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윤일균

길가다/언젠가는 2006. 4. 10. 21:29



 

오늘 (3월25일)평택 대추리에 갑니다.

이 땅 외롭고 아픈 곳이 거기 있어 우리는 발걸음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거기 사는 우리 이웃이 우리 백성이 너무 아프고 추워서

몇 백일을 모여모여 촛불을 켜들고 여러분을 부릅니다.

여러분의 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곳에 가서 목소리 높여 다시 한번 시라도 크게 소리 높여 외쳐야

내 할 도리를 작게라도 하고있다는 스스로의 위안을 얻으러 갑니다.

 

 

  대추리 아리랑//윤일균


폭격기가 빈 하늘을 찢습니다
천지간 쏟아지는 굉음에
혼을 잃은지 오래

진위천 황구지천은 바다에 닿아
사람들 가슴 속 종양으로 가득한데
야수의 눈빛
저 굴욕의 눈빛

철책은 언제나
바로 저기, 그대로인데
진창 뻘밭
어깨뼈 주저앉도록 지게질로 이룬 들판
저 노동의 땅은 삽과 곡괭이의 어머니
두 눈 부릅뜬 자식 앞에서
어머니의 자궁을 내어 놓으라한다

억만년을 살아야 할 환희의 벌판을
전쟁기지로 쓰겠다 심장을 옥죄어 오는데

버들붕어, 중타지 한가롭고
새참 들고 텃논 못줄 띄우던
철책너머 옛집마저 그립거늘, 오늘 대추리는
평택호 물풀에는
토종고기 사냥 하는 블루길이 휘젓고
황소개구리 커다란 입이 대지를 삼킨다,

 



 

 

 

 여주 남한강가 농민문학축제에서 제가 낭송한 시 입니다.

 

청미천에서 / 윤일균


예서 속 깊은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개개비도 떠난 들녘
오랜 벗 같은 사람 하나
기울어진 농가 앞을 저물도록 서성거린다.
고봉밥 먹여주던 큰 들 지나서
일백육십리 물길 아프게 굽이쳐 흘러 남한강에 이르도록
네가 키운 건 돌붕어 모래무지
메기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청춘의 재 너머
기약없이 흔들리는 시대의 물빛으로 너는
금모래 언덕 남한강 갈대들을
품마다 온종일 끌어안고서 앓다만 감나무처럼 서있다.
애써, 벗같은 사람하나 이 가을을 뒤척인다.
때론 남기어진 상처들을 빗금처럼 바라본다.
들국처럼 고요히 미소짓다가 혹은 물빛으로 반짝이다가
엎어져 금모래빛 유년의 강가에서 노니는 꿈을 마신다.
합수머리 모래언덕
고개 숙인 갈대 모가지에 옛 그림자가 머물다 가고
동부래기 울음이 한참을 허공을 맴돌다간다.
내 아비의 탯줄은 아직도 예서 머물고 있는가?
먹빛 그림자 어두운 빈자리
납작 엎드린 농가에서 달려나오는 홀아비 삼촌의 해수기침소리
그 밤, 다시 뜬소문처럼 찾아들 때
흰 가루약으로 하얗게 부서져 흐르는
여주 점동면 도리마을 청미천가에서
나는
아직껏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 새로운 시인―윤일균
“민들레 뿌리처럼 깊이 있는 시를 쓰고 싶다”

1956년 경기 용인 생. 현재 영농에 종사.


어느 날 속옷을 벗다가 실밥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빨래를 손수 개시는 어머니가 해진 빨래들을 꿰매어 놓은 것이었다. 팍팍한 세상 그냥저냥 살아온 게 다 어머니의 손길 때문인 듯 하여 순간 가슴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의 당선 소식이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에게 조그만 위안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대학을 보내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시던 아버님에게도 조그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날선 추위 속에서도 양지쪽 밭둑의 덤불을 들치면 작은 풀들이 엎드려 생명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걸 보곤 한다.
혹여 내가 들어선 길이 그러한 상태라면 풀꽃을 피우기 전에 좀 더 단단히 그 생명의 끈을 움켜쥐고자 한다. 아직은 더 여물어야 하고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먼 훗날 저 산과 들에 새싹으로 돋아나는 날 나는 나만의 얼굴로 세상을 맞이하고 싶다. 나만의 향기를 품어내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도와준 분들이 많다.
그분들에게 더 좋은 시를 발표하는 것으로 보답하고자 한다. 밤샘을 하고 있는데도 말없이 지켜봐주고 격려해준 가족, 친구 태종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새로운 시인탄생 그 밝음을 축하드리며.
   이태영 ( tysj77@hanmail.net , 홈페이지가 없습니다. ) 2003-05-03 23:25:50 / 조회 : 96   
어릴적의 가재숨어들던 도랑과 빨래터가 그리움과 고운 추억으로만 기억되어지던것이
아픔과 아림이 되어있을줄..그 애잔한 시인의 눈길이 보이는 듯합니다.

