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현대시학]제19회, 당선작ㅣ 저 곳 참치 외/최호일

길가다/언젠가는 2009. 5. 17. 14:48

 

  제19회〈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최호일

  저 곳 참치

  참치를 보면 다른 별에 가서 넘어지고 싶어진다

  동그란 깡통 참치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바다를 헤엄쳐 다녔는지 깡통 속에서 살이 통통

하게 쪘는지
  지느러미와 내장이 없다

  참치는 좀 더 외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온 듯하다 먼 훗날
  비행접시를 타고 바닷가에 내린 어느 외계인처럼
  사람들은 내용물을 버리고 깡통을 구워 먹을지 모른다
  다 먹고 버린 참치를 차고 노는 아이들

  참치를 숭배하는 자세로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오다가
  덜커덩 자전거가 어느 돌에 걸려 넘어졌다

  저 곳으로 넘어지는 참치

  저 돌은 어느 별에서 날아 왔을까 돌은
  그곳에서 가시를 발라낸 비교적 딱딱한 참치일 수도 있고
  저녁 어스름의 근원적인 고독일 수도 있다

  아가미가 없는 참치

 

  다낭, 단양 연가

  혀가 짧은 사람이 발음하지 않으면 두 도시의 공통점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잠 안 자는 고양이, 한국계의 붉은 태양 사이로 옷 벗은

나비가 나비 옷을 걸치고 날아오고, 모르는 척 나이를 마음대로 꺼내 먹는

사람들이 안개 옷을 사 입고 다니는 곳

  마음에 새겨진 뜨거운 얼음 문신처럼
  방금 사라진 곳

  긴 머리 달력이 거기 펄럭 웃고 있을 때, 바람이 늦은 고양이 울음으로

마을에 내려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잠깐 여는 것처럼 아무도 없는 사

람들이 다녀간 이름. 단양을 다낭이라고 발음하면 두 곳 사이의 거리는 캄캄

하게 지워지지

  입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다시 아득해지지

  그곳에서 밥을 짓고 첫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밤이 지나도록 나를 추억하

지 못할 것이다. 기억나지 않아도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 다

낭, 하고 불러보는 혀가 짧은 사람

  왜 그곳을 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집을 나온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구

름의 아래쪽을 바라보는 게 취미생활. 멀리 습관성 구름이 떠가고 있다.

저 애매한 문장은 노을빛으로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어둠에 쌓이는 빛처

럼, 사랑이 너무 짧아 혀가 꼬인 사람이라면 단양에 가면 다낭 팔경을 볼

수 있다. 들키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어도 태양의 속살과 야자수 옷깃이

선명하게 보인다. 마음 그늘 속으로 이봐요, 얼굴 없는 사람이 웃으며 오

고 있다. 비가 그칠 때처럼 너의 이름을 쓴다. 검정색으로 붉게

  다낭과 단양 사이에 핀 들꽃에 대해
  그리고 나이를 알 수 없는 태양에 대해
  당신은 참 붉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음부꽃

  장다리꽃 밭에는 장다리꽃의 오후가 가득하다

  장다리꽃 옆에서 서성이고 있는 허공에는 나비가 가득하다

  키가 큰 장다리꽃을 일부러 바라보는 사람은 없지만
  키가 큰 장다리꽃 사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열두 살 먹은 계집애가 장다리꽃 노란 쇠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 둘 바람을 세며 오줌을 눌 때도 있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을 셀 때 보이는 꽃
  바람 열 장이 들추어내고 있다.

  시간을 얇게 저미다가 좀 더 크게 썰린 시간은
  어금니로 씹으면 약간 소리가 난다

  열두 살에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
  나비는 날개가 고장난 것처럼 수십 년을 날아다닌다
  보았다 장다리꽃
  보았다 나비
  내 머리에 바람이 분다고 나는 바람 밖에서 말했다

  밤이 오고
  달빛 아래라면 몰라도 어느 오후는
  도화지에 그려놓고 잡아 다니면 주욱 찢어질 것이다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 

