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다흘린흰소리

소통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길가다/언젠가는 2009. 1. 15. 16:14

소통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불빛을 쫓아 불에 데여 죽어가는 하루살이나 며칠 간의 울음으로 남겼던 매미의 소리 문자는 자신의 시간이 결코 짧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불빛으로 통하고 주어진 하나의 언어로만 행인의 청각을 울렸던 그들의 한여름은 항상 힘있는

그들만의 소중한 소통의 시간이었다. 죽어가면 서의 유언 자체도 그대로 하나였기에 세기의 종말이 온다 해도 그들의 이름은

브리태니커 이전의 백과사전에 재생될 것이며 뇌의 주름사전에 어떠한 바이러스가 침범해도 지워짐 없이 저장 될 것이다.

 

섣달 달빛 아래 피어나는 소한에서 대한으로 가고 있는 희고 긴 길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동장군의 힘있는 한파는

위세를 떨구고 있다. 흐리멍텅 해져 가는 세상놀이에 무슨 일침이라도 하고 싶은가, 스레트 처마 끝에 얼음 창을 세우고 있다.

보초병의 간격은 빈틈없는 사열로 완벽하다. 밤새 부동의 자세로 굳어졌지만 날카로움은 빛나고 있다.

머리통에 꽂히면 즉사하겠다. 소통할 수 있는 욕량의 한계로 드나드는 사념놀이에 꼼짝없이 방 짝에 눌러붙어 있어야

할 것 같다.

 

전화가 왔다. 안부려니 했지만 친구 어머니의 저승 가는 길목에서 부름이었다 -2009-01-09 금요일

면 소재지를 통과한 오후 4시 25분의 광주 행 전북여객 버스를 탔다. 어둠을 먹고 피어나는 형광 빛 아래 30여 년 전에

떠났던 광주의 거리는 타향이나 다름없이 낯설기만 했다. 우혁 친구가  서방 간이정류소에 마중나와 있었다.

반가운 회우였다. 친구들이 모여 있는 규환 친구의 사무실로 갔다.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과 친구 어머니가

모셔 있는 장성병원 영안실로 이동했다. 늘 그래 왔듯이 슬픔 앞에서는 빈틈없는 친구들이다.

지금도 어릴 적과 꼭 같은 철부지 없었던 의리를 지존으로 알고 살아가는 친구들의 모습은 빛나지는 않지만 두고 볼만한

골동품이다. 2년 전 익희라는 친구를 보내면서 우리들 만이라도 건강하자 면서 짤막한 소통으로 살아왔다.

슬픔 앞에서는 날 샘을 해야 한다는 굳어진 약속은 초저녁부터 내리는 폭설로 상주인 광우 친구에게 양해를 얻고 자정에

광주로 향했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모든 혈관에 넣을 수 있을 만큼의 알콜을 적시고 뒷날 아침 8시 30분에 무주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씻겨내지 못한 알콜 기에 금방 나의 몸은 버스 의자와 하나 되어 비몽으로 달렸다. 눈을 뜨니 남원 정류소였다.

독감으로 어제 상갓집에 오지 않은 병태 친구를 보지 못해 꺼름칙했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보지 못하고

간다는 나의 심정을 문자로 보냈다. 몇 분 후에 통화를 했다. 힘없는 소리었다. 당장 병원에 가라고 했다. 월요일에나

간다고 했다, 요즘 독감은 그렇지 않으니 당장 가라고 하면서 늘 그래 왔듯이 짤막한 통화는 끝났다.

- 09시20분 경이였다.  

늦여름부터 내내 자기 사무실에 쓰지 않은 침대가 있다면서 나에게 갖다주마 했던 친구, 별 할 말도 없으면서 전화를 했던,

뭣 땜새 전화했냐, 물은다 치면 "그냥 숨 쉬고 있는가 전화했다" 하면서 서로의 안부만을 확인했던 친구, 내가 군에 있을 때

불현듯 보고 싶으면 차비도 없으면서 친구에게 전화 걸어 전주에서 택시를 타고 갔던. 계림동 골목에서 나의 여비를 챙겨

마중을 나와 만남을 즐겼던,  몇 해 전에는 용욱 친구와 함께 대전에서 희로애락을 몇 개월 같이 했던 친구,

 

정오가 되어 무주에 도착했다. 소금기보다 독한 알콜에 절인 나의 몸은 바닥을 팠다. 깊게만 파고드는 솜이불 무덤 속은 

포근했다. 잠 짐에 전화벨이 울렸다. 보지 못하고 왔던 친구였다. 나의 썩어가는 소리를 가늠했는지 "자냐, 잘 못 걸었다"

하면서 끊었다. 그 뒤, 내 스스로의 소통이 끊어졌을 무렵, 이어졌던 진동 벨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통되는 한 가닥

가늠할 수 없는 신음 같은 신호가 울렸지만 비몽 속 나의 의지는 그 전파를 잡지 못했다.

몇 시간의 숙면을 끝내고 병태 친구에게 왔던 숫자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전원 스위치는 꺼져 있었다.

-15시 30분 경이였다.