좋은시, 민들레 뿌리처럼 깊이있는시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리며
무궁한 발전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약력소개>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이 고향임. 지금은 경기 광주 퇴촌에 살고 있음. 85세의 아버지와 75세의 어머님께 얹혀 살고 있음. 1956년생. 부모님이 여덟의 자식을 낳았으나 셋만 남은 형제자매 중에 장남임. 낳는대로 자식을 잃다보니 대개 돌이 지나야 출생신고를 했는데 막내 누이동생은 여덟살이 되서도 입학통지서가 나오지않아 알아보니 출생신고도 안 되어 있어 그 날 신고하고 통지서 받아 온 것이 기억남.

*내가 1학년때 누나가 5학년이었는데 여름에 멱 감다 익사함. 그 날 후로 엄마에게 들린 마귀가 우리 집을 수시로 뒤흔들다가 고1때 나한테 엄청 혼나고 “이놈의 집구석은 요놈의 새끼 때문에 붙어 먹을 때가 없다”뇌까리며 나를 죽일 듯이 코 앞까지 강속구 주먹질을 날리고 도망간 후 어디서 얼어죽은 것이 확실함. 그 후로 우리 집은 아주 평안하게 예수를 믿으며(나만 빼고, 하도 식구들의 오랜 세월 기도가 간절하여 좋은 시 좀 쓰고 따라 나서야 할 듯) 잘 살고 있음.  

*이웃동네 공회당에 유치원(말이 유치원이지 큰 누님 뻘 되시는 분이 일년동안 봉사한 것임)에 다닐 때 누나가 쓰기 숙제를 해주었는데 그래서 빵점을 맞고 무지하게 창피했던 적이 있는데(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달아오름) 다음 해에 누나는 본향으로 돌아감.

*백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2반: 담임 허윤자 선생님, 권숙의라는 같은 학교 선생님과 연애 중이였음. 서울서 전학 온 심혁진이라는 여학생에게 사랑을 느낌.

*2학년2반: 담임 황규룡 선생님, 반장을 뽑는데 1학년때 우등상을 받은 남학생이 둘 이었는데 그 중에 저도 끼어 있었음.(이때는 남아선호가 분명 강했던 것 같음. 여자는 반장을 시킬려고도 할려고도 안한 것으로 알고 있음) 둘을 불러 세워서 열중쉬어, 차려, 앞으로 나란이를 시켰는데 나는 수줍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학교 옆에 사는 친구는 너무도 잘해 반장으로 결정났던 기억이 있음(역시 사람은 대처로 나가 살거나 거기서 태어난 불로소득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던 여자 아이가 2학기때 다시 서울로 전학 감(크면은 서울을 다 뒤져서라도 찾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 9년간임. 詩 정월대보름2에 언급함)

     


정월 대보름 2

                                 

오리나무 밭 스슥대 베어

동생은 여덞 모숨

나는 열한 모숨으로 나이만큼 묶는다


일산봉 떡갈나무 사이로

대보름 달 떠오르면.

합장한 손으로 소원을 빈다


달을 향해도는

불 타는 스슥대

한살이 탄다

불쌍한 엄니

아부지 한테 맞지않게 하시고


두살이 탄다

삶에 지친 아부지 농약병 들고

죽는다는 일 없게 해주시고


세살이 탈 땐

봄에 전학와 가을에 이사 가버린

눈이 맑은 소녀를 빌면서

망우려 망우려


*3학년2반: 담임 이영숙 선생님, 역대 담임들 중에 제일 이뻤음. 선생님께서는 학기중 3분의2는 아파서 학교에 못 나옴.

이때까지 엄마가 가위로 머리를 깎아 주었음. 아! 쥐가 파 먹은 듯한, 꿈에도 보이는 그 머리 울구면 시가 되려나!   

변검사 봉투를 받으면 친구 다섯이서 한 놈의 똥으로 제 각각 처방을 받았음.(요충 편충 십이지장충 회충 등) 구슬치기, 자치기, 팽이치기, 딱지치기, 얼음지치기, 덥치기놓기 등 인생의 피크였음. 

 

아래 시는 이 즈음에 담아둔 영상 입니다.

