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신용
*가시 1
가시에
얼굴이 비쳐 보일때가 있다
핏방울이 묻어날 듯 날카롭게 돋아있는 가시가
거울처럼 얼굴울 비쳐 보여 줄 때가 있다
내가 가시가 되었을 때다
내가 가시가 되어 가시를 바라볼 때이다
그때 가시는 드므가 된다
가시가 된 내 얼굴을 맑게 떠올려주는 물거울이 된다
가시가 가시를 겨루는 그 전율!
내가 또 하나의 敵意 앞에 섰을 때의 삶이
덫과 같은 맑은 물거울에 파동치는 순간!
-환상통-
*눈부처
그대 눈 속에 들어 있는 얼굴 하나
깊은 동굴 같은 얼굴 하나
슬픔이 석순石筍처럼 맺혀 자라나고 있는
그 돌고드름에 매달려 눈물처럼 그렁이고 있는 얼굴 하나
젖은 나뭇잎 같은 그 위조지폐를, 지갑 속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는
지갑 속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어 마치 강철로 만든 잎처럼, 아무리 바람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얼굴 하나
하고 싶은 말들은 그 눈 속에 울타리처럼 두르고 너와집이라도 지어 살게 하고 싶은
것일까?
돌고드름에 맺힌 눈물을 삽처럼 쥐어주며 더 깊은 동굴을 파게 하고 싶은 듯, 눈꺼풀
을 깜박이는 눈 속의 얼굴 하나
그 태초의 빛인 듯, 손에 쥔 삽으로 그대 눈 속에 어두운 동혈洞穴을 경작하고 있는,
그 위조지폐로 사는 건 슬픔이지만 맺힌 돌고드름의 삽질로, 파헤쳐진 그대 가슴 속을
방으로 꾸며주고 있는 눈이여, 그 동그란 눈동자 속의 영어囹圄여.
한 줄기 슬픔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눈사람 같은
땀방울들, 맺히고 맺혀 이제 가시 기둥 같은 돌고드름이 되어 매달려 있어도
그대 눈 속에 담겨 비로소 얼굴이 되는 얼굴 하나
그대 눈 속에 비쳐져 비로소 세계가 되는 얼굴 하나
-시인세계, 2005, 겨울호-
*도장골 이야기
-부레옥잠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
주희야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이다. 시인이고.
지는 자리도 잘 알고, 쉽게 감출 줄 아는...
*공중변소 속에서
공중변소 속에서 만났지. 그녀
구겨버린 휴지조각으로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어.
가는 눈발 들릴 듯 말 듯 흐느낌 흩날리는 겨울밤
무작정 고향 떠나온 소녀는 아니었네.
통금시간을 지나온 바람은 가슴속 경적소리로 파고들고
나 또한 고향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미아,
배고픔의 손에 휴지처럼 구겨져, 역 앞
그 작은 네모꼴 공간 속에 웅크려 있었지.
사방 벽으로 차단된 변소 속,
이 잿빛 풍경이 내 고향
내 밀폐된 가슴속에 그 눈발 흩날려와, 어지러워
그 흐느낌 찾아갔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 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하얀 백색가루로 녹아서 내 핏줄 속으로 사라져간
그녀,
독한 시멘트 바람에 중독된 그녀.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
그녀의 품속밖에 없네.
*깡통을 위하여
한 때
우리 모두 가난했을 때
판잣집의 쭈그러진 그릇처럼 헐벗었을 때
깡통은,
우리들의 삶의 일부였다
속은 텅 비우고 껍질만으로 굴러 다녀도
깡통은
초라한 꽁초의 집이 되어 주었고
천정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그릇,
뚫린 벽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스스로 텅 비우지 않아도, 늘 비어있는
버린다는 그 의식마저 비우지 않아도, 알맹이는 주고
흙을 담으면 화분이 되어 주었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어 주었다
깡통의 생애가 꽃으로 장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깡통 화분이 놓인 山 1번지,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마당 가에 갖가지 빛깔로
핀
깡통 꽃밭을 보며
비록 빈혈이었지만, 우리는 꿈의 어질머리를 앓기도 했
다
그 깡통을
발로 차지 말자
홧김의 구둣말로 시궁창에 처넣지 말자
텅 빈 껍질만으로 굴러다니는 알몸이
잿빛의 미래를 펼쳐 보이는, 이 앙다문 몸짓의 물구나
무서기라 해도
만나는 그 어떤 것과 몸 섞으며
버려져 뼈아픈 것들을 기억하게 한다 해도
*바람의 입
아프리카에서는 메뚜기 떼를 바람의 입이라고 부른다 바람을 타고 공중을 가득 뒤덮으며 날아와, 지평선을 지우고 하늘을 지우고 들판의 곡식들을 갉아 먹어 버리는 메뚜기, 메뚜기 떼들.
앉은 자리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그 바람의 입들.
누가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하나? 바람에게도 입이 있다. 저렇게 바람의 입을 발견한 아프리카人들에게 나는 무릎을 치며 경탄한다 숲을 지나 온 바람 푸른 풀밭을 걸어 온 바람을 <바람>이라고 발음만 해도 입술이 초록으로 물드는, 내 고정관념의 목덜미에 차가운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그들의 언어 감각.
그러면 에메랄드와 철광석 같은 광물들을 먹어치우기 위해, 새카맣게 몰려든 西歐人들을 그들은 뭐라고 불렀을까? 엔진을 가진 바람의 입? 혹은 총?
낡은 집 풍화하고 있는 늙은 고목만이, 바람의 입이 스쳐간 자국이 아니다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날아와, 이윤만 빼먹고 튀어 버려 먹튀族이라고 불리는, 그 바람의 입도 있다
그 입이 스쳐간 자리는, 정리해고의 빈 쭉정이들만 남는다
그리고 저 간판들 건물의 벽면에 메뚜기의 形象으로 앉아 있는 무수한 돌출 간판들 저것은 바람의 입이 아닌가? 기호화된, 보이지 않는 그 낱낱의 입들 의식이 들판의 곡식인 그 메뚜기 떼들
앉은 자리를 아예 無化시켜 버려야 식성이 풀리는 그 바람의 입들.
-시집/환상통-
*이땅의 풀잎
땅 밑을 흐르는 저 뿌리의 몸부림이 곡괭이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아주 부드러운 포옹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날, 속잎이 눈뜰 때 뼈를 깎는 살을 찢기는 그 아픔으로 뿌리는 땅 밑 가장 어두운 곳에서 땀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맑은 햇살 속, 떠오른 풀잎의 흔들림 결코 지게질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미풍에 흔들리는 꿈의 요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 부는 날 아주 미친 바람 부는 날 피바람 자욱한 황사의 오월이 왔을 때 가녀린 풀잎 위에 실린 햇살 한 짐 한 짐...... 온몸 짓눌려도 생이 마감하는 날까지 그 흔들림으로 져날라서 어둠 속 저 뿌리의 캄캄한 길 위에 등불로 피워놓는 것을 보았다
분신처럼, 어두운 이 땅 위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밝혀 놓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몰래
- 버려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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