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손진은/중년 외

길가다/언젠가는 2006. 4. 22. 18:31
손진은

약력


1960년 경북 안강 출생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돌],
1995년 매일신문신춘문예 문학평론[비움,그 적멸과 신생의 공간] 당선.
1996년 제 6회 대구 시협상 수상.
저서[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현대시의 지평과 맥락],[시 창작의 이론과 실제]공저.
시집[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눈먼 새를 다른세상으로 풀어놓다].
현재 경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문예진흥원 우수도서 추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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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문가가 뽑은 올해(2006, 문예지 작가)의 좋은 시 중에서


중년/손진은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 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갔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나오던 생기, 머릿 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꺼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깜빡해버린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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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 간다.
떠내려 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구비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 갈 것이다.
만났다가 혜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세찬 여름비의 며칠이 지나고 햇빛 쨍쨍한 날
가슴에 이끼날개 달고
밤 속으로 은빛공간 열며
별이 되는 꿈을 꾸는
조약돌 몇이 얼핏 보인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작








고요, 격렬한
―내 발 앞의 배추벌레

손 진 은


꼼짝하지 않고 죽은 체하는
한 마리의 고요를 본다

공기들을 일순 긴장시키며
물질이 된 놈의 태연

한낮의 정적과 바람 햇살을
상처로 덮은 채
놈은 격렬하게 떨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있다면 금이 갔을 것이다)

몸뚱이를 온통 귀로 만든
저 번지는 선들의 소용돌이
무정부주의자처럼 흔드는 섬모들

허나 웬걸
겁먹은 마음 같은 건 놔둔 채
전신으로 빛과 그늘 대기와 어울리는
저 몸,
속타고 있는 불의 싹들

열리는 몇 칸의 창(窓)으로
나뭇잎들의 옷자락이
초록을 헹구러 다가서다!
뒤이어 구름도 몇……

직물처럼 짜여진 고요의 허벅지 슬쩍 당겨
한 줄에 꿴 꿈틀 산맥
앞의 그늘 휙 돌아보며 가로질러 간다

말들은 품은 채
땅을 쥐었다 놓았다
하늘 모았다 흩었다 하면서

내 몸 속 창(窓)엔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도 쑤셔박으면서

- 현대문학 1998.12




꽃 피는 소리

손진은


꽃이 피고 있었다
한없는 어둠이 지켜 주고 있는 밤
찻잔 받쳐 든 두 손으로 모이는 떨림으로 알았다
눌렀다가 금세 빠져 달아나는 광택 없는 나날
질식할 만큼 두껠 가볍게 들어올리며
섬광처럼 존재의 항구를 열 때
외피의 그림자들은 주변을 싸고 돌고
오랫동안 그 앞에서 머뭇거렸던 記號의 경계선 지우며
不在 속에서 눈뜨는 검은 진주, 말들
결별의 감미로움 속에
세상은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고
딱지 앉은 자아의 살가죽 뚫으며
꽃이 하나 불쑥 떠올랐다






늦은 해

손진은


넘어갈 무렵의 해는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
물들이는 것이다
해가 반쯤 얼굴을 숨긴 산은 주황
그 앞의 산은 붉은색으로
마을을 감싸고 도는 산은 온전히 검은색으로 만드는
황금분할
새들은 그 정경 떠메고 날고
행인들 가끔 뜨겁게 눈길 붙들리지만
우리는 알지
푸른 하늘 끌고 가면서도 해는 하나의 길
젤 큰 은사시나무 펄렁이는 잎들을 돌아
귀가하는 한 사내 어깰 다독거리는 한줄기 빛의 길
산으로부터 보낸다는 것을
박명의 어떤 기운 떠돌면서
세상엔 더 많은 적요가 필요하단 것일까
뒤따라오는 어둠 때문에 그 길 보이지 않지만
사라진 빛줄기는 아마도 우리들 자신의 바탕인 어둠
흔드는 깃발인지도 몰라
아니면 그 안에 불씨 하나 다독이는 것이겠지
하여 한 죽음이 따뜻이 덮이듯
산그늘 서서히 덮어올수록 우린
햇살의 길 우리 속에서 자라
맥을 짚으며 돋아오르는 것을 느끼지





못 혹은 강도

손진은


나는 이제 길바닥에 안 보일 듯 드러누워 있는 뾰족한 금속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어떤 연유로 거기 나와 있는지도 잘 모르는.
그런 그가 어느 날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를 꿰뚫었다면
그래서 펑크를 내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은 타이어 수리점에서
거 재수없이 걸려들었군
이 미친놈이 죄 없는 타이어 찔러 버렸군
이제는 제법 보기 흉하게 된 바퀴를 안쓰러이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럴 것
그러면서 머리만 가뭇이 나와 있는 놈을 사정없이 내팽개칠 것