 

길수 아비


오리나무 배미 고구마밭 아래
덩굴걸어 어설피 가린 고추
양손엔 고추만한 증거물들려
동무들 줄줄이 새끼줄에 엮는다

도도한 길수아비 읍내로 간다
꾸러미줄 잡아끌어 지서로 간다
징역살이 시킨다고 겁주며 간다
별 달면 장군된다 놀리며 간다
동무들 눈물 콧물 뽑으며 간다
가다가 개울에서 딴전을 한다
물 속에 발 담그고 코도 풀면서
동무들 도망가라 딴전을 핀다
내빼는 아이들 발걸음 보다
껍질덮힌 고추가 앞장서 간다
쪼그라든 새알집이 따라서 간다
디앙그랑 비앙그랑 방울 울리며
논길밭길 정신없이 뛰어서 간다

길수아비 묻히던 날 모인 동무들
물 속에 발 담그고 코도 풀면서
어릴적 길수아비 그리며 간다

(시경 2003년 봄호)



*4학년2반: 담임 신용승 선생님,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은사님.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는 분, 간혹 오셔서 좋은 책 선물로 내려놓고 가시는 멋 있는 분. 4 학년 때 어느 날 마지막 시간에 문제를 내서 맨 먼저 다 맞추는 학생에게 급식 강냉이빵 한 쟁반 23개를(아마 갯수는 맞을 것임) 다 주어서 먼저 보내 주시 던 분, 한번은 용케도 내가 그 빵을 타서 가지고 가는데 우종구라는 우체국장 아들이(이 친구는 아버지 직업따라 다른데서 전학을 온 아이인데 겨울방학에 없어져서 면이 난리가 났었다. 스케이트를 들고 나갔다고 해서 면에 있는 저수지나 웅덩이는 면민이 동원되서 바닥까지 몇 번이고 뒤지고 긁었으나 허탕, 몇 달 후에 제 발로 돌아옴. 가출을 처음으로 알려준 진짜로 용감한 아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음) 나도 백점인데 선생님이 나누어 먹으래, 했을 때 책보에서 빵을 꺼내주며 가슴 아프던 일이 생각 남(이때부터 살을 사랑 할 준비를 했었나 봄 밝히기는 뭐 하지만 몸무게가 규격돈은 넘음). 얼마전에 선생님 만나 뵈었을 때 따졌음. 기억 못하고 계심.(문제는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제주도 도청소재지 맞추는 것이였음. 그 때부터 지리에 관심을 심히 갖게됨. 나라 수가 많지않던 그때에는 거의 세계의 나라와 수도를 외웠음) 2학년때 반장을 한 똑똑한 그 친구와 내가 반장후보로 추천을 받았는데 한표 차이로 졌음. 분명한 것은 내가 친구를 찍은 것임.(그 후로 성격 개조에 들어갔던 것 같음.)

 

 

쌀밥


참나무 장작 여남은 짐 해주는 약조로
돌반지기 한 말을 돌려 먹는다

가마솥은 온통 보리밥
보리밥 가운데 개떡만한 크기의 호박잎
호박잎 들어내니 쑥떡만한 쌀밥이 숨어있다

할머니 아버지 사발밥 푸고 나면
식구들은 쌀밥 냄새만 풍기는 온통 보리밥

잎에 붙은 쌀밥알 먹으려고
호박잎 몇잎 사발에 얹은 막내
상밑엔 슬쩍 내려놓은 호박잎

 

 

*5학년3반: 담임 이옥희 선생님, 처음으로 반이 갈리는 희열과 고통을 함께 느낌. 지금도 내가 찾고 있는 고마우신 은사님! 음악을 좋아하시고 열정적인 분. 그때 조승언이란 남자하고(아마도 군인이었음) 연애를 하고 계셨는데 그 분하고 결혼하셨나 궁금도 하고.... (교탁에 구부려 학급비 걷는 선생님 미니스커트를 엎드려 도 보고, 거울 대고도 보고, 빨간색이라고 떠들어대던 친구 그리고 선생님이 초고로 쓰고 버린 연애편지를 쓰레기통에서 찾아내 교실마다 다니며 읽어주던 재동이라는 친구는 개똥철학을 하다 허망하게 고태골에 드러누웠음. 그 후로 재동이 아버지는 나만 보면 붙잡고 울어서 도망 다녔음) 이 해에 죽어서도 한번은 꼭 한다는 홍역을 함. 체육시간이었는데 오한이 나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드니 다른 학년 체육시간을 하던 욕쟁이 강정구선생이(여자) “그 새끼 염병이여 옮기기 전에 빨리 보내버려”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함. (지금도 그 선생 생각하면 밥맛이 아주 많이 없어짐을 물론 비슷한 인상의 여자를 두두러지게 싫어하는 성격이 생겼음)

 

 