 쓸쓸한 당신은, 배가 고프면 가까운 하늘을 비벼먹으세요. 날마다 처음 보는 세상처럼 외로운 날이면, 머리칼이 가장 푸른 바람을 잠깐 집어넣고, 깔깔 웃는 진달래도 따 넣고 벅벅 비비세요. 이 개성 있는 식당은 요즘 성업 중이라 당신의 개성은 무시해 버려요. 꼬리를 잘라버린 도마뱀의 짧은 인연도 그 상처도 아,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되지요. 머리를 감싸거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더라도 마지막 질문처럼 허기는 찾아와요. 거울도 깊이 잠드는 밤이면 내 마음을 뚝뚝 팔다리도 뚝, 머리통도 뚝, 한 통 속에 비벼 넣어요. 자폐증의 월요일과 싱싱한 주말도 살짝 하루를 속여 넣어주세요. 압정을 밟은 듯 묵직해서 만져보면 돌아누운 한밤의 앙상한 등줄기. 저런, 저 기사 아저씨는 배고픈지 막말도 잘해. 욕도 싱겁지 않게 섞어서…… 상처도 비벼놓으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해서 하느님도 못 알아볼 거예요. 정말 저 찬란한 아파트 불빛도 뻔한 거짓말이죠. 즐겁게 비벼드릴까요? 자동차와 당신과 즐거운 낭떠러지! 꽃피는 아침에 문득 꽃이 피었군요.

2
  은하수 단지 분리수거 하는 날은 꼭 비만 오는 날. 비 오는 날 웃기는 정치인은 이쪽, 호주머니가 커다란 재벌은 저쪽 마대 자루. 아 참, 시인도 순서대로 분류해서 여기다 넣는 거 맞죠? 빈 깡통은 어디였더라…… 국물이 흘러요. 이렇게 낡은 생각도 한번 비에 젖나요. 그런데 갈수록 자루가 모자라네. 최신형 우주인이 쓰다버린 첫사랑과 그곳을 거닐던 오솔길과 새로운 농담은 버릴 데가 없어요. 이 그림은 앤디 워홀 바이러스에 심하게 감염돼 격리해야겠군요. 지식은 갈수록 다리를 절어서 돈을 주고 버려야지. 아주 오래 된 어둠은 밤에 살짝 버리면 감쪽같아. 불륜은 가져오지 마세요. 아파트 주민이 아니잖아요. 저 빗줄기 아저씨, 왜 발등을 자꾸 밟으실까. 개성도 좋지만 그렇게 급하시면, 화장장으로 해서 강물에 공짜로 띄워 드릴까요? 저런, 화단 위에 당신이 당신의 몸을 우산 없이 가끔 버리기도 하는군요. 비가 오는 날은 이쪽, 비가 오고 분리수거 하는 날은 은하수 저쪽.

 

  그 겨울의 氣象圖 / 최호일

  신용불량의 날씨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공터에는 늙은 개가 전단지를 훑어보면서
  사건을 파헤치고 있었고
  첫눈이 현장을 덮치고 있었다
  자주 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려서인지
  노파의 목도리는 첫눈이 아니라
  오래된 가난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극에서 무작정 실려온 곰의 행렬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문을 열어놓고
  눈길을 핑계삼아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바람은 확성기를 통해 분양사기단의 비리를
  부풀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서 불고 있고
  현수막이 눈송이를 자꾸 털어내면서
  저 혼자 검붉은 혈서를 써놓고 있었다
  마음의 혈관을 후끈, 면도날이 지나간다 
  아픔이 선명하게 빠져나간다
  이제, 시장 입구에 신문지 같은 하루를 펴놓고
  어둠이 저벅저벅 걸어올 때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눈물로 다듬어 파는 일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비교적 짧게 노파의 소식이
  첫눈 소식에 묻혀 광고 문구처럼 지나갔다
  그녀가 화면 위로 뱉어낸 가래침이
  밥상 위에 하얗게 튄다

  눈 그친 공터에는 개의 발자국이
  그 해 겨울, 눈이 내린 기상도를 그려놓고
  어디론가 개를 데리고 사라졌다 

*1958년 충남 서천 출생. 현재 잡지 프리랜서



신인작품 공모 당선소감

내게 돌아와라 詩야! / 최호일

  장암동 낙지집에서 낙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낙지를 젓가락으로 집어야 하는데 전화가 온 것이다. 저를 아시는지요? 네, [현대시학]입니다. 낙지가 타고 있는데 [현대시학]이란다. 낙지를 뒤집어야 하는데 왜 이제야 연락하는 건가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렇게 그것이 다시 내게 왔다. 이 봄은 작년에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래서 또 낯설게 기쁘고 두근거린다. 어디서 보았을까 내 시는…….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런 시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시의 문 밖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시를 찢거나 태우고 먹고 마시고 토하고, 설거지할 때 뒤에서 끌어안기도 했다. 야속하고 이가 갈리는 시. 그것은 개처럼 나를 물어뜯거나 할퀴면서 놓아주지 않았다. 개의 젖 같은 시! 라고 말할 때 그가 나를 놓쳐 버린 것. 그래, 그만 나를 놓아주렴. 참 많이 아팠다. 헐렁헐렁하고 싸가지 없는 시를 쓰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시를 쓰고 싶다. 그렇게 하려고 물을 부어놓고 내 시를 태우거나 그런 생각에 잠긴다. 잘 가라…… 내 시여! 《현대시학》에 응모할 때 한 번 사용했던 최해일이라는 가명도 이제는 휴지통에 버린다.
  정진규 선생님께서 축하한다고 다시 전화를 주셨다. 그때 드디어 눈물이 났다. 낙지가 타고 있었는데…….
  시 쓰기를 300번쯤 때려치운 적이 있다. 그 때마다 300번쯤 너는 시를 써야 한다고 흔들어 주었던 홍일표 시인이 300번쯤 원망스럽게 고맙다. 시를 심사하는 일은 그 분들에게는 제2의 시 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므로 심사위원님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 오늘은 하루 종일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손잡이가 달린 바람이다. 네가 좋아하는 부추김치 담가 놨다. 내게 돌아와라 詩야! 

