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검은 고독, 흰 고독/김연아

길가다/언젠가는 2012. 3. 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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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독, 흰 고독/김연아

    - 변기의 말

 

 

그녀는 검은 올리브 같은 열매를 한 알씩

내 입으로 떨어뜨렸다

죽은 물고기와 재스민 냄새가 내 얼굴에 스민다

 

오라, 오라, 나는 노래하는 변기

내 목구멍은 회전문처럼 열리고 닫힌다

당신은 땅의 자궁에 부어질 것이다

 

아니, 나는 변기가 아니고, 오그라든 자궁이 아니다

이곳은 고해가 행해지는 신성한 화장실

당신은 눈물과 잉크로 가득 찬 가방

장엄한 보리수 아래 앉듯

이 비어 있는 왕좌에 앉으시라

 

흰 고독 위에 앉은 검은 고독, 당신은 깨끗이 정화될 것이다

 

고행자도 끌어안고 걸인도 끌어안고

즐거운 배설물이 담긴 황홀한 반죽통

내 목구멍으로 당신의 피가 흘러갔다

당신의 심장에선 아직도 잉크가 새고 있나?

 

몸을 비울수록 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눈물로 가득 찬 목구멍

뱃속에서 부화시킨 새끼를 입으로 낳은

이브검은쇠숲개구리처럼, 당신의 입은 둥근 자궁

 

이것은 하늘을 향해 열린 동굴, 밤으로 통하는 입구

나의 길은 하느님의 창자보다 더 길고

모든 노선은 나를 통하게 되어 있다

고백과 예언이 뒤섞이는 밤,

 

나의 길은 당신이 낳은 미로를 끌고 멀리 가는 것이다

눈물 흘리는 아이들의 옹알거림처럼

이미 씌어진 것들을 지우기 위해

당신의 조율에서 멀리, 잘 닦여진 메모로부터 멀리

 

나는 인간의 연대기를 간직하고 거대한 속삭임을 듣는 자

당신이 동물을 먹고 산 채로 동물을 묻는 동안

귀머거리가 벙어리에게 귀 기울이는 동안

 

나는 씌어진다 흰 고독 위의 검은 고독으로

흑등고래처럼 엎드려 자기 별자리를 향해가는 나는

잠이 없는 어두운 동물이다.

 

*2012년 2월 호- [현대시학]에서

 

*김연아- 200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