겨울밤




속내의 섶마다 이빨질하는 엄니
화롯불에는 톡톡 이 터지는 소리
벗은 웃통으로 날고구마 깨물면
등어리 긁어내리는
아비 손길은 막 구워낸 고구마

문풍지 울음에 아랫목 식어
이불 한 채 속
사방에서 포갠 발
샐녁까지 꼬물거리고
천장 갈라진 틈마다
주렁주렁 외풍에 흔들리는 파리
금새라도 입으로 떨어질 듯

벼름박엔
기름 자르르 포마드머리
가슴에 힘준 國자
햇 달력이 나를 비웃는다
신작로 내어주마 다리 놓아주마
달력으로 임기 채우는 의원님이

*6학년3반: 담임 이옥희 선생님, 2년 연속 담임 하신 분. 무섭게 공부 가르켰음. 될성 싶은 여섯 연놈 밤 열두시까지 몸바쳐 헌신하심에도 불구하고 중학진학 시험에 제일 잘 본 놈이 6등, 2인용 의자 각목으로 무지하게 빳다 맞음. 음악성을 길러주신 선생님으로 지금도 음악책 맨앞 대한의노래부터, 옹달샘, 길조심, (슈베르트 모차르트 브라암스)의 자장가등 대부분의 그 당시 육학년 음악책 음계, 가사를 외움. 뵙고 싶어 찾는 노력만 꽤 했음.

 

 

박씨 어르신



박씨 어르신은 동네 어르신
정중히 인사 하면 대답없고
못들었나 큰소리로 다시하면
늙은이 놀리냐 싸대기 날리는

박씨 어르신은 욕심쟁이
낯익은 장정 말림산에서 나무를 하면
비석 뒤에 숨어 지켜보다
나뭇짐 일어설 때 빼앗아 오는

박씨 어르신은 개구쟁이
일밥 들다 이등이네 부추기면
슬며시 숟가락 내리며 일등이라네
뒤돌아서면 새참타령 하고

박씨 어르신은 겁쟁이
피난 길 잘못될까 앞장서가다
처자식 잃고서 이산가족된

박씨 어르신은 동네 어르신
이집저집 큰소리로 다툴라치면
이눔아들이 복에겨워 환장했구먼

어르신 가는 길은 어르신 맘
어르신 이야기는 우리들 맘

 

(시경 2004년 봄호)

**백암 중학교**

*1학년2반: 담임 김복자 선생님, 음악선생, 누구도(유도5단 김창영선생도) 팔씨름으로 못이김. 남자같은 선생님. 공부 못하는 것은 용서가 됐지만 무단 결석은 지휘봉으로 닥치는대로 내리치던 분. 대부분 머리에 혹 한두개씩 달아 보았음.

*2학년1반: 담임 이필x (혹시 있을지 모를 명예훼손 소송을 대비해 밝히지 못함) 지리선생. 담임 통틀어 제일로 재수xxx. 그 선생이 하숙드는 집에 아이는 무조건 지리가 90점 이상 나옴. 내 동창(이쁘장한 놈)을 하숙방에서 데리고 자고 놀았음. 지리가 좋았던 것이 후회되던 시절임.  학교 바로 아래가 하숙집이였는데 출근했다가 조회하고 한번, 점심 먹으러가서 한번, 하루 두 번 이상 옷을 갈아 입었는데 대체로 노팬티였음. 판타롱바지 입고 철봉에 매달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때 증명이 되었음. 화장실 들어가는 것을 보고 큰 돌덩어리를 앉은 칸 밖에 똥푸는 구멍에 던져넣어 진도 10의 똥벼락을 내려줌.(혼자 한짓은 아님. 난 구경 반 가담 반 했음) 나중에 군대가서 순찰을 나갔다가 경인전철을 탔는데 여학생들이 이야기하는 중에 오가는 이름이 같아서 물어보니 그 선생이 맞았는데 증상이 더 심해져 있었음.(똥의 독이 덜 빠진 것이라고 혼자서 결론내림)

*3학년1반: 담임 한상만 선생님, 과학선생. 깔끔하고 지적인 양반.나중에 장학사까지 지내신 천상 교육자, 존경합니다. 이 해에 처음으로 동창에게 연애편지라는 것을 썼는데 그래서 인편으로 보냈었는데, 물론 답장은 당연히 못 받았고, 몇 해 전에 동문회에서 그 여인을 만났는데,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네. 하긴 내가 편지를 건네준 그 놈도 그를 처다보는 눈이 제 색깔은 아니던 것 같았다. 지금은 동창회에서 간혹 보는데 안 본 것만 못함. 지난번 현대백화점 시낭송회에 어찌 알고 꽃 사들고 왔었음. 시를 보는 수준이 대단함 본인 말로는 문학소녀였다네.