그러나 한번 수리된 바퀴는 지나온 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포장 안 된 길바닥에서 바퀴에 버팅겨 나가 떨어진 돌멩이나
아무도 모르게 슬쩍 긁어 버린 담벼락이거나
길가에 일없이 깔아뭉갠 미물까지도
바퀴는 여전히 기억의 마취 아래 놓여 있는 것

하여 이 경우에도
놈이 바퀴를 뚫었다고, 못 쓰게 만들었다고만 할 수야 없겠지
바퀴가 못을 구부려 버리지나 않았을까
만에 하나, 용서하게, 외로운 그 친구가 바퀴를 껴안아 버린 것이나 아니었을까

어디 갈라진 틈샐 여민다든가, 옷걸이 하나라도 되든가
세상에 태어나 제 육신 하나 반반히 세우지 못하고
무심코 버려져 지나가는 바퀼 긁거나
때로 바퀴에 박혀 불시에 감수해야 하는 그 회전의 속력이란

하여 우리들 무심한 바퀴가 생각 없이 굴러가는 어느 순간
느닷없이 우리를 노리는 복면한 자
어떻게 나와 있는지도 모를 그 어린 것들
(누가 그들을 버렸을까?)
무심히 바퀴 아래 마취되지 않게 해야 할 일이다
제자릴 찾아 제몸 하나 반듯이 세워 줄 일이다






스스로 열리기

손진은


불어오는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릴 때
우리는 나무가 웃는다고 말한다
가령 비 뿌리기 전 재빠른 나뭇잎의 흔들림은
불안해 하는 나무의 표정이다
그 순수한 기쁨에게로 혹은 상처에게로 열려 있는 나무들

어깨만 갖다 대어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온몸 자체가 기쁨으로 설레이는
내릴까 라는 음성이 그의 귓바퀴를 흐르기 무섭게
찌푸리는 어린것들 육체 언어

종이새처럼 풀풀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 말고
햇빛에 혹은 비에도 섞여 나란히 떠들기도 하다가
때가 되면 하나의 뿌릴 내려
풀이 되고 나무가 되는 언어

그리하여
사물들이 내게 손짓할 때
내 마음의 은사시나무
잎파랑을 흔들어 대는 설레임







시(詩)

손진은


바람이 불 때
우리는 다만 가지가 흔들린다고 말한다
실은 나무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심연의 허공에 뜨거운 실체의 충만함을 남기는,
도취와 나태 속에 취해 있는 듯하다가도
그림을 그리듯 하늘에
기하학적인 공간을 각인하는 나뭇가지
처음엔 가질 따라 움직이다가
어느덧 그 흔들림 관찰하는 나무의 눈
마침내 눈의 중심과 흔들리는 가지가
하나의 사이로 존재할 때
현기증나는 그 공간과 시간을 채우며
숨쉬고 물결치며 팽창하는 언어
완벽한
그러나 무익한 듯 보이는
물질적인 문장의 향기
그 형으로 나무는 날아가는 새들 불러들이기도 하고,
힐끗거리며 지나는 구름 얼굴 붉히기도 하고





집 1

손진은


소리는 의미의 두꺼운 형체를 깬다
우리가 지난밤의 숙취에서 깨어나듯
집, 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이 어찌 존재를 누이는 처소일 뿐이랴
나는 언어의 표정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흘러가는 물처럼 낮은 포복으로 걸어가는 소리의 행렬
그때 가만히 사물이 내쉬는 숨소리
그 속에 들어가서
수직 혹은 수평으로 혹은 그것들 둥글게 감싸는
언어의 표정
마침내 스며드는 햇살과 숲 안개 새소리까지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는 지상의 집이라는 형체를
버리지도 간직하지도 말아라
집으로 이르는 우리의 생각
마침내는 그 버림까지
그리하여 자유롭게 하라
언어 스스로 집을 찾아나서는 여행
그 오랜 행려 속에서 집이 한 채 지어진다
지상의 뜨거운 집 대신 언어의 육체가 들어가 쉬는
서늘한 집!






집 2

손진은


그때 하늘은 내게 하나의 집이었더랬습니다
등성이에 누웠다가 일어났을 때
앞에 막아선 자작나무들은 현관이었구요
하마터면 손으로 하늘 짚을 뻔했지요
그 집의 자식들
바람의 목소리와 어린 햇살 웃음소리 속에서
딱따구리가 현관에다 소릴 쪼고 있었어요
이윽고 해가 소리치며 산을 넘어갔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이불
사각 상자에 실려
누에고치처럼 우리는 굴러왔었지요
내 방 사각형의 어둠 속에 던져졌을 때 내 귀에 고리를 이루는
옆방 아저씨 못 박는 소린 영락없는
딱따구리 소리, 집은 호흡을 한다
상자에서 하늘까지
더러는솟구치고 더러는 누르기도 하면서
공기처럼 가벼운 숨결을 가진 집들
자연! 하고 내가 외쳤을 때
그 소리의 파문 속에서
상처입은 말들 집을 지었지요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피닉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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