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숙 시 모음-네 안에서 죽다 外
네 안에서 죽다
호랑가시나무 잎은
어긋나 있다
찌르지 않기 위해
톱니 잎새들은 옆으로 퍼진다
서로를 피해가는 그 좁은 통로로 내가
들어가던 날은
빗방울 후두둑 드는 날이었다
젖지 않은 길을 찾아 젖은 내가 기어간다
솜털을 바짝 세워
온몸 밀고 가면
캄캄한 내 아래쪽엔 자꾸
핏물이 들고
죽어서라도 가야지, 난
내 남은 생을
거침없이 밀어넣는다
꽃이 피는 이유
오뉴월 한 갈피 넘기면 능소화 피어나고
비가 갠 하늘에 노을꽃이 피어나고
지줏대 마른 등걸에 꽃구름이 피어나고
단단한 등뼈 하나의 소망을 심어 올려
허방을 딛고 서서 발톱도 키웠지만
제 안을 파고든 뿌리, 생채기로 키가 커서
혼자서는 닿지 못할 아뜩한 높이라도
내 몸속 풍차처럼 감고 또 풀어지는
그것이 꽃피운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네
그리움은 모두 등 뒤에 있다
바람을 밀고 있는 저 억새들의 흔들림은
그대를 만져보기 위해 멈춰 섰던
나의 등처럼 쓸쓸하고 무디어져 있는 것
그리하여 그 모든 바람은
흔들리지 않으려는 억새의 몸부림을 움켜쥔
완강한 몸짓이라는 것,
그러나 그대여,
그대 생이 가진 서걱임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야만 비로소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흔들리는 잎새 하나에도 필생을 모두어
부서지는 저 은빛 파열음처럼
우리의 부빔이 가졌던 파란만장의 그 길에서
더듬어 나간 맨 처음 부딪침이
경계 아니겠는가
한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경계를 이루는 것
또한 우리의 욕망 아니겠는가
내안에서 참 부드럽게도 흔들리던 그대 뿌리를 밀어낼 때
그대 수만의 촉수를 뻗어
누군가가 그자리에 또 있었음을 알아야 했으리
상처가 아물도록
그 얼마나 비바람 불었는지,
오래 눈 쌓여
철철철 흘러내렸는지를,
돌아선 그대 등도
모질게 젖었다는 걸 알아야 하리
가 족
네 눈이 향기로운 건
피멍 때문이야 아카시아,
오월의 거리엔
다시 연등행렬이 시작되고
꽃들의 망막에는 실핏줄 번지네, 그해
비탈의 기울어진 초막에선
아홉개 가지들이 영양실조에 말라갔지
품을 수 없는 새끼라면 남의집살이 보내던 날 어미는
마른입술 베어 물고 말문을 닫아버렸지
바람 없어도
남은 가지들 잉잉거렸지
콧물을 훌쩍거렸지. 다시 오월이야
아카시아,
모질게 뿌리내린 네 먼 발끝에서
한 나무 한 수액 한 몸의 냄새 피워놓고
울지마세요 어머니..
방울 방울 잎새 흔들어
어미의 마른 눈을 적셔줄 뿐이었지
가을기도
이 가을엔 아프지 말게 하소서
이가을엔 슬프지도 않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고도
제 살을 떨구는 저 나무에게도
견디는 것의 진통이 있겠지요.
하늘이 저토록 투명해 가는 이유도
그 하늘 아래 서면 덧없이 쓸쓸해지는 까닭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부할 수 없는 또 한번의 가을을
맞는 때문이겠지요
보이지 않은 그 힘에 떠밀려
지난 어느 날도 나는
이 언덕 외진 길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 날도 바람은 귓전을 스치고
안으로만 깊어가던 그리움 하나 가득
당신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달랐다면 그때는
더 많이 아팠었고
더 많이 열망했었고 더 많은 사랑을 하고 싶었지요.
어느곳을 둘러보아도
아무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그대여!
이 가을엔 덜 아프게 하고
조금만 슬프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많이 기다리게 하소서
참으로 마음이 맑아지게 하시고
더 많은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무늬의 슬픔
나의 키를
한 마디씩 내려 본다
네 머리를 한 뼘쯤 올려 본다
나를 구부리고
너를 보듬으면
지독한 얼룩들이 시나브로 엷어질까
감촉도 잊혀질까
쓸쓸한 시간을 뒤척이다
얇은잠 든다
무엇을 잃어버린 꿈 꾼다
달아나려해도
다가가려해도, 닿지않는 어디쯤서
네손을 놓쳤을까
뒷걸음치는 사랑은 그림자가 없다
각인된 생의 발자국만
밝은 쪽에 있다
처음처럼 아득한 벼랑에 서고서야
네 모습 비로소 또렷해지는
내 모든 고통에는 네가 있다
폐 굴뚝
내 몸은 텅빈 울음이다
내 높이에서 바라본 지붕들은 빛나지만
그 아래 어둠은 깊다
내 온기만큼은
변두리 저녁놀보다 따뜻해
공단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뛰어가고
저녁연기에 감겨 홀로 잠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자라기도 전에
내안의 불 꺼지고, 나는
빈집이 버텨낸 시간들만 껴안은 채
오래 방치되었다.
