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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경리,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
길가다/언젠가는
2008. 5. 11. 23:14
故박경리,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
출처 : 머니투데이 | 기사입력 2008.05.05 19:18
[머니투데이 박종진기자]
5일 소설가 박경리가 타계했다. 82년 그의 생애에는 우리 현대사가 그대로 투영됐고 그 질곡의 삶은 다시 작품으로 녹아들었다.
여자 박경리는 불행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 그의 말대로 불행한 삶은 작품세계의 원천이 됐다.
◇모진 세월
5일 소설가 박경리가 타계했다. 82년 그의 생애에는 우리 현대사가 그대로 투영됐고 그 질곡의 삶은 다시 작품으로 녹아들었다.
여자 박경리는 불행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 그의 말대로 불행한 삶은 작품세계의 원천이 됐다.
◇모진 세월
그는 1926년 10월 경남 통영에서 자칭 "불합리한 출생"을 했다.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아 아버지는 거의 나가 살았으며 어머니는 그런 남편 앞에서 무력했다. 훗날 박경리는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박경리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와 결혼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의 남편과 아들을 앗아갔다.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워야 했던 박경리에게 세월은 모질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계산'이 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한 이래 그의 소설 속에선 남편과 아들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여성화자가 많이 등장했다.
60년 4.19의 경험은 박경리의 세계를 넓혔다.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한 장편들을 내놓았다. 이제 시선이 개인과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민족과 인류의 보편성을 다루는 데까지 뻗치게 됐다는 평을 받았다.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토지'와 박경리
69년 기념비적 대작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련은 그를 따라왔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병마와 싸웠고 70년대에는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필화사건으로 투옥돼 손자 원보까지 도맡아야 했다. 80년 무렵 외동딸 김영주가 있던 원주로 내려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 자리에 정착했다.
26년간의 집필 끝에 94년 전 5부로 완성된 '토지'는 말 그대로 한국 현대문학의 근간이 될만한 대작이다. 등장인물이 700여명에 권수로는 21권, 원고지 4만장에 달하는 분량이다. TV드라마로도 3번 만들어졌다.
'토지'를 완성해 낸 이런 '질김'이 오히려 박경리를 세월의 흐름 앞에 담담히 순응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고도 담배를 끊지 않고 치료도 거부해왔던 그다.
◇"참 홀가분하다"
올해 월간 현대문학 4월 호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신작시에는 성찰과 회한도 묻어났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 사별 후 삼십여 년 /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 …(중략)…꿈에서 깨면 /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어머니' 중)
박경리가 그토록 미워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중)
고인은 소설처럼 살다가 시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박경리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와 결혼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의 남편과 아들을 앗아갔다.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워야 했던 박경리에게 세월은 모질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계산'이 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한 이래 그의 소설 속에선 남편과 아들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여성화자가 많이 등장했다.
60년 4.19의 경험은 박경리의 세계를 넓혔다.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한 장편들을 내놓았다. 이제 시선이 개인과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민족과 인류의 보편성을 다루는 데까지 뻗치게 됐다는 평을 받았다.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토지'와 박경리
69년 기념비적 대작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련은 그를 따라왔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병마와 싸웠고 70년대에는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필화사건으로 투옥돼 손자 원보까지 도맡아야 했다. 80년 무렵 외동딸 김영주가 있던 원주로 내려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 자리에 정착했다.
26년간의 집필 끝에 94년 전 5부로 완성된 '토지'는 말 그대로 한국 현대문학의 근간이 될만한 대작이다. 등장인물이 700여명에 권수로는 21권, 원고지 4만장에 달하는 분량이다. TV드라마로도 3번 만들어졌다.
'토지'를 완성해 낸 이런 '질김'이 오히려 박경리를 세월의 흐름 앞에 담담히 순응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고도 담배를 끊지 않고 치료도 거부해왔던 그다.
