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키 큰 남자를 보면/ 문정희

길가다/언젠가는 2006. 3. 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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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남자를 보면'- 문정희(1947~ )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모처럼 옛일을 얘기하면 누구나 얼굴이 꽃처럼 환하게 핀다. 마음결에 동요의 악보가 숨겨져 있는 걸까. 옛일은 살짝 쑥스럽고 아주 조금 뿌듯하지만, 이 시를 읽고 나선 느닷없이 옛날 옆집 오빠와 누나가 다시 그리워졌다. 떼를 쓰며 졸라도 한결같이 넉넉하고 또 큰 세계였던 그들. 내 마음의 다락방에 살던 그들. 나무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뭇 별을 창에 가득 들이고 살던,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은하(銀河).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