 

 

사냥개// 윤일균



첫 된내기 온 날
외지에서 지프차 한대가 왔다
검은 안경을 쓰고
총을 든 놈이 내린다
아이들이 우루루 모여든다

사냥꾼은
사탕과 몇 푼의 지폐와
뜨거운 커피를 한잔씩 준다

아이들은 사냥개가 되었다
이 골짝
저 갈대밭에서
어린 사냥개들이 뛴다

***백암 고등학교***

*1학년2반: 담임 유도형 선생님, 수학선생. 한 해 재수해서 왔다고 동창이된 후배들이 반장을 시켜주어서 소원을 풀음. 추석에 하숙방에 혼자 계신 선생님께 어머니가 싸주신 송편하고 감주 조금 갖다 드렸는데 눈시울 붉어지던 그 속정이 깊으신 모습이 선하네요.

*2학년1반: 담임 1학기 이인섭, 2학기 심상준, 두분 다 국어선생. 뜨뜨미지근한 분들이라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심상준 선생님은 그때 집이 부천인데 거기서 용인 백암을 기차와 버스를 갈아 타고 출퇴근 하셨음.

이때 친척집에 놀러온 첫사랑 심양을 고향에서 만났음. 그 실망감이란... 9년의 환상과 환희와 고통이 순식간에 정리됨. 서울에 그 많은 집을 다 뒤지는 일이 없어진 것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음.

*3학년1반: 담임 최용래 선생님, 이미 고인이 되신 분으로 누구보다 우리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다독여 주시던 분. 술을 좋아하시다 술병으로 가셨는데 우리는 선생님을 용팔이라 불렀다. 물론 이름에서 따오기도 했지만 저녁에 색시집에라도 가신 날은 우리들 자취방에 오셔서 양말이나 팬티도 얻어 입고 가시곤 하셨다. 교장의 독선을 철저히 응징하시던 의리의 사나이.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같은 반 친구에게 사촌동생인 집사람을 소개받고 펜팔을 시작함.

*제 학벌은 여기서 끝임. 이것저것 배우러 다닌 것은 많음. 제대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음.

 

천렵



개똥벌레 뵤뵤한 이슬저녁
냇가 뚝끼고 도는 거화
변변찮은 양념이지만 양은냄비 바닥난다

휴가 온 친구
곤조가로 흥 돋우면
냄비 바닥 그을름 긁어 바르고
양복쟁이는 재단춤을 추고
목공쟁이는 망치춤을 추다 지치면 대패춤을 추고
구렁목학교* 출신들 리사이틀에 날샌다

실 맨 불알
문고리 당겨서야 알아채던 선배형은
제 얼굴만하게 콘돔을 불어 앉은 배구를 하잔다
누가 먼저 문창호지를 뚫는가 시합을 하잔다
새날을
콘돔처럼 질기게 한번 살아보잔다

청개구리 우는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
오만 씨앗 싹트는 소리

 

(시선 2004 겨울호)

 

*8년 연애 끝에 1982년 드디어 결혼에 골인함.그동안 주고 받은 편지가 한 천사백여통 됨. 십여번에 이사 중에 아버지가 잃어버렸음.(지금도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음) 감언이설로 꼬셔서 엄청 싸우고(지나고보면 순전히 내가 잘못한 것이었음) 옷장사 12년, 밥장사 10년, 이제 나이 50에 처분만 기다리며 눈치보고 살고 있는데 아직은 사랑 받고 있음.

*83년 외동아들 청수 태어남.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무려 20여cm가 크니까 아들녀석이 겁을 먹고 그만 좀 자라게 기도해 달라고 식구들에게 주문함. 그런데 아마 아무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함. 지금은 제대 90여일 남긴 군인으로 187cm에 120kg정도. 내가 올려다봐도 든든하다 못해 무섭다.

*2001년, 친한 친구가  월요일이면 전화도 안 받고 궁금하여 물으니 경원대 시창작반에 시를 배우고 있다고 해서(사실은 여자분들이 많다고 하길래) 따라간 것이 오늘에 이름. 그때 오봉옥 선생님을 만남. 일생에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었음. 2001년 2학기 한 학기를 다니고 이일 저일로 고민 할 때 선생님의 깊은 배려와 격려로 다시 용기를 냄.