내 비어있는 무게를 아무도 움직여 주지 못했다
깜깜한 끄으름을 털고, 저기
견사실 구석 벽에
서서 자던 그녀들이 보고 싶다
열두시간 맞교대에 뛰쳐나간 그녀들이
불량한 애인을 만날 때 마다
내 그림자는 불안했다
휘파람을 날리며 숨어들던 어깨를
깊이 덮어주다가도
위태로운 숨결 놓치기도 했다
나는 이제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더운 오줌 갈기던 취객도 오지 않는다
내 정수리에 발톱을 꺾는 새에게서
날개 접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밟아라 새여,
내 기운 어깨 더 무너져야 한다
종
어느 땅 한 뼘에도
내 자리는 없어
바람이거나
그대이거나
내 등을 떠밀면
지상의
속살에 닿는
작은 소리로 운다
울다가
침묵하다가
울지도 못하다가
미움을 떨쳐내 듯
오래 파문지는
정지와
흔들림 사이
한 生이
무겁다
별똥별
뿌리 없이 서있는 잎새처럼 세상은 시들했다
불거진 나무들도
새살을 감추느라 한껏 구부려졌다
나는 그가 흩어진 자리에 성호를 그었다
학비를 버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는 늘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과도한 정신의 혹사는 육체의 시듬 임을 몰랐던 우리는
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볼펜 자루와 맞바꾼 그의 자존심이
입술위에 허연 버께로 남던 것만 기억한다
동전 몇 닢과 교환한 얼굴의 두께를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며
빳빳한 카라 깃을 목까지 잡아당겨
다음 차를 기다리고 섰는 그를
나는 버스 정류장 미니 수퍼 앞에서
딱 한번 보고 말았다
오빠만은 공부를 해야 한다 믿었던
어린 누이들이
고무공장으로 건빵 공장으로 흩어질 때
굴뚝을 솟아오른 검은 연기에
나날이 말라가는 그의 잎맥을 우리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 별을 심어놓고
어서 북극성처럼 반짝이기를 기다렸다
목을 곧추 세워 뛰기만 했던 그는
서른 문턱에서 스러졌다
빗물에 씻긴 산비탈은 싱싱하다.
난 말없이 그 길을 걸어 내려왔다
노을 속에
붉은 물방울이 대롱
꽃의 하부
젖어있던 몸 아래에서 마른 풀 냄새가
올라오는 저녁
길고 구불한 그 속에 무슨 일이 있었나
부어오른 관절들끼리는 서로
슬픔이나 쓰라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젖어야하는 이유 말고는 아는 게 없다
안구 건조증의 눈까풀은
너무 많은 풍경을 담고 있어
산동네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면 늘 부딪치는
회색빛 이끼들.
얇은 유리미닫이와
시멘트 골목이 한 경계를 이루고
문 열면 부엌, 문 열면 안방이던 집은 사철
푸른 물이끼가 자라나고
현관 바깥 골목까지 튕겨 나온 신발들과
머리카락이 삐죽삐죽한 아이들이
나선형 이발소 간판아래서 막대기로
시궁창을 찔러대곤 했다.
꽃 대궁의 아래위는 언제나
막힘없는 길이어야 한다,
꽃이 피는 이유
오뉴월 한 갈피 넘기면 능소화 피어나고
비가 갠 하늘에 노을꽃이 피어나고
지줏대 마른 등걸에 꽃구름이 피어나고
단단한 등뼈 하나의 소망을 심어 올려
허방을 딛고 서서 발톱도 키웠지만
제 안을 파고든 뿌리,생채기로 키가 커서
혼자서는 닿지 못할 아뜩한 높이라도
내 몸속 풍차처럼 감고 또 풀어지는
그것이 꽃피운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네
흔들의자
절뚝이며 너무 오래 걸었나 보다
발바닥 마디마디 시퍼런 멍이 들고
접혔던 기억 하나가 도드라져 일어선다
맨 처음 떠나온 게 오지의 숲이었나
구절초 오만하게 꽃잎 터트리는 날
불 지른 한 생의 끝에 달랑 남은 뿌리 하나
상처를 긁어내던 벼린 손 벼린 칼끝
무늬를 맞추면서 빗금을 궁글리며
비로소 완성에 이른 환한 창가에 섰다
낮게 흔들리다 부드러워지는 시간
내 안의 하얀 그늘이 고요처럼 깊어지고
지상의 한 모서리가 이명 같이 멀다
수덕사에서
쇠락한 단청빛은 햇살아래 더욱 곱고 저혼자 흔들리던 풍경소리
이우는 날 대들보 金龍 佛畵는 비늘 되어 내린다.
이 세상 버거운 짐 돌담 아래 벗어놓고 가슴 속 넘쳐나는
탐욕도 내려놓고 아득한 백 팔 계단을 타박타박 오른다.
육신은 뒤에 두고 마음 먼저 닿으니 견승암 푸른이마
솔바람에 젖어 있고 먼저 와 엎드린 고요, 누리에 가득하다.
거꾸로 흐르는 강
안개속에서는 모두가 뒤로 흘러간다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가보기로 한 날
반대 편 차창 속 나와 마주한 나를 본다 낯익은,
지나간 뒤로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를 낳고
핏덩이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설때
발등을 적셔오던 더운 눈물의 의미를
너의 눈망울은 모르듯이, 하염없는
너의 시선에 매달린 나는
줄타는 그림 속 무용수처럼 더 이상
높이 오르거나
내려오지 못한 채 허공에 고정되어
푸른 이내가 이따끔씩 흐르는
저 건너를
숨죽여 내다볼 뿐이다
내 신발굽은 언제나 앞으로 굽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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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시조부문)을 수상하며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