◇"참 홀가분하다"
올해 월간 현대문학 4월 호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신작시에는 성찰과 회한도 묻어났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 사별 후 삼십여 년 /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 …(중략)…꿈에서 깨면 /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어머니' 중)
박경리가 그토록 미워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중)
고인은 소설처럼 살다가 시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관련기사]
【서울=뉴시스】
5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한 소설가 박경리씨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평범하지 못한 삶은 그녀의 문학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성장과정은 불행했고, 6·25 탓에 남편과 헤어지는 등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오히려 작품세계를 깊고 풍요롭게 했다.
고인은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 태생이다. 아버지는 14세에 결혼, 18세에 박경리를 낳았다. 하지만 박경리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박경리는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자랐다. 진주여고를 다닐 때는 학비를 대주기로 한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다 매를 맞기도 했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인천 전매국에 근무하던 남편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후 남편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됐다. 결국 박경리는 6·25 때 월북한 남편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창작에 전념한 계기이기도 했다.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추천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계산', 1956년 '흑흑백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초기 작품에는 주로 자신의 삶을 담았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이나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딸이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 '표류도' 등이다. 어머니를 억누르는 아버지를 등장시켜 여성 억압적 현실을 비판하는 '전도', '표류도' 등도 발표했다.
1969년 8월부터 1994년 8월까지 무려 25년 동안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당초 대하소설로 계획됐던 작품은 아니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권 분량으로 예상했던 소설이다. 어머니와 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고, 결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탄생했다.
'토지'는 강원 원주시 단구동 자택에서 탈고됐다. 이 집은 1989년 토지개발계획에 따라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한국토지공사가 공원 터로 전환했다. 박경리의 옛 집과 정원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공원은 '토지'의 배경에서 따온 용두레벌,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등 3개 테마공원으로 이뤄졌다. 1980년부터 고인은 이 곳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했다.
박경리의 고향인 통영에도 고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건립된다. 2010년 완공이 목표다.
< 관련사진 있음 >
강경지기자 bright@newsis.com
<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5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한 소설가 박경리씨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평범하지 못한 삶은 그녀의 문학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성장과정은 불행했고, 6·25 탓에 남편과 헤어지는 등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오히려 작품세계를 깊고 풍요롭게 했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인천 전매국에 근무하던 남편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후 남편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됐다. 결국 박경리는 6·25 때 월북한 남편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창작에 전념한 계기이기도 했다.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추천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계산', 1956년 '흑흑백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초기 작품에는 주로 자신의 삶을 담았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이나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딸이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 '표류도' 등이다. 어머니를 억누르는 아버지를 등장시켜 여성 억압적 현실을 비판하는 '전도', '표류도' 등도 발표했다.
1969년 8월부터 1994년 8월까지 무려 25년 동안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당초 대하소설로 계획됐던 작품은 아니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권 분량으로 예상했던 소설이다. 어머니와 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고, 결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탄생했다.
'토지'는 강원 원주시 단구동 자택에서 탈고됐다. 이 집은 1989년 토지개발계획에 따라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한국토지공사가 공원 터로 전환했다. 박경리의 옛 집과 정원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공원은 '토지'의 배경에서 따온 용두레벌,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등 3개 테마공원으로 이뤄졌다. 1980년부터 고인은 이 곳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했다.
박경리의 고향인 통영에도 고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건립된다. 2010년 완공이 목표다.
< 관련사진 있음 >
강경지기자 bright@newsis.com
<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故박경리 선생 "시련 없었다면 토지도 없어"
[중앙일보 손민호] 박경리가 끝내 흙으로 돌아갔다.
영정 앞에서 외람된 언사일 수 있겠지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닐는지 모른다. 기억 속에서 박경리는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건강은, 나이가 있으니까….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아요.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
박경리는 흙의 작가요 생명의 작가였다. 굳이 『토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전의 그는 텃밭에서 일군 채소를 손수 무치고 담가 토지문화관을 찾은 후배작가들에게 먹이곤 했다. 농약 한 번 쓰지 않은, 이른바 유기농 야채였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육신에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폐에 종양이 슬었어도 담배를 끊지 않았고, 한 달 가까이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는 치료진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렇게 박경리는 갔다. 흙으로 돌아갔다.
