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房(문학외일반)

[스크랩] 천상병 시인과 찻집 "귀천"

길가다/언젠가는 2006. 4. 3. 20:21

① 천상병 시인과 찻집 ‘귀천’

 

 

  웃음 한자락 지상에 남겨두고…


  3년만에 다시 문화의 향기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우리 고장의 시인. 작가들이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한반도 방방곡곡에 시와 소설. 그림. 음악으로 문화의 꽃씨를 날려 씨를 퍼트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꽃씨는 문화의 향기를 타고 또다른 씨를 퍼트리는 작업으로 이어집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영원할 것입니다. 예술은 늘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요. 경남이 낳은 예술인들을 찾아 그의 숨결과 체취. 흔적을 찾아 볼까 합니다. ‘생생한 소리’를 담아 내도록 바지런히 발걸음을 떼겠습니다. /편집자 註/

 

(사진:천상병 시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서울 인사동 찻집 '귀천'의 내부모습(위사진)과 입구이 있는 시인의 친필 간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전문-

 

  천 시인의 친필사인이 반기는

  서울 인사동 자그만 찻집 '귀천'

  아내 목순옥 여사가

  시인의 숨결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유년시절 보낸 마산 진동바닷가를 그리워했다는 천 시인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지만

  시인의 맑은 영혼 우리곁에 영원히 살아있다

 

  이 세상 소풍은 끝냈지만 우리 곁에 늘 살아있는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

 

  아이와 같은 천진무구함과 무욕(無慾)으로 살다 간 시인의 숨결과 흔적을 찾아 생의 반려자이자 지상의 천사였던 부인 목순옥씨(68)가 운영하는 서울 인사동 찻집 ‘귀천’을 찾았다.

 

  인사동 거리는 21세기 ‘초’ 단위로 바뀌는 서울 한복판에 전통과 예술이 숨을 쉬고. 고샅길이 살아있는 운치와 낭만의 거리였다.

  시인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귀천’은 갤러리 타블로와 DAC 등 전통찻집과 갤러리의 숲에 싸여있었다.

 

  고향에서 찾아온 객을 반기는 간판 ‘귀천’. 시인의 친필로 만든 간판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한 모과향과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품에 안길듯 조그마하고 다소곳한 얼굴로 따스하게 맞이해 주시는 목순옥 여사.

 

  목 여사를 닮은 들국화가 장독대 가득 눈처럼 피어 있다. 시인이 ‘들국화’란 시를 남겼듯 시인의 아내는 천상 시인을 닮았다.

  옛집 툇마루에 놓여있던 고가구가 하나 놓여져 있고 그 위에는 천 시인과 목 여사.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찍은 사진이 아기자기하게 빛바랜 액자 속에서 웃고 있다.

 

  꾸밈없는 테이블은 길게 T자형으로 4개가 놓여있을 뿐. 끝에 앉은 사람의 숨소리도 가깝게 들려올 정도로 아주 조그마한 찻집이다.

  벽에는 생전에 시인이 좋아했던 중광스님 그림과 노학봉의 ‘모과가 있는 풍경’ 등 7점이 걸려 있다.

  신경림. 민영. 강민. 성춘복. 정호승. 박정희. 허영자. 신달자 시인과 극작가 신봉승. 현대시학 대표 정진규. 서정춘. 그리고 ‘귀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잊지 않고 찾는 곳. 그래서 꾸밈없이 소박하지만 더욱 빛나는 곳이다.

 

  ▶시인의 고향사랑
  시인은 마산 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초등 2년 때 일본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귀국. 중2 때부터 마산중에서 서울대 상학과 입학하기까지 5년여 살았다.

  시인은 외할머니 손잡고 진동 바닷가 간 얘기를 하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특히 마산공원묘원(용마산)은 천 시인이 마산중학교 다니던 시절 쉬는 시간이면 자주 찾던 곳이다. 강도 보이고 바닷가도 보이기 때문.

  작품 ‘강물’은 그렇게 태어났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강물 중에서-

 

  천 시인이 용마산 나들이 만큼이나 즐겨 찾았던 곳은 서점이었다.
  새 책이 나오면 매일 서점을 찾아 서서 책을 읽었다.

 

  서점 주인이 따로 불러 ‘집에 가서 보고 갖고 오라”고 할 정도로 공짜책을 읽었으며. 서점 옆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클래식을 좋아했다.

  시인이 43세. 목여사가 36세 되던 72년 그해 결혼을 하고 진동에 있는 선친 산소를 찾으면서 늘 그리워했던 고향땅을 밟았다.

 

  시인이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91년. 모 신문사 ‘작가의 고향’ 취재진과 함께 마산중고교를 찾았지만 문학에의 인연이 시작됐던 마산 시장통 서점과 그가 평생 그리워한 옛집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후 시인의 아내만 95년 문창문화연구회의 문학답사와 산호공원 시비 건립. 지난해 10월 마산문학관 개관 때 등 대여섯번 고향을 찾았다.

 

  ▶천상병 시인과 아내 목순옥 여사

  시인의 아내로 20년 살았다. 시인과의 인연은 고1 방학 때부터.
  박재삼 시인 등 문인들과 ‘갈채’ 다방. 국민배우 최불암 어머니가 경영하던 술집 ‘은성’ 등을 다니며 어울렸다.

 

  71년 7월 어느날. 얼굴빛도 이렇고(거무틔틔한 책상을 가리키며)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바람처럼 눈앞에서 사라진 후 9개월여 볼 수가 없었다. 시인은 행려병자로 시립병원에 실려갔고.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있으면서 첫 시집 ‘새’를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의정부에 살던 시인은 일주일에 두 번 ‘귀천’으로 출근했다. 걸음걸이가 온전하지 못해 붙들다시피 해서 손잡고 동행했다.
  커피 한 잔과 브람스교향곡 4번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시인은 12시에 손칼국수를 먹고 캔맥주나 실비집 막걸리 한 잔이면 족했다.

  전통찻집 ‘예전’다방이나 인사동 화랑에 들어가 그림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지만 시는 하루 중 언제라도 썼다. 제목 정해서 정리되면 “빨리 원고지 줘”라고 했고. 즉석에서 다 써서 “됐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시인은 시 ‘새’를 좋아했다.
  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겪은 그 고통을 문학사에 새겨 넣은 ‘그날은- 새’라는 시에도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있다.

 

  “이젠 몇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 같이/ 당한 그날은…”
  이렇게 시인은 그날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삶을 소풍에 비유했던 시인의 부부는 살아 생전 소풍이랍시고 부산 해운대 간 것이 고작이다.
  “내 마누랍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됐던 시인의 아내는 ‘천상병 시인상’을 제정. 올해로 7회째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아기 같이 순수하게 욕심없이 산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라며 미소짓는다.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영혼은 아내 곁에 영원히 살아 있다. 아니 시인의 아내는 지금도 늘 시인과 함께였다.

  시인의 아내는 시인이 남기고 간 ‘다음’이라는 시를 애송한다.

  이 다음.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면 시인과 손잡고 원없이 소풍을 다니리라…. 글= 김다숙기자

 

dskim@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출처 : 진영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진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