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와 빤쓰 /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발 1 / 손현숙
1
엄마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든
아가의 맨발이 포대기 밖으로 쏙 빠져 나와 있다.
한번도 자신의 무게를 실어보지 못한 발.
아무 것도 경계할 줄 모르는 태초의 꽃.
아가의 말랑말랑한 발을 보며
언젠가는 저 발이 견디며 가야 하는
땅위의 돌들과 음모와 때로는 돌아서야 하는 사랑과
어느새 두터워진 발바닥의 감각들로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모멸들을 생각하며
엄마의 등에 업혀 환하게 잠든
아가의 발을 좇아 횡단보도 초록불의 깜박임을 건넌다.
2
장난스럽게 떠돌던 어린 발이 쉴 곳을 찾아 숨어든다.
신설동 로터리 노벨극장 동시상영관,
모르는 발을 따라 슬며시 의자 속으로 몸을 묻는다.
월하의 공동묘지, 한 발 잘려 한 발로만 떠도는 영혼.
내 다리 내놔! 내 다리 내놔!
스크린 밖으로 나를 잡으러 오는 저 맨발의 귀신
한 발로 콩콩거리며 아직도 나를 따라 다닌다.
무서운 세상으로 사정없이 내몰아 친다.
오래 전 어머니 등에 업혀 꽃처럼 피어났던 저 발.
그 이후로 일평생 죄를 싣고 다녀야했던 에덴 그 이후로의 족적.
3
깜박임도 없이 켜지는 빨간 신호등의 의미는 단호하다.
상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34번 국도변에
검정 하이힐 한 켤레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횡단보도 선에서 조금 비껴
삶의 기억을 담은 채 비틀거리는 발은
우리들의 내일처럼 방향이 모호하다.
운명을 달리 하는 바로 그 순간
이승을 움켜잡았던
꼬일 대로 꼬여진 생의 발바닥
그녀 살아 마지막 체온을 감당했을
신발 속으로 사운거리는 가을 햇살이 차다.
애지 (2003. 겨울)
사진 - 최민식
손현숙 시인
1959년 서울 출생.
신구대학 사진과와 한국예술 신학대학 문창과 졸업.
1999년 <현대시학>에 시 <꽃들은 죽으려고 피어난다> 외 4편으로 등단
'국풍'사진공모 수상, '평사리문학상' 수상.
2002년 시집 <너를 훔친다> 문학사상사
출처-내 영혼의 깊은 곳(네이버)