#모진 팔자 드센 인생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초저녁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초저녁'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생전의 작가가 들려준 사주 얘기다.
"초저녁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초저녁 범띠 생이지.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막 먹잇감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할 때잖아. 여자 사주치곤 기가 아주 센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팔자대로 산 거 같아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여의었고 뒤이어 아들도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62)은 남편 옥바라지로 호된 고역을 치렀다. 딸의 남편, 즉 선생의 사위는 김지하(67) 시인이다. 생전의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토지』에 매달릴 수 있었겠어"라고 되물었다. 1973년에 쓴 『토지』 서문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의 일화도 있다. 박경리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어른이 소설가 김동리(1913∼95) 선생이다. 한데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맨 처음 보여준 원고는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 54년 박경리의 습작시를 일독한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한다. 상심한 그에게 김동리는 대신 "소설을 써봐라" 권한다. 그래서 쓴 소설이 이듬해 '현대문학'에 발표된 '계산'이다. 박경리의 등단작 말이다. 박경리에게도 인생지사는 새옹지마였나 보다.
#『토지』 그리고 박경리
『토지』 1부의 배경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 들판. 박경리는 거기 땅 한 번도 안 밟아보고서 『토지』를 썼다. 2부의 주무대가 되는 만주땅 용정도 마찬가지다. 책이 다 나온 뒤에야 그는 소설 속 현장을 둘러봤다. 그러면 『토지』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오롯이 작가의 상상에 기댄 것일까.
"『토지』는 6ㆍ25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있어요. 외가는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콜레라)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가설을 위한 망상』, 320쪽)
그 빛깔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박경리는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평사리의 악양 들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평사리의 풍경이 소설에 묘사해 놓은 모습과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털어놨다. 몇 해 전 세트를 짓고 TV 드라마를 촬영한 뒤로 평사리는 『토지』의 무대를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연중 부산하다.
누가 뭐래도 박경리는 『토지』의 작가다. 그러나 『토지』는 단순히 한 작가의 대표작에 머물지 않는다. 『토지』는 한국의 현대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하나의 극점이다. 프랑스 문학이 19세기 국민소설의 시대를 겪었던 것처럼 한국 문학은 『토지』로 인하여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었다.
『토지』가 세운 몇 가지 기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필 기간 26년. 69년 시작해 94년 8월 15일 완결했다. 권수로 21권이고, 원고지 분량으로 3만1200장에 이른다. 등장인물은 700명을 웃돈다. 『토지』는 또 한국형 문화 콘텐츠의 전형이 되는 작품이다. 수차례 TV 드라마로 방영됐고, 영화ㆍ가극ㆍ창극도 제작됐다. 만화 『토지』와 청소년판 『토지』도 출간됐다. 『토지』의 두 주인공 '길상이'와 '서희'는 한국소설에서 가장 알려진 캐릭터 중 하나다.
#토지문화관과 청계천
박경리는 1999년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에 토지문화관(www.togicul.or.kr)을 지었다. 원주 시내에 있던 작가의 집이 개발되자 보상비와 지자체 지원금 등을 모아 세운 문화창작 공간이자 작가 자신의 처소다. 박경리는 여기에 작가 창작실을 마련해 후배 작가들이 공짜로 들어와 서너 달씩 살게끔 했다. 은희경ㆍ김선우ㆍ천운영ㆍ윤성희ㆍ천명관ㆍ백가흠 등이 토지문화관 단골 손님이다.
강원도 인제의 만해마을과 함께 한국에서 두 군데뿐인 작가 창작실을 두고 있지만 토지문화관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하다. 현재 15개인 작가 창작실을 더 넓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생전의 박경리는 기업의 후원 따위를 한사코 거절했다. 여기저기에 얼굴 비치며 아쉬운 소리 꺼내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까닭이다. 박경리는 손수 고추밭과 배추밭을 일궜고, 손수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밥상에 올렸다. 생태계 복원이란 큰 뜻 말고도 부식비라도 아껴 보려는 속사정이 담긴 밥상이었다.