*****용기를 주신 선생님 편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부 올립니다*****



윤일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설은 잘 쇠셨는지요. 올 설은 유난히도 추웠던 것 같습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고향가는 길이 참 힘들었습니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자 해도 너무 추워서 집 안에서만 맴돌아야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설날인데요, 언제 그랬냐 싶게 날이 풀려서 성묘길은 참 발걸음이 가벼웠지요. 특히 아이들에겐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보니 음식이라도 많이 장만해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이 푸근했습니다. 자리라도 펴면 그것이 소풍이겠구나 싶었지요. 선생님께서도 성묘는 잘 다녀오셨겠지요?

오늘에야 경원대 사회교육원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동안 연락을 못 했던 것은 후임 선생님에 대한 배려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교육원에서도 모처럼 활성화된 시창작반인데 거듭 아쉬움을 표시하더군요. 그 분들에게도 참 미안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그리고 제가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시창반의 여러 선생님들 때문이었습니다. 한 학기만 더 해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분들이 몇 분 있었거든요. 특히 다음 학기는 창작기량을 높이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할 생각이었거든요. 너무도 아쉬워서 마지막까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양을 하고 거절을 했건만 막무가내로 밀어붙히는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선생님들에게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거기는 최근 5년 동안 전국에서 가장 신춘문예를 많이 당선시킨 곳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전국 사립학교 이사장 모임에서 칭찬을 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도전해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마지막까지 거절을 하지 못한 점만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분들이 서울까지 찾아와 부탁을 하기 전까지는 거듭 사양을 했습니다. 신문에 공고가 나왔을 때는 물론이고 전화로 거듭 권유했을 때에도 거절을 했습니다. 제가 참 아쉬워하는 몇 사람 중에 한 분이 선생님입니다. 윤선생님께서는 짧은 기간에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조금만 더 같이 공부를 해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분이었지요. 그 점 너무도 아쉽기만 합니다. 시공부는 결국 혼자서 하는 것이라지만 시를 공부하는 동아리의 분위기, 가르치는 선생님의 존재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거든요. 과연 가능성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지, 가능성을 발견한 후 어떻게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인지가 너무도 중요한 일이지요. 보통의 선생님들이 시적 기량을 놓고 그 가능성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것이 참 위험한 일인데 말입니다. 시적 기량보다 우선한 것은 발상, 상상력, 말을 다루는 능력, 시를 대하는 자세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도 발상, 상상력, 자세가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너무도 아쉽기만 합니다.    -중략-      저는 선생님이 남은 인생의 일부분을 시창작에 투자해 보았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냥 한 학기 정도만 더 한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방진 이야기이지만 우리 중앙 문단에서는 저처럼 신인을 많이 길러본 사람도 드물겁니다. 사람보는 눈이 저에겐 있습니다. 너무도 어릴 때부터 문단에 나왔고, 또 전국대학생연합회 문학동아리 전체를 지도한 경험도 있고, 또 문학잡지 주간도 맡은 적이 있어서 저에게 사람(가능성있는)찾는 일은 직업이기도 했지요. 너무도 아쉬워서 그런 것이니 혹 거슬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십시요. 만약 시간이 도저히 안 되시면 인터넷으로라도 같이 공부하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선생님을 돕고 싶은 순수한 생각에서 하는 말이니 정말이지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시간이 주어지면 시평을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요즘 시간도 많이 나실테니 우리 사무실에 한번 놀러 오십시요. 시청 바로 앞에 있습니다. 주로 낮에는 시간이 한가하니 한번 놀러 오십시요. 많은 분들이 왔다가 갔지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오 봉 옥 드림

 

선생님 진정 감사 드립니다.


*2002년 2학기 연대 시창작반 등록

 

*여기부터 문제가 생김. 밖으로 나도는 일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 시작한 것임.

 어떤 때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 같기도 함.

  

*2003년 2학기 까지 수강

 

*2003년 시경으로 등단

 

*시와색 동인 2004년 겨울에 첫 동인지 '이 위험한 경계' 출판

 

*지난해 10, 11, 12월 한국문학 평화포럼 문학행사를(임진각 망배단, 매향리, 부안, 태백. 평택 대추리) 같이 하던 일이 시를 쓰면서 뜻 깊은 일이었음. 존경하는 선배 시인들을 칠팔십분 만나뵘 


 

