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정영희 -2011,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출처- 다음카페/서낭거리
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 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담뱃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고조할배 다녀가시고
슬하에 자식 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가시고
나이 열 여섯에 절손 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 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 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으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17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시부문 심사평 - 자기 성찰에 충실한 일깨움 돋보여
올해의 응모작품(426편) 대부분이 그 어느 해보다 현란하고 무분별한 어휘들이 난무하는 작품들이 많고 자기 목소리를 가진 작품이 적었다. 공허와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으로는 정영희의 ‘끈’,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 등의 작품이었다.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은 나방과 조각상이 대화를 통해 발가벗겨진 부동의 몸인 조각상과 나비 아닌 존재로써의 날 수 있는 생명체로의 회복을 꾀하고 있는 발상이 흥미롭다.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란 작품에서 ‘세상사가 그대가 피고 지는 사이에 먹어치운 빵과 우유 같다’는 표현 등이 이채롭다. 그리고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란 작품은 있는 힘 다해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젊음을 불사르고 태연히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의연함에서 한 생명의 존엄함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