토지문화관은 가끔 토론회와 세미나도 주최한다. 몇 해 전 열린 토지문화관 세미나에서 청계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초로 제기됐다. 그 제안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가 자신의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니까 토지문화관은, 청계천 복원의 꿈이 맨 처음 여문 고향인 셈이다.
그 토지문화관이 주인을 잃었다. 딸 김영주씨가 관장으로 있고, 문화예술 단체의 지원이 당장 끊기진 않겠지만 박경리 없는 토지문화관은 생각만 해도 휑하다. 박경리의 빈자리가 벌써 걱정된다.
손민호 기자 < plovesonjoongang.co.kr >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의 작품세계>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16 | 최종수정 2008.05.05 17:55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출판인들이 뽑은 우리 나라 대표 소설가, 네티즌 선정 20세기를 가장 빛낸 여성, 독자들이 꼽은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경리(朴景利)씨는 명실상부한 한국 문단의 큰 나무였다.
작가로서의 이러한 명성은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이라고 일컬어지는 '토지' 한편으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대작 '토지'의 육중한 무게에 다소 눌렸으나 토지를 전후해, 그리고 토지 사이사이 발표됐던 20여편의 장편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도 문단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는 "'토지'는 결코 평지돌출이 아니었다"며 "주제의식과 서술방법 그리고 작가적 역량의 면에서 '표류도'나 '김약국의 딸들'은 이미 '토지'의 출현을 예고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단편과 '성녀와 마녀' = 박씨는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 장편으로 옮겨갔는데 초기 작품들은 비교적 작가의 개인적 삶과 밀착돼 있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는 "'계산', '불신시대' 등 초기 단편소설은 작가의 신변 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내용의 초기 단편 '암흑시대'를 비롯해 초기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들이 주로 등장했다.
작가가 쓴 첫 장편 연애소설로, 1960년 여성지 '여원'에 연재될 당시 파격적 자유연애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성녀와 마녀' 역시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과 개인적인 삶,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박경리 초기 문학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부유하고 유망한 작곡가 수영이 자존심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숙과 자신만을 바로보는 정숙한 여자 하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연재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사실상 묻혀있다가 43년 만인 2003년에 첫 출간됐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작가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도래를 알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통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세대와 세대의 갈등, 옛 도덕과 새 도덕 사이에서 겪어내는 분열증과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약국의 딸들'ㆍ'시장과 전장' = 박씨는 1960년대 많은 장편소설을 썼는데, 이중 연재가 아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됐던 '김약국의 딸들'(1962년)과 '시장과 전장'(1964년)은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은 1993년 재출간돼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남 통영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의 다섯 딸과 그의 아내 한실댁을 중심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린 작품이다.
김만수 군산대 교수는 "김약국의 어떤 딸도 내 딸들이기에 소중하다는 것,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이 지극한 모성의 원리야말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일 것"이라며 "작가가 몰두한 생명운동의 근원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나란히 서술하면서 전쟁 속 개인들의 삶을 보여준 소설이다.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지영과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훈을 통해 이념을 위한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의 비애를 그려냈다.
최유찬 교수는 "이 작품은 남북 어느 한쪽의 시선에 기울지 않고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성과 외에 작가의 생명 사상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며 "전쟁이란 집단의 횡포 앞에서 유린되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 그리고 그 억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싹트고 있는 생명의 싹이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완성 '나비야 청산가자'와 시 = 토지 완간 이후 소설 창작을 중단했던 박씨는 2003년 9년 만에 신작 소설을 내놓았다.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나비야 청산가자'는 토지가 끝난 시점인 1945년 이후 50년의 세월을 그린 작품으로 박씨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던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지식인에게 전하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표현하기도 한 이 작품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연재 세 차례만에 원고지 440여 매 분량으로 중단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해연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에서 일했던 마름의 아들 석호와 결혼해 남남보다 먼 사이로 지내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농장일꾼 정서방이 자신의 딸과 석호의 간통 현장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담아내려던 박씨의 시도는 안타깝게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우뚝 선 박씨였지만 첫 습작은 시로 시작했고 소설을 내놓는 간간이 시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의 시간' 등의 시집에 실린 진솔한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박씨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또 생태와 환경에 대한 애착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씨가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한 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공교롭게도 박씨의 문학 인생은 시로 시작해 시로 끝을 맺게 됐다.
mihye@yna.co.kr
(끝)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16 | 최종수정 2008.05.05 17:58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경리(朴景利)씨는 명실상부한 한국 문단의 큰 나무였다.