 

내일은 필구 친구와 오래전부터 약속한 덕유산 산행이다. 산은 지금도 나의 옆에 있지만 산은 어머니의 가슴같이 모든 것을

안아주기에 좋다. 아침부터 나는 부산했다. 아들놈이 초등학교 때 쓰다 버려둔 보온 도시락을 찾아 며칠 전에 해 놨던

밥을 챙겼다. 알따 하게 오장육부를 자극하며 훑고 내려가는 참이슬도 필수 과목이기에 챙겼다. 대전에서 출발한 버스를

마중하려 면 소재지로 나갔다. -09-01-11 08:30분-  

도착 시간은 늦었다. 금산휴게실에서 아침을 먹었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았던 약속이기에 시간을 예측할 수 없어 지척이지만 차의 발품을 빌리기로 했다.  차 속에서 하잘 것 없는 

잡소리를 들으면서 기다렸다. 차와 여자는 기다리면 온다는 심정으로

 

온 천지는 맹동이었다. 차 지붕과 범퍼의 마당은 30여 분의 가동에도 흰 옷을 벗지 않았다.

혹여, 만날 수 있으려나 했던, 대전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인 재갑, 광욱, 유진, 상만이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영민이와 필구 친구만이었다.  반가운 만남이었다.

덕유산의 설경은 말 그대로 신이 주신 은총이었다. 꾸밈없는 신선의 흰 저고리였다.

덕유산의 모든 나무는 숨도 쉬지 않은 채 흰밥만을 고봉으로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뭣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훈장하고 있었다. 백지 같은 마음으로 누구나가 놀다갈 수 있는 빈 마당으로 살라 한다.  

비우고 살라한다, 더 비우고 살라한다. 비우는 것만이 채우는 것이라 한다, 이젠 버릴 것 없다고 우겨도 봤지만 버리라 한다, 

줄 것을 찾으라 한다. 주라 한다, 나는 꾹꾹 더는 줄 것이 없다 하였지만 나누라 한다, 주라 한다.

나는 그 백발 훈장 일침이 섞인 흰 밥으로 허기를 채우려 덕유산을 찾았을 것이다. 북서풍을 동반한 눈보라는 몸뚱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얼음밥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체면을 잃고서 서로의 체온을 맞걸며 온기를 나눴다.

 

향적봉의 백지장을 뚫고 하산하는 눈밭의 체감 온도는 -20도 이상이었다. 내리는 눈은 얼음꽃 되어 나뭇가지에 만발이었다.

흰 세상만이 한창이었다. 이런저런 그림 같은 흰 세상의 길목에서 넘나드는 사념을 훑고 가는 길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효성 친구였다. 비보였다. 병태 친구가 의식을 잃고 전남대학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친구 마누라에

게 반복된 비보가 울렸다. 짜진 하루 행보에 갈 수도 없는 산행 길은 슬픔과 기도뿐이었다.

 

뒤풀이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어둠과 냉기만이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촛불과 향을 피웠다.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부처님께 소원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 주시옵고 내일이면 나의 이름을 불러주게 해 주십시오.

여러 친구의 이름도 부르면서 쓰발놈아 나 맨정신에 살기 힘들어서 며칠 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어 엄살 한 번

부렸다고.....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더 이상의 악담도 좋으니 소통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히

빌면서 내일의 만남을 기대한다.

 

09-01-12일 월요일

하루에 두 차례 만의 면회를 허락하는 중환자실의 시간대를 맞춰 광주로 향한다. 하루에 몇 번 없는 버스 시간 때문에 나의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장수를 거쳐 남원과 담양을 달리는 내내 눈보라는 억세기도 했다, 광주는 온통 하얀 광장이였다, 3시간여 만에

전남대학교 중환자실을 찾았다. 친구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오감은 정지되었다. 친구야, 할 일이 많이 남았잖아,

세상살이 소통이 이리 힘들었더냐? 그래 백지장 같은 지금의 휴식을 빨리 마치고 어떠한 것이라도 좋으니 세상의 색깔을 찾자.

보자. 그리고 말하자. 네가 병원에 실려가기 30분 전, 나의 깊은 잠 때문에 소통하지 못했던 그 사연을, 어떠한 생각이라도

소통하자.

 

면회를 마치고 허기를 채웠다. 친구들은 의식을 잃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허탈과 허무로 파고든 만감을 이겨내지 못하였던가,

저녁을 겸사해 취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 해 연희 친구 주선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슬픔과 허탈을 섞여 들이마신 술잔은 맹물같았다. 퍼 마셨다. 어찌면 망각을 자위하기라도 하려는 듯 퍼 마셨다. 순수의 백지를

더듬고 싶었던 심정이었을 게다,  아침에 일어나니 핸드폰이 없다. 답답했다. 모든 숫자의 저장은 손폰에 있고 나의 뇌는 텅

비어있었다. 단지 입원해 있는 친구 번호만이 재생 될 뿐, 오랜만에 들어 선 공중전화 박스다. 친구 손폰이 친구 마누라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다이얼을 누른다. 다른 친구들의 번호와 소통이 시작 됐다.

10년 이상을 한 번호로 같이 했던 전화가 없으니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참기로 한다. 소통의 간절함을 더 느껴보기로 한다.

친구와의 소통을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