심사평
외딴 기쁨, 또는 매우 섬세한 도발 / 오태환 (시인)

도대체 최호일이란 이름을 달고 투고한 이의 정체는 뭘까. 소위 '무릎을 탁! 내리치게 하는 시'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겨를도 없이, 그런 생각 때문에 아예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마음몸살을 앓았다. 부산하게 비점(批點)을 찍고 누수(漏水)되는 곳을 초음파로 탐지하고, 물색하고, 옹이와 마디를 짚어내는 와중에 소금버캐를 날로 씹는 고민이나 갈등 없이 한 사람을 미리 염두에 놓고, 뒷갈망에 대한 근심은 커녕 만만해하긴 기실 드물다.
그의 시편이 지닌 미덕은 가멸찬 상상력과 당돌한 언어에서 만져진다. 어찌 보면 그 상상력과 언어의 육종(育種)은 시단 한켠에서 언제나 쉽게 띄는 품종과 얼추 동종 교배한 것 어슷비슷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호일의 그것은, 이를테면 낯설고 외딴 집에 불현듯 놓였다 쳤을 때의 불안감이나 경계심 비슷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무슨 산뜻한 호기심 때문에 두리번거리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의 상상력과 언어는 다만 분주하고 화려하게 이합집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을 다시 알맞은 악력으로 제어하는 자성(磁性) 같은 게 느껴지고, 이는 최호일에게 고통스런 벼림이 오랜 기간 있어 왔음을 뜻한다.

「저 곳 참치」를 보자. 항생제나 방부제로 칠갑을 한 가치관의 전도라 해도 좋고, 견고한 문명사에 대한 야유라 우겨도 좋겠다. 무엇보다 제목, 또는 첫 행의 염치없는 도발이 끝까지 부담을 주지 않고 문맥에 잠복하면서 흐름을 갈무리하는 솜씨는 전혀 신인답지 않다.
「다낭, 단양 연가」의 배면을 채우는 황량한 위트는 생의 견디기 어려운 아이러니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페이소스로 아리게 채색한다.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은 호들갑스럽게 '섞어서 먹는 것'과 차곡차곡 '나누어 버리는 것' 사이의 거리에 관한 질문이다. 그는 그 거리를 비틀고 조립하고 해체하고 눈금을 긋고 삭제하기를 반복한다. 냉소적이지 않은 문명 비평가처럼.
「그 겨울의 氣象圖」도 그의 말 다루는 재주를 유감 없이 드러낸다. 필경 아파트 분양사기단에 걸려 평생 시장 노점에서 번 재산을 날린 노파와 얽힌 '사건'을 '첫눈'과 '늙은 개'의 위트로 교묘히 처리한다. 화자가 호주머니 속에 감추든 말든 텔레비전에서 '광고문구처럼 지나'가는 '노파의 소식'은 되레 현실보다 더 비극적으로, 더 가슴 시리게 현실을 고발한다. '사건을 파헤치'던 '늙은 개'는 이미 첫눈밭에서 사라졌다.
최호일의 미장센 안에서 발호하는 상상력은, 그러나 사납지도 거칠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모두 능란한 언어 구사력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부리고 놀 줄 아는 천부의 힘을 지닌 것 같다. 그러나, 아니 그러기 때문에, 이쯤에서 언어에 대한 염결한 수세(守勢)를 견지할 수 있는 힘을 배운다면 더 말할 게 없겠다. 당선을 축하한다.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서희자의 「뭉크, 본 뜨다」외 9편과 강현숙의 「쇠라의 점묘법으로 여자의 시간을 그리다」외 9편이다. 조금 더 분발하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 정진규, 이하석, 신현정, 오태환

 

* 현대시학 2009년 4월 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