작가로서의 이러한 명성은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이라고 일컬어지는 '토지' 한편으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대작 '토지'의 육중한 무게에 다소 눌렸으나 토지를 전후해, 그리고 토지 사이사이 발표됐던 20여편의 장편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도 문단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초기 단편과 '성녀와 마녀' = 박씨는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 장편으로 옮겨갔는데 초기 작품들은 비교적 작가의 개인적 삶과 밀착돼 있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는 "'계산', '불신시대' 등 초기 단편소설은 작가의 신변 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내용의 초기 단편 '암흑시대'를 비롯해 초기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들이 주로 등장했다.
작가가 쓴 첫 장편 연애소설로, 1960년 여성지 '여원'에 연재될 당시 파격적 자유연애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성녀와 마녀' 역시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과 개인적인 삶,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박경리 초기 문학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부유하고 유망한 작곡가 수영이 자존심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숙과 자신만을 바로보는 정숙한 여자 하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연재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사실상 묻혀있다가 43년 만인 2003년에 첫 출간됐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작가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도래를 알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통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세대와 세대의 갈등, 옛 도덕과 새 도덕 사이에서 겪어내는 분열증과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약국의 딸들'ㆍ'시장과 전장' = 박씨는 1960년대 많은 장편소설을 썼는데, 이중 연재가 아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됐던 '김약국의 딸들'(1962년)과 '시장과 전장'(1964년)은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은 1993년 재출간돼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남 통영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의 다섯 딸과 그의 아내 한실댁을 중심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린 작품이다.
김만수 군산대 교수는 "김약국의 어떤 딸도 내 딸들이기에 소중하다는 것,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이 지극한 모성의 원리야말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일 것"이라며 "작가가 몰두한 생명운동의 근원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나란히 서술하면서 전쟁 속 개인들의 삶을 보여준 소설이다.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지영과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훈을 통해 이념을 위한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의 비애를 그려냈다.
최유찬 교수는 "이 작품은 남북 어느 한쪽의 시선에 기울지 않고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성과 외에 작가의 생명 사상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며 "전쟁이란 집단의 횡포 앞에서 유린되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 그리고 그 억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싹트고 있는 생명의 싹이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완성 '나비야 청산가자'와 시 = 토지 완간 이후 소설 창작을 중단했던 박씨는 2003년 9년 만에 신작 소설을 내놓았다.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나비야 청산가자'는 토지가 끝난 시점인 1945년 이후 50년의 세월을 그린 작품으로 박씨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던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지식인에게 전하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표현하기도 한 이 작품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연재 세 차례만에 원고지 440여 매 분량으로 중단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해연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에서 일했던 마름의 아들 석호와 결혼해 남남보다 먼 사이로 지내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농장일꾼 정서방이 자신의 딸과 석호의 간통 현장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담아내려던 박씨의 시도는 안타깝게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우뚝 선 박씨였지만 첫 습작은 시로 시작했고 소설을 내놓는 간간이 시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의 시간' 등의 시집에 실린 진솔한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박씨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또 생태와 환경에 대한 애착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씨가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한 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공교롭게도 박씨의 문학 인생은 시로 시작해 시로 끝을 맺게 됐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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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에 우뚝선 대하소설 '토지'>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16 | 최종수정 2008.05.05 17:58
25년만에 완성한 박경리 대표작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평가받는 '토지'(나남출판.전21권)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서희는 딸 양현으로부터 일본의 패망소식을 전해듣고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무겁게 조여왔던 고통스러운 쇠사슬에서 벗어난 기분을 맛본다.