<詩와 色>을 만들다

강정숙


백양목이 아름다운 연세대학 교정에서 이 시대의 사오정 몇이 만났습니다. 남들은 한창 해외여행이며 골프 따위에 열을 올릴 때 우리들은 어둑한 뒷골방에 모여 들었습니다. 마치 한 시대의 문학이 우리 손끝에 달려 있는 냥 두 손을 부여잡고 결의를 빛냈습니다. 이름하여 <詩와 色>의 탄생이었습니다. 각자 주어진 생활의 높낮이가 다르고 지향하는 삶의 좌표도 다릅니다. 허나 좋은 시를 쓰고 말겠다는 그것 하나로 쉽게 뭉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짧지 않은 생활인으로서의 내공을 보여줄 수 있는 시, 깊은 침전의 과정을 통해 불순물을 걸러낸 청명의 시세계를 지향하고자 합니다. 매주 만나 치열하게 토론 했습니다. 그렇게 벌써 일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 일곱은 ‘돌이’와 ‘순이’와 ‘자야’ 들로 지칭되며 각자의 색감대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야돌이, 윤일균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가 ‘야돌이’가 된 것은 들의 사내, 대지의 사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도감이 따로 없습니다. 그가 바로 식물도감이지요. 온갖 사물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는 모양새를 보노라면 모두가 입을 벌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글 역시 늘 생거름 냄새가 납니다. 이 땅 곳곳에 스며있는 거름냄새야 말로 우리들 뼛속에 스며있는 본향의 냄새이자 자궁의 냄새이겠지요. 그가 살아온 세월의 냄새는 온통 거기에 가 닿아 있습니다.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묵은 항아리의 된장같이 질퍽하고 구수합니다. 그의 리듬은 거개가 4음보이지요. 우리가 슬플 때나 즐거울 때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민요 가락의 그것입니다. 경쾌하며 또한 넉넉한 그는 남보다 조금 큰 체구를 가졌으면서도 여리고 예민합니다. 들녘의 작은 풀 한 포기에도, 무논의 개구리밥에도 그만의 독특한 사유와 시선을 부여하는 힘도 거기에서 나오지요. 또한 그의 가슴 속에는 누구보다도 많은 방들이 있습니다. 그 여러 개의 방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발하는지 때론 웃지 않고 못 배길 말들을 쏟아내는가 하면 때론 큰 오라버니같이 다감하고 자애롭습니다. 술좌석이 심심할 것을 염려하는 분이 있다던가, 구수한 고향 얘기를 듣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좋을 분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인 그는 오늘도 을지로 러시언 골목의 ‘고향집’ 네온아래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습니다. 그는 이 땅의 제일가는 농촌시인이 되려고 합니다.

 

등단시외 6편

 





 

가재를 살려야 한다//윤일균


뉴스는 말한다

기찻길 옆 작은 도랑에 가재가 산다 서울에,


군자교 아래 중랑천은 버들치 알 까고

청계천은 연어가 산란하러 떼 지어 온다는 말이여서

차마, 믿을 수 없는데

年年이 가재를 본 역무원 손이 간 곳에

가재들의 도랑은 연연하다

노량한 앞 걸음

비호 같은 뒷 걸음


도심 하늘 짙은 매연, 높은 마천루는

생명의 산으로, 나무로, 하늘로 변환(變換)되어

강변북로는 니일니일 가재들의 가장행렬 중

자연은 때마침 칠월의 진진초록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서울은 지금 희망색이라 쓰고

가로수 되어 거리마다 부푼 꽃 피운다


가재가 많이 살아 가좌동이라 불린다는

기찻길 옆 작은 도랑, 어쩜 그 곳에

샘물이 솟아 오르는 용천수, 정녕 거기에

산소(酸素)성(姓)의 가재는 똥을 싸고

희망이란 이름의 가재는 오줌을 싸니

밤마다 온 몸을 빨간 빛으로 서울을 밝힌다


어느 날 가재 사는

기찻길 옆 작은 도랑 위에 공굴다리가 덮힌다

사람들은 숨이 막히고, 찰흙처럼 어둔 밤이 되어

다들 죽어 가는데 너의 서울은,

공굴다리 위엔 몇 대의 차만 서 있다




가설극장 가는 길//윤일균  

 

                                                  

