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밥그릇 경전 / 이덕규

길가다/언젠가는 2008. 12. 6. 12:22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2004년 현대시학작품상 수상작 중에서]

 

 이덕규 시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 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2004년 제9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2003년 문학동네
현재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