고(故) 박경리 씨가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첫 회 연재를 시작한 뒤 1994년 8월 15일 '문화일보'에 연재할 마지막 원고를 탈고하기까지 '토지' 전체 5부가 완성되는 데는 무려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소설은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서울, 만주, 일본을 거쳐 다시 평사리 섬진강 가에 이른 서희가 해방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난다. 작가가 원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날을 소설이 끝나는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6.25때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기르며 힘들게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는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암 선고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작가는 가슴에 붕대를 동여매고 '토지'를 집필했다고 한다. 게다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김지하 시인을 사위로 둔 탓에 작가의 삶은 언제나 무거운 쇠사슬을 휘감은 듯 고통의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작 '토지'를 마무리한 날은 그래서 작가 개인에게는 창작의 고통스런 족쇄에서 풀려난 날이었을 것이다.
'토지'는 구한말에서 시작해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기를 다루고 있다. 최참판댁 손녀 서희가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하동에서 하얼빈까지 유전하다가 고향땅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는 것이 소설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
작품에는 동학농민전쟁, 을사보호조약, 청일전쟁, 1902년 7월 전국에 번졌던 콜레라, 1909년 간도협약,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관동대지진,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1923년 형평사 운동, 1937년 만주사변 등 역사적 사건이 무수히 등장한다.
'토지'에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아 이름없는 민초를 포함해 700여 명의 인물들이 명멸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아온 기존 역사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토지'는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소설 시대를 열었다.
'토지'가 역사책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것을 두고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사보다 더 역사적인 소설"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문학평론가 이재선 서강대 명예교수는 '창안적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토지'에 부여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지'는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의 주제에 종속시키는 서구 소설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을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문학평론가 정현기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판소리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이런저런 작은 이야기들이 마디처럼 삽입한 것을 놓고 '토지'의 창작방식을 '마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상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름을 가진 인물만 해도 578명이나 등장하는 '토지'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에 많은 연구자들이 공감한다"면서 "작품의 주인공은 서희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장인물 모두이며, 이 때문에 이야기가 하나의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핏줄처럼 퍼져나가는 독특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어느 학자는 '토지'를 '대하(大河)소설'이 아니라 '다하(多河)소설'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흘러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토지'는 탈(脫)중심적 소설이기도 하다.
이상진 교수는 "이야기 전개와 창작방식에서 '토지'의 탈중심적 성격은 작가의 생명사상과 연결된다"면서 "어느 것도 중심이 아니며, 인물마다 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작가의 사상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분석했다.
작가의 생명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恨)과 연결된다. 작가는 모든 생명에는 한이 있다고 자주 말해왔다. 그 한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만 유지된다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었다. 이 때문인지 '토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불행한 사람들 뿐이다. 인간은 모두 한을 가진 존재라는 작가의 사상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과 사랑, 일본 제국주의 등 물신주의에 대한 올곧은 저항, 생명사상 등 '토지'가 가진 풍부한 내용 때문에 이를 원작으로 삼아 KBS와 SBS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TV드라마로 제작했고, 1974년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지미와 이순재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또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서사음악극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졌으며, 청소년판과 만화로도 출간되는 등 다른 장르로 끊임없이 변용돼 왔다. 또한 하동 평사리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작품 속의 공간인 평사리에서는 해마다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이는 '토지'의 가치가 그만큼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토지'는 서구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 근대문학을 절정기에 올려놓은 대작이다. 이후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최명희의 '혼불' 등 대하소설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소설은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작가적 사명을 예감했던지 박씨는 1966년 수필집 'Q씨에게'에 실린 '창작의 주변'이라는 글에서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습작이라 한다. 그것을 쓰기 위해 나는 이삼년을 기다려야 할까보다"라며 대작을 집필하겠다는 의욕을 내비친 뒤 실제로 3년 후 '토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그가 펼쳐낸 '토지'의 작품세계는 평사리 들판처럼 드넓고, 지리산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한국문학사에 자리 잡았다.
ckchu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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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평가받는 '토지'(나남출판.전21권)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서희는 딸 양현으로부터 일본의 패망소식을 전해듣고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무겁게 조여왔던 고통스러운 쇠사슬에서 벗어난 기분을 맛본다.