수정산 멍석바위 위로 누운

고단한 노을도 지고

세상 어둑발 어둑어둑 내리는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유행가는

늘어진 레코드판처럼

마파람에 질질 끊어질 듯 이어지고

가두방송으로 시작된 울렁증

마음은 벌써 뛰고 날아 갈 듯


길섶에 한껏 쏟아진 개똥벌레, 그 불빛

이마에 떠억 붙이고 걷는 걸음

물방개 물쿤한 비릿내도 나고

여름감자 삭히는 내음새 후욱, 코를 스치고   


모래길 지날 땐 풀 먹인 광목치마

고무신에 스치는 소리 사각사각

물꼬 송사리 튀는 소리 잠방잠방

상사병 앓던 처녀 죽어 타던 상여, 그

곳집 앞 지날 땐 걸음들 빨라지고


공동묘지 돌아 갈 땐 부엉이 울어

여우가 도섭을 하여 무덤 흙을 

뿌릴 거란 말을 누군가 하면

이내 까르르 웃다가 뚝 그친 적막

누가 밟았을까

비단벌레향 질펀하다


성한 발을 물에 담구어 바른 걸음질 하면서

언제까지나 개울이였으면 하던 그 밤





구제역//윤일균


몇 년 전 태풍에 구봉산 골짝 무너져

개울을 마당 높이로 메웠을 때도

식구들 명줄 건진 것 다행이라며 

전 재산 진흙 더미에 묻고도 버티어낸 아재

담보 잡힌 처갓집마저 날리자

구판장에서 병소주를 들이키는 재승이 아재

그날 이후 돼지우리 주위에선 끝도 한도 없이

시뻘건 샘물이 솟는다

개천에서도 논바닥에서도 피눈물이 솟는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지나는 방역차 연기 속엔

더 이상 아이들이 없다

도랑 건너 농장에는 사료통이 채워지고

도축장으로 갈 트럭은 돼지를 싣고


만신창이로 취한 재승이 아재 돌아오다가

“이놈의 세상, 구제역으로 확 쓸어버려라!




덧 정 //윤일균



서른 넘으며 냉수 물고 세우던 숱한 밤

치통의 시린 그림자 안은 채               

가으내 주워 들인 상수리 서너 말

일흔 넘은 나이에 몇 개 남은 어금니로

내내 까고 계신 엄니


가슴져며 모아둔 백여 만원 월세돈 걱정 할 때마다

찾아 쓰려므나 말씀하시더니

든장질하는 지하방 할망구에게 덜컥 내어주곤

마음 고생 이사 횟수 늘어 날 때마다 보태지고


밀치락 달치락 통화소리

이내 모두숨을 쉬며 하는 말

주기는 준다는구먼,

아들 장사가 안된다고 죽는 소리니

몇 년을 들어온 소리

얼마나 더 들어서 끝은 있을런지


모질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는 여린 가슴

묵나물 몇 망태

고사리 몇 덩이 이고 가신 장

손에 쥐어진 몇 푼, 이걸 사 볼라나

저걸 한번 먹어 볼라나

맥장꾼처럼 서성이며

통장 하나 까맣토록 참은 세월로

평생에 한번 쥐어 본 모갯돈 내어준 마음 고생


덧정 많은 우리 엄니

“그 놈의 할망구 곰팡이 지하방은 벗어나야 할텐데

해독이나 되게 묵이나  몇 모 갖다줘라”


창문을 내다보는 백발 너머로

먼 산 주름은 엄니의 세월인양 첩첩



따깨// 윤일균                          


배가 고파 종기 달았나

종기 달아 배가 고팠나


왼 다래끼 형아

오른 다래끼 누이


깨진 사발 엎어서

싸리문앞 개울 다리위에 솥을 걸었다


지나다 솥단지 차는 사람아

내 종기를 가져 가다오


눈꼽재기창으로 내다 보는데

할머니 다리턱에 걸려 넘어지고


할머니 일으키던 형아와 누이

솥단지 걷어차고 따깨 되였네



소나기//      

     윤일균 


먹구름이 수정산 허리를 감싸돌면

돌모루 바위 속 구렁이가 울었다


구렁이가 우는 날에는

넙티로 소 뜯기러 간 밤나무집 늦동이

피사리하던 학자골 방앗간집 쌍동이

소리개서 따비풀던 회관집 막동이

느티나무 밑에서 멍석짜던 재간동이

마을 오동이가 동이동이 뛴다


한질금 소나기가 돌모루 지날 때

추녀 끝 낙수로 물장난 하면

물사마귀 난다고 역정 내시며

옹색한 마루에서 참빗질하던 엄니

훑어 내린 서캐만 눌러 터치다

부엌 담 황토흙을 뜯어 먹는다


온다던 아비는 오지 않고

비에 씻겨 더 까만 까마귀떼만

지붕위로 까옥거릴 때

엄니는 입안 가득한 흙찌끼를

까마귀 지나간 하늘 향해 흩뿌린다


돌모루 구렁이가 우는 날에는



빨래// 윤일균

 

                             

들몰, 자그마한 빨래터엔

샘바다가 여흘여흘

난봉질한 서방 속옷

뒤집어 입고 들어온 날을 옴씹으며

첨첨첨첨 비누 빨래를 한다

몇 날 밤을  곯은 속앓이던가

빨래 방망이 소리는 한풀이되어

천둥번개가 되고

거먹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사랑방 가마솥에 쇠죽 끓이는

웬수 서방 귓전을 때린다

아즈메 코구멍엔 쇠죽김이 풀풀 솟고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야생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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