우지(宇治)강 구름다리에 늘어선 9명의 청춘남녀. 이들 중 단정한 교복 차림에 눈매에는 우수가 깃들어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는 범상치 않은 단호함이 엿보이는 청년 윤동주(1917∼1945)가 유난히 돋보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 남긴 유일한 사진이자 최후의 사진이기도 하다.
1995년 TV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발견된 이 사진을 찍은 후 윤동주는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조국 해방을 한달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야나기하라 야스코씨가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 여학생 두명으로부터 윤동주가 체포되기 전 구체적인 삶을 취재, ‘현대문학’ 9월호에 공개했다.

태평양전쟁이 다급해지면서 일본 각료회의는 조선인 징병을 의결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윤동주는 귀국 결심을 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윤동주를 환송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윤동주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급우들이 노래를 청하자 “거절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곧바로, 앉은 채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여학생들은 회고했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최후의 구름다리 위 사진은 송별회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에 찍은 것이다.

윤동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표를 구입하고 짐을 소포로 부친 후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송몽규 등과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유발하는 데 전념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징병제도를 비판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나기하라씨는 “6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이 청년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라”며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