소설은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서울, 만주, 일본을 거쳐 다시 평사리 섬진강 가에 이른 서희가 해방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난다. 작가가 원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날을 소설이 끝나는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6.25때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기르며 힘들게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는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암 선고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작가는 가슴에 붕대를 동여매고 '토지'를 집필했다고 한다. 게다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김지하 시인을 사위로 둔 탓에 작가의 삶은 언제나 무거운 쇠사슬을 휘감은 듯 고통의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작 '토지'를 마무리한 날은 그래서 작가 개인에게는 창작의 고통스런 족쇄에서 풀려난 날이었을 것이다.
'토지'는 구한말에서 시작해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기를 다루고 있다. 최참판댁 손녀 서희가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하동에서 하얼빈까지 유전하다가 고향땅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는 것이 소설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
작품에는 동학농민전쟁, 을사보호조약, 청일전쟁, 1902년 7월 전국에 번졌던 콜레라, 1909년 간도협약,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관동대지진,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1923년 형평사 운동, 1937년 만주사변 등 역사적 사건이 무수히 등장한다.
'토지'에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아 이름없는 민초를 포함해 700여 명의 인물들이 명멸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아온 기존 역사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토지'는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소설 시대를 열었다.
'토지'가 역사책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것을 두고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사보다 더 역사적인 소설"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문학평론가 이재선 서강대 명예교수는 '창안적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토지'에 부여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지'는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의 주제에 종속시키는 서구 소설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을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문학평론가 정현기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판소리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이런저런 작은 이야기들이 마디처럼 삽입한 것을 놓고 '토지'의 창작방식을 '마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상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름을 가진 인물만 해도 578명이나 등장하는 '토지'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에 많은 연구자들이 공감한다"면서 "작품의 주인공은 서희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장인물 모두이며, 이 때문에 이야기가 하나의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핏줄처럼 퍼져나가는 독특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어느 학자는 '토지'를 '대하(大河)소설'이 아니라 '다하(多河)소설'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흘러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토지'는 탈(脫)중심적 소설이기도 하다.
이상진 교수는 "이야기 전개와 창작방식에서 '토지'의 탈중심적 성격은 작가의 생명사상과 연결된다"면서 "어느 것도 중심이 아니며, 인물마다 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작가의 사상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분석했다.
작가의 생명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恨)과 연결된다. 작가는 모든 생명에는 한이 있다고 자주 말해왔다. 그 한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만 유지된다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었다. 이 때문인지 '토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불행한 사람들 뿐이다. 인간은 모두 한을 가진 존재라는 작가의 사상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과 사랑, 일본 제국주의 등 물신주의에 대한 올곧은 저항, 생명사상 등 '토지'가 가진 풍부한 내용 때문에 이를 원작으로 삼아 KBS와 SBS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TV드라마로 제작했고, 1974년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지미와 이순재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또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서사음악극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졌으며, 청소년판과 만화로도 출간되는 등 다른 장르로 끊임없이 변용돼 왔다. 또한 하동 평사리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작품 속의 공간인 평사리에서는 해마다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이는 '토지'의 가치가 그만큼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토지'는 서구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 근대문학을 절정기에 올려놓은 대작이다. 이후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최명희의 '혼불' 등 대하소설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소설은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작가적 사명을 예감했던지 박씨는 1966년 수필집 'Q씨에게'에 실린 '창작의 주변'이라는 글에서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습작이라 한다. 그것을 쓰기 위해 나는 이삼년을 기다려야 할까보다"라며 대작을 집필하겠다는 의욕을 내비친 뒤 실제로 3년 후 '토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그가 펼쳐낸 '토지'의 작품세계는 평사리 들판처럼 드넓고, 지리